프로이트. 창조적 작가와 몽상 중

Swimming/BOOKS 2011. 12. 30. 13:08
문학가가 아닌 전문가의 이야기. 문학의 유희성에 대한 진지한 조명. 문학의 가치에 대한 존중.


  문학적 성향의 최초의 흔적들을 찾아야 한다면 어린아이드레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어린아이가 가장 애착을 느끼고 몰두하는 것은 놀이다. 어쩌면 우리는 놀고 있는 아이야말로 자김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면에서,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세계의 사물들을 새로운 질서에 맞추어 자신의 취향에 따라 배치하고 있다는 면에서 마치 한 사람의 시인처럼 행동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아이가 그 세계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일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이는 자신의 놀이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으며 엄청난 양의 정의적 움직임을 놀이 속에 쏟아 붓게 된다. 놀이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진지함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일 것이다.(유희의 반의어는 진지함보다도 현실)
(중략)
  문학 창조자는 결국 놀이를 하는 아이와 동일한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역시 몽상적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고 그 세계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실과 자신의 몽상적 세계를 선명하게 구분하면서도 창조 행위에 엄청난 양의 정의적 움직임을 쏟고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문학 창조라는 세계의 비현실성에서부터 예술적 기법에 관계된 매우 중요한 결과들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현실 그대로라면 즐거움을 제공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몽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변화되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로는 고통스러운 감정들이지만 그 감정들은 문학 창조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는 관객들에게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중략) 
  사춘기를 지나 청년이 되면 놀이를 중단하고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그가 놀이에서 얻을 수 있었던 즐거움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한번 경험한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대상을 바꿀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단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단념이 아니라 한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대체 작업인 것이다. 대용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청년이 놀이를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그가 포기하는 것ㅇ느 다른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그가 실제의 대상들에게 기대어 자신의 놀이를 보강했던 그 보강 자체다. 이제 그는 놀이를 하는 대신 자신의 몽상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는 구름잡는 이야기 속에서 모래성을 쌓는 것이다. 흔히 비몽사몽이라고 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어느 순간에서건 이런 몽상의 세계를 그려 보았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중략)

 - 성인과 아이의 놀이의 차이

  성인의 몽상은 어린아이의 놀이보다 관찰하기 훨씬 어렵다. (중략) 아이들은 그들이 결코 어른들을 위해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어른들에게 놀이를 숨기지 않는다. 반면에 성인이라면 잣니이 빠져있는 몽상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숨기려고 하면서 (중략) 이런 이유로 오직 자신만이 그런 몽상들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또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완벽하게 유사한 몽상적 차조물들을 볼 수 있다는 느낌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중략)

 - 몽상의 몇가지 특징

  행복한 사람들은 몽상을 좇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오직 만족을 모르는 자들만이 몽상을 좇을지도 모른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몽상을 움직이는 힘이고, 모든 몽상은 욕망의 완결이며 동시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보정이다. (자신의 격을 높이려는 욕망과 성적 욕망) 


   (중략) 

  - 백일몽의 법칙 

  몽상은 세 개의 각기 다른 시간 사이를, 다시 말해 재현 행위의 세 순간 사이를 부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 활동은 현재의 인상에 및락되어 있는데, 이 현재의 인상이란 개인이 품고 있는 어떤 큰 욕망을 일깨우는 한 계기이기도 하다. 이 계기에서 시작해 우리의 정신 활동은 이전의 경험으로 되돌아간다. 정신 활동은 이때 미래와 연관된 상황을 창조해 내는데, 이 상황이 욕망이 충족되는 상황, 더 정확히 말해 낮에 꾸는 꿈 혹은 몽상인 것이다. (중략) 시간을 가로지르는 욕망의 도화선이 요컨대 과거.현재.미래라는 세 시간대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불만족 - 과거 모델 통해 - 미래 이미지로 만들기)

(중략)


- 낮꿈과 창작의 차이  
  비록 그들(낮꿈러)이  우리에게 자신들이 품고 있는 몽상을 털어놓는다 해도 우리가 그들의 고백을 들으면 결코 어떤 즐거움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몽상들은 거부감을 주거나 기껏해야 냉담한 반응만을 얻게 된다. 그러나 만일 창조적인 작가들이 작업을 학나 혹은 우리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몽상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들려줄 때에는 반대로 진한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여러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일까? (중략) 바로 이 기교 속에 아마도 진정한 시학이 존재할 것이다. 이 기교는 두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창조자는 낮에 꾸는 꿈을 변형시키거나 베일로 가림으로써 자아 예찬이 주조를 이루는 꿈의 성격을 약화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몽상을 통해 순수하게 형식적인, 다시 말해 미학적인 즐거움을 제공하여 독자들을 유희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즐거움은 깊은 정신적 움직임들에서 시작하는 좀더 큰 즐거움에 대한 욕구를 상쇄시킬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을 우리는 흔히 상여 유혹이라거나 혹은 사전 쾌락이라고 불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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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 루이 조르주 탱

Swimming/BOOKS 2011. 12. 27. 06:03

부제는 '이성애와 동성애 그 대결의 기록'으로 잡아놨지만, 너무 자극적이거나 점잖 빼는 부제들이 흔히 그렇듯 원문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동성애와 이성애 간의 싸움보다는 오늘날의 이성애 개념이 지배적 힘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중세부터 현대까지, 세 가지 방향에서 풀어놓은 책이다. 동성애와 이성애 간의 알력은 이 세 방향 중 첫 번째, 중세 기사 사회(남성 동성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나올 뿐, 이 다음 이어지는 신학적 관점과 의학적 관점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뭐 표지부터가 참... 어설프게 외설적이긴 한데 말이지. 

  원인보다는 현상 진행 설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각 방향에 따른 예시가 다양하다. 내용이 정밀하다기보다는 많은 사람이 접근하기 용이한 책. 굉장히 술술 읽힌다. 일단 오늘날의 이성애 개념이 어느 시대에나 '정상'이며 '의문시하는 것부터 배격되는 인생 규칙'은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은 효과적으로 전달됨. 예시는 치밀하고 말투는 위트있다. 후룩 후룩 잘 읽힌다. 

  다만 현상 설명에 치중하다보니 '왜'가 약한 건 아쉬움.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이성애가 부각되기 전 사회와 후 사회의 차이는 '남성사회'에서 '여성'을 (도구로서나마) 사회에 편입시키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그런 변화는 왜 일어났는가?  책은 서구 문화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설명하고 있는 현상은 사실 여러 문화권의 동성 집단에서 흔히 보이는 것들인데, '왜'가 설명되었다면 서구 성애 담론 양상에서 한 발 더 나가지 않았을까 싶어 아쉽다. 

  그리고 아무리 근대 이전까지 여권이 시망이었고 사료도 얼마 안 남아 있다고 하지만 여성 동성애 혹은 여성 동성 사회에 대한 설명이 너무 없는 것도 좀 씁쓸함. 여자가 동성 문화권에서나 이성애 문화권에서나 주체적으로 다뤄진 적이 거의 없다는 건 잘 아는데 그래도 좀.....'ㅠ' 오늘날 이성애담론이 의문시 자체가 힘들 정도로 지배적이고 폭력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에 대한 반발로 이런 작업을 수행한다면 당연히 여성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거 아님?'ㅠ' 

  저자는 - 이성애의 관습은 성별에 따른 사회관계, 일반적으로 남성의 지배가 행사하는 관계를 확실히 구조화하는 사회의 객관적인 요구- 라고 했는데 책에서 다룬 데까지만 보면 적어도 중세 동성 사회 문화도 어차피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구조에 따라 만들어진 것 아닌가? 물롱 동성애 문화라고 해서 성적 편견에서 자유로울 거라고는 생각 안합미다. 이성애 문화건 남성 중심 동성애 문화건 여성 중심 동성애 문화건, 이성에게나 동성 양쪽에게 매우 매우 편견 쩔 수 있음.ㅋ

  다만, 이성애 문화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사회적 요인을 저렇게 잡았다면 동성 사회 문화 혹은 이성애에 별 관심 없던 문화는 왜 그런 사회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는지 차이점이 드러나야 할 거 아냥.ㅎㅎㅎ 그리고 남자 동성애는 설명이 된다 치고 여성 동성애는 아예 전혀 설명이 안되잖 ㅎㅎ 그럼 이게 과연 성애 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거냐구. 거기가 너무 빈약... 뭐. 저자가 예상 불가능하게 써놓은 건 아니지만 부족한 건 부족한 거라긔.
  그래도 계속 흥미를 유발하는 좋은 책이었음. 특히 3부 의사들의 저항 편이 신선했다. 



>

 ... 마찬가지로 이성애의 관습이 보편적이라 할지언정 이성애 문화는 보편적이지 않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명백히 이성애적이라 할지라도, 이로써 인류의 번식이 가능해지긴 하지만, 인간의 문화가 반드시 이성애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고대 또는 '원시'사회의 검토를 통해 입증되듯이 문화나 문학 또는 예술의 재현에서 남녀 커플과 사랑에 언제나 우위가 부여되지는 않았다. (중략) 실제로 수많은 사회에서 이성애의 관습이 비록 통상적인 관례라 해도 열정의 양태는 물론이고, 사랑의 양태로도 고양되지 않는다. 
- 9~11p 머리말 중 


  예전에 나약한 남자는 에레크처럼 여자의 환심을 사려는 풍조와 이성애 문화를 다소 지나치게 따르는 이였다. 반대로 남색자는 남성의 동성사회 문화를 다소 지나치게 따르는 이였다. 이것들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고정관념이었다. 
(중략)
프랑스 역사에서 앙리 3세는 필시 남색자이자 동시에 여자 같은 남자라고 비난받은 최초의 주요 인물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결합이 어느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19세기부터는 동서애자의 이미지가 대체로 여성화된 남자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리 3세 이전에는 이와 같은 동일시가 그다지 실재하지 않았고 여자 같은 남색자의 모습이 결코 그 정도로 공들여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73p 제 1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기사들의 저항 


  적어도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에 따라 철학자가 영혼의 의사라면 의사는 육체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207p 제 3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의사들의 저항 
 

  오베리는 자신의 개론서에서 시인, 특히 롱사르로부터 많은 구절을 인용한다. 이것은 현대 독자에게 뜻밖의 일일지 모르지만, 사실 당시의 의사들은 시인이 견디고 동시에 퍼뜨린 사회병리를 치료하려고 애썼다. 시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욕망을 고양하는 새로운 문화의 확산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고, 장 오베리는 이 현상에 대부분의 책임이 있는 이들을 끊임없이 참조하면서 이 문화를 개선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210p  제 3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의사들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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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BBIT Trailer

Swimming/etc 2011. 12. 21. 13:24


하나님 부처님 읊다가 쥰에게 지적 받고 수정: 에루여!!!!!!!!!!!!!!!!!!!!!!!!!!!!!!!!!!!!!

불꽃같은 낚임은 10년 단위로 오고, 역시 인생은 덕질 한 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긴 휴덕기를 살아 남은 한마리 짐승이 여기 울부짖노라. 에미나러ㅣㅏㅁㄴㅇ라ㅣㅓ미ㅏㄴㅇ라ㅣㅓㅁㄴ ㅇ피러재거ㅣㅏㅁ너ㅣㅏㅁㄴㅇ리ㅏㅓ니ㅏ머ㅏ ㄹ피터잭슨!!!!!!!!!






그리하여 10년 만에 다시 쑥 눈 앞에 나타난 겐옹과, 너무나 그리운 호빗골과, 젊고 사랑스럽고 귀여운 빌보에 '그리고 거기에 한 드워프가 있었다' 급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소린까지... 아 정말 눈물나게 그리웠다. 저 색감. 저 세계...ㅠㅠ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다. 진짜루.

솔직히 고백하자면 역시 난 소설 원작보다는 영화의 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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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 - 갈매기

Swimming/etc 2011. 12. 10. 23:23
연극열전 발. 12월 9일 8시 서강대 메리홀

  러시아는 대체 어떤 땅이길래 저런 미친 군상들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수 있나? 매료되든 질색하든 결국 진저리치게 하고야 마는, 미쳤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저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똑같이 소용돌이를 그려도 러시아 소용돌이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으... 아무튼 네 잘 발렸습니다. 좋은 배우와 연출과 극본이 만나면 가만히 앉아서 정면을 3시간 동안 쳐다보는 것도 이렇게나 뿌듯하다. 그래서 대략 절절 쩔면서 1막의 니나 톤으로 멋있어 연발 중. 죄다 망해서, 망하는 방법도 멋있어.'///' 

볼 때는 엄청 몰입해서 봤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극 자체 이야기는 의외로 산만한 것 같은데 연출로 확 잡은 것 같다. 여러가지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서 재미있었다. 역시 연극은 멋있어 222222222 어 그러니까 어떤 게 멋있냐면, 표현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끌어내서 표현해 내는 걸 한 눈에 볼 수 있는 게 멋있어 '///' 안에 자그마한 마을이 들어 있는 수정구슬을 이리 저리 굴려보는 느낌. 구슬 속 집 하나 사람 하나 길 하나 하나와 구슬 전체에 맺힌 그림자와 곡선을 따라 흐르는 빛을 한꺼번에 즐기는 기분. 멋있다 ㅇㅇ 나도 해볼 수 있으면 좋겠..........지..라.......... . 고 생각만 한.............................지만 그래도 너무 재미있어 보이...구 아무튼 어 아니 어 파닥파닥 


이 공연에서 한가지 난감한 게 있다면 꼬스챠와 니나가 다 너무 존잘이라 순진한 얼뜨기 작가 배우라기엔 너무 잘 한다는 거야... 특히 니나... 아니 왜 첫 무대에서부터 바르고 그래... 뭐 저런 데카당한 대사를 저렇게 박력 넘치게 하니 발리잖니 어 근데 솔직히 대본 자체가 좀 존잘인 것 같아. 극 전체에서 제일 발린 대사가 - 모든 생명은 사라져.. 슬픈 시간을 마쳤다. - 였음. 이건 1막 극중극에서부터 좋았다. 2막에서 니나와 꼬스챠가 마주 보고 동시에 외울 때가 정점. 

이 외에 머릿 속에 새겨진 부분은 질투. 마을 의사 양반의 입버릇이 '이 많은 사랑이란...- 인데 사랑보다도 만연한 게 질투. 역시 질투는 나의 힘 ㅇㅇ... 꼬스챠와 뜨리고린(?) 아무튼 두 글쟁이양반의 글쓰기 타령은 흥미롭긴 했는데 그렇게 강렬하진 않았다. 역시 굉장히 길어서 그랬나보다. 뜨리고린이 최초로 자기 속내를 폭발하는 장면에서는 작가선생보다 끝까지 천.진.난.만.한 니나 쪽이 더 인상적이었음. 꼬스챠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내 처지가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보니... 뭔가 직접적으로 동의하자니 거울보고 박수치는 거 같아 부끄럽고 그렇다고 외면하기도 뭣하고 에이 찌질한 놈 하고 혀 차고 삽질 한 번 하게 되는 식. 

반면 제목이기도 한 갈매기의 의미는 잘 모르겠음.... 뭐 갖다 붙이기 나름이지 싶음. 갈매기가 그래서 뭐야? 이해가 안 가 라고 하면 꼬스챠가 한대로 갈매기, 나, 총을 가리키며 이케 이케 단순한데 왜 이해를 못해! 하고 외치면 그만일 것 같음. 갈매기, 나, 총. 여기에 뭐 더 설명할 게 있어. 아...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으...으... 

마지막까지 가장 인상이 강했던 캐릭터는 니나,(니나 처음 나올 때에는 난 저 정도까지 쓰일 줄 몰랐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인물은 뜨리고린(난 끝까지 약한 인간이 참 좋다. 지 약한 걸 못 떨치는 인간이 좋더라.), 꼬스챠는 확실히 배우가 문학도삘은 나지 않았는데 그게 또 그 나름 어울렸던 것 같다. 맨몸으로 벽에 머리를 찧어대는 이미지가 잡혀서 뜨리고린과 꽤 대비가 잘 되었음. 자기 역할 이미지랑 잘 맞는 다른 배역들과 좀 달라 보이기도 하고 '' 


하루 정도 지나면 좀 더 말같은 감상이 나올 줄 알았는데 여전히 정돈이 잘 안된다. 이게 다 러시아 예명과 존잘에 자비가 없어서 그렇다 ㅇㅇ 극이 멋져서이기도 하고. 아. 생각하면 할수록 연극은 멋있다.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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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나츠메 소세키

Swimming/BOOKS 2011. 9. 28. 14:33

일본 소설 싫어 싫어 노래를 부르지만, 아니 노래를 부르기에 더욱 더 일본에 대해 무지하다. 바로 옆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되도록 관심을 두고 싶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골치 썩이고 싶지 않은 거지. 일본의 제국주의는 나빠. 일본의 몰염치한 역사관은 나빠. 국가로서의 일본과 일본에 사는 사람 하나 하나를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 죽이네 살리네하는 사람들도 한심해.(어째서 일본 혐한이랑 노는 방식이 똑같냐? 그래. 걔네랑 파이트떠서 이기면 그게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냐?) 그렇다고 아무 생각없이 재미있으면 장땡이라는 애들도 웃기고.(특히 역사적으로 무개념한 작품을 아무 생각없이 핥는 애들 보면 딱하고 안쓰럽지) 사실 혐일이나 일본숭배자나 둘 다 역사적으로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잖아.

게다가 소설이 하도 대세라길래 몇개 집어 읽어보긴 했는데 딱 '그래서 어쩌라고' 이상 할 말이 없네. 번역체는 마음에 들지 않고 더욱이 일본 소설 저변에 깔려 있는 분위기를 납득하지 못하겠고. 아. 이 나라, 아니 이 집단 이상해. 

 그렇다고 이렇게 말하는 내 자신이 편견에서 자유로운가 하면 그럴 리가 있냐. 그래서 난 공평해지기 위해 가장 불공평한 자세를 취한다. 이 반찬은 너무 쓰네 짜네 다네 따지기 귀찮으니 아예 밥상에 올리지 않는, 이런걸 간단히 두 글자로 말하면 '편견'이라고 한다. 그 편견을 수 년간 유지한다. 



그러다 스터디에서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읽기로 한 김에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들었다가 아주 제대로 낚였다. 일단 너무 재밌다. 100년 전 글이라 템포가 가끔 아니 대체 왜 이래 싶게 느려질 때가 있는데 (가뜩이나 만담 늘어놓는 글이라) 그런데도 재미있다. 요즘 작가들의 어지간한 의뭉은 명함도 못 내밀겠다. 우왕.ㅇ<-< 게다가 지금까지 접했던 일본 작품들처럼 이게 일본발이란 걸 스루할 수 있거나 일본발의 한계라며 거식할 것 없이, 100년 전 일본이라는 걸 그냥 쭉 읽어나갈 수 있었다는 게 나한텐 꽤 충격이었음. 

제국주의고 러일전쟁이고 중일전쟁이고 한일합방이고 간에, 아무튼 거기에도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거다. 그것도 도저히 우리나라의 근대와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형태로. 뭐. 식민지가 되었으니 당연한 거지만, 문학사를 읽으며 그래 문예사조고 철학용어고 할 거 없이 받았더랬지 애초에 일본어로 번역된 걸 중역해서 들여오니까, 당장 이상만 해도 일본 누구 누구 영향 엄청 받았더랬고... 딱 거기까지가 내 세계관 속 근대 일본의 전부였다. 그 이상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이게 구첩 반상에 나물 반찬 하나 정도 비중이 아니었던 거지.

어차피 요새는 1900년대 초중부를 훑고 있으니 좀 더 각잡고 읽어보자고 마음 먹게 되었음. 그래도 여전히 일본 최근 소설은 마음에 안 들지만...

19세기, 20세기 초 인사들 글을 읽으며 그들의 입담이 지금 현재에도 유효, 아니 오히려 현재에 더 절실하다고 느낄 때마다 참 아득해진다. 그런 한편 어쩐지 안심이 되기도 하고. 요즘 세상이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붕 뜬 존재는 아니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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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싸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딱 무시하는 것이 안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무릇 대책이 없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법이다. 세상을 돌아봐도 그렇다. 어제 시집온 신부가 오늘 죽지 말란 보장이 전혀 없는데, 신랑은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행복하게 살자는 둥 좋은 말만 늘어놓을 뿐 걱정하는 기색이 없다. 걱정하지 않는 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걱정해 봐야 아무런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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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요즘 사람들은 자기와 타인의 이해관계에 깊은 골이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말일세. 그런 자각심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하루하루 예민해지기 때문에 결국은 일거수일투족조차 자연스럽게, 마음대로 할 수 없어졌다는 걸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라는 사람이 스티븐슨을 평하기를, 그는 방에서 거울 앞을 지날 때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정도로 한시도 자신을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추세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지. 눈을 감아도 나, 눈을 떠도 나, 이 나란 것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도처에 따라다니니까 인간의 행동거지가 인위적이고 좀스러워진 거야. 스스로도 답답하고, 세상도 숨이 턱 막히고 아침부터 밤까지 맞선을 보는 남녀 같은 심정으로 지내야 하는 거야. 유유자적이니 느긋함이니 하는 말은 글자는 있어도 의미는 없는 말이 되고 말았지. 그런 점에서 요즘 사람들이 탐정 같고 도둑놈 같다는 걸세. 탐정이란 직업은 남의 눈을 속이는 한이 있어도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장사니까, 특히 자각심이 강하지 않으면 안 되지. 요즘 사람들은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자기에게 이득이 되고 어떻게 하면 손해가 되는지를 생각하니까. 탐정과 마찬가지로 자각심이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지.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두리번두리번, 우왕좌왕,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한시도 안심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사람의 마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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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이라! 예술 역시 부부와 같은 운명으로 귀결될 것이야. 개성의 발전이란 개성의 자유를 뜻하지 않는가. 개성의 자유는 즉 나는 나, 너는 너라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 예술이 존재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예술이 번창하려면 예술가와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 사이에 개성의 일치가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자네가 아무리 신체시를 짓는 시인이라고 목청 돋우어 봐야 자네 시를 읽고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딱한 일이지만 자네 시의 독자는 자네밖에 없는 셈이지 않은가. ...

  사람들이 저마다 특별한 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타인이 지은 시 따위는 재미있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실제로 지금도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네. 작금의 영국 소설가가 가운데 작품에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메리디스를 보게나. 제임스를 보게나. 읽는 이들이 지극히 적지 않은가. 적을 수밖에. 그런 작품은 그런 개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는 읽어도 재미있찌 않으니 어쩔 수 없지...

  그렇지 않은가. 자네가 쓴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쓴 것은 자네가 이해하지 못하는데, 자네와 나 사이에 예술이고 뭐고 있을 수 없지 않은가. ...

  아무튼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개성을 허용하면 그만큼 인간관계가 답답해진다는 것은 틀림없네. 니체가 초인을 내세운 것도 그 답답함을 해소할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런 철학으로 변형시켰기 때문이지. 자칫 그 사상이 니체의 이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이상이 아니라 불평이야.... 그 목소리는 용맹하게 정진하는 목소리가 아니야. 원한에 차 통분하는 목소리지. 

.. 옛날에는 공자가 딱 한 명 뿐이었으니까 공자 혼자서 활개를 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공자가 여럿이야. 아니 어쩌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공자인지도 모르지. 그러니 나는 공자요, 하고 거들먹거려 봐야 먹히질 않아. 먹히지 않으니 불만이 생기고, 불만이 불거지니까 책 속에다 초인 따위를 휘두르게 된 거야. 우리는 자유를 원했고, 그리고 자유를 얻었어. 그런데 자유를 얻고 보니까 상대적으로 부자유를 의식하게 되엇으니, 난감한 일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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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죽는다. 죽어 이 평온함을 얻는다. 
평온함은 죽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기쁘고 기쁜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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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혼에 대한 뻘잡담

Swimming 2011. 9. 19. 11:44
  은혼을 만들고 있는 건 문제에 대한 한없는 회피와 농담따먹기다. 말 그대로 잠깐 들어앉아서 즐기는 화장실 농담. 누가 화장실에서 치룬 대소변에 대해 심도있게 곱씹나? 배설하기 전의 초조감과 후의 시원함만 남을 뿐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쪽이든 비난하는 쪽이든, 진지해지면 진다. 진지해질수록 영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는 거다. 

의외의 미덕은 그 화장실농담을 한 발 떨어져서 보게 할 때가 있다는 거지만, 그 이상의 문제 제기는 할 수 없다.  애초에 모든 문제를 회피해 버리고 있으니까. 긴토키의 그 뜬금없는 설교마저 문제 제기를 원천봉쇄시켜 버리고 만다. 외계인이 쳐들어오고 전통이 붕괴되고 양이지사들이 쫓기는 은혼의 세계는 긴토키의 설교로 아무 문제없는 세계가 되고 만다. 긴토키가 거기 있으니까 그걸로 된 거다. 벌써 몇번이고 '그냥'이란 말을 썼는데, 지금까지 본 만화 중 '그냥'이란 말이 은혼보다 더 어울리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음.

그냥 재미있다 재미없다만 있을 뿐. 가끔 내 입 속에서 씹히고 뒤섞이고 녹아가는 불량식품 꼬라지들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걸 보게 되는 것.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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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틀담 드 파리 러시아 버전?

Swimming/etc 2011. 8. 13. 22:44

http://www.youtube.com/watch?v=Ele36V1_ECU
 
갑자기 벨이 땡겨서 유튭 검색했다가 러시아 버전이 걸림. 첫 등장하는 꼽추가 너무 잘생겨서 깜놀. 이건 팬텀 분장한 우베씨보다 더 충격. 그래도 우베씨는 분장한 얼굴 반쪽은 확실히 흉하게나 했지. 얜 뭐니. 얼굴에 색연필 좀 칠한 캐미남 아냐... 페뷔스보다 꼽추가 더 이쁘다니...! 


 공공우물에 당당하게 다리를 걸치고 물놀이를 하는 에스메랄다는 만국공통인가보군. 내가 어지간하면 여캐가 눈에 안들어와서인지 에스메랄다는 그냥 내 취향이 아니어서인지 (둘이 결국 같은 소리같지만) 내게 에스메랄다는 공공우물을 오염시키는 무개념녀일 뿐이고.... 에스메랄다 넘버가 워낙 인상이 흐려서 그런가? 노틀담 드 파리는 뮤지컬로서는 좀 지겨워하는 편이지만 각 곡들은 꽤 좋아하는데 개중 에스메랄다 노래는 영... 말하다가 노틀담 드 파리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꼽아보니 사실상 에스메랄다 노래 빼고 다 좋아하더라. 페뷔스가 병신같은 대사를 신내린 듯 지껄여대는 데시레랑 플뢰르 드 리스의 저 집시년을 죽여(정확한 제목이 ... 글쎄...?), 아지트, 그랭고아르의 밀레니엄도 좋아하고... 아 그러고보니 꼽추 노래도 별로 좋아하진 않는군. 이 종 저 종 불러대는 노래 지겨워... 음. 노래가 지겨운건지 그쯤되면 공연이 지겨워지는 건지 그건 잘 구분이 안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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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 이방인

Swimming/BOOKS 2011. 7. 20. 10:23

로버트 E 하인리히의 낯선 땅 이방인. '너님이 단테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면 소설에서 종교를 논하지 마세요. 더더욱이 신 종교를 만들지 마세요.' 목록으로 분류. 

작가가 자기 능력에 대해 도취되었을 때, 그리고 자신의 대상을 옹호하려고 할 때 어떻게 이야기가 구려지는지 잘 보여줌. 네. 감사합니다. 타산지석으로 잘 써먹을게요.ㅇ<-<
우습게도 이문열 사람의 아들 읽으면서 나왔던 삐리리함이 그대로 묻어나옴. 우월한 설명가가 나와서 따발따발 작가의 생각을 읊어준다든가. 교리에 대해 논할 땐 그 교리 자체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보다는 줄줄줄 자기가 아는 종교 잡식을 늘어 놓는다든가. 덕분에 구성이며 흐름이 막 깨짐. 대체 이런 얘기 늘어 놓으려고 '화성'을 그토록 공들여 설정했나 싶음. 

한마디로 '난 육체적으로도 굉장히 젊고 생각도 깨어있다' 고 생각하는 50대 사장님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 사장님이 아무리 재담가라고 해도 듣고 있다보면 살짝 역겨워진다. 뭐, 60년대에는 나름 깨어있는 ㅋ 감성이 50년 후 사람 눈에 안 차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가상 설정'을 할 때라든가, 이야기 찰지게 끌고 나가는 건 재미있음.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잘 보고 감. ... 비록 책을 딱 반권으로 나눠서 뒷쪽은 냄비받침으로나 쓰고 싶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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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마지막 상영일인데...

Swimming/x-men 2011. 7. 19. 15:20

nn차 찍으시는 분들에 비하면 세발에 피지만, 스스로에게는 충족될 만큼 봤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마지막 날'이라는 것만으로 땡긴다. 반하긴 했지만 정들진 않았다고 생각했거늘....... 

새삼스럽게 밟히는 몇몇 장면들, 몇몇 인물들. 개중 압권은 행크. 난 이상하게 니콜라스홀트 맨얼굴 보이는버전보다 퍼런 털북숭이 되었을 때 행크가 더 좋더라. 단순히 인상적이어서 그런지? 하지만 인상적이기로는 맨얼굴 행크도 만만치 않은걸. 저 꽃미모가 어떻게 눈에 안 띄겠어.
근데 이상하게 행크하면 떠오르는 건 약간 어색한 파란 털 분장 상태. 조역이기에 + 예산이 없기에 + 속편이 나올지 안 나올지 알 수 없기에 변화 과정 슉 넘어가버렸는데 왠지 납득하게 됨. 솔까 이 영화가 행크 설정 하나로 대충 때우고 있는 설정들이 한둘이냐곸ㅋㅋㅋㅋ 세리브로 발명+엑스맨 초음속? 비행기+엑스맨 단복(아마도 방탄방수)+하보크 능력 조절기+벤시 행글라이더+실패하긴 했지만 신체 변이 약물............. 

................................. 참고로 저거 60년대... 60년대 기술력.... 



...미친ㅋㅋㅋㅋㅋ 사실 겨스님이나 에릭보다 행크가 더 중요한 거 아냐?... 아 뭐야 이겤ㅋㅋㅋㅋㅋㅋㅋ 존나 저거 다 만드는데 돌아오는 말은 고작 '우와 행크 너 천재구낭 ㅎㅎ + ㅋㅋ 광대색히 근데 이건 좀 멋짐 +  아랐어 행크 입닥쳐 '

... 아 씨발 내가 눈물이 안나올 수가 없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행크얔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말하다보니 행크를 위해 한번 더 보고 싶어진다. 내가 한 번 더 보든 말든 행크는 아무 상관없는데 그냥 기분이 그렇다. 
하지만 아마도 다시 보면서 어떻게 발린다 해도 마지막에 뙇! 하고 정면으로 잡히는 에뤽을 보고 난 미친듯이 뿜게 되게치 ... 에뤽 논 자유에 모미 아냐 ... 아....  자네으~ 배우자인~ 익재비어 겨스님 미테서 이라고 이... 아니 이게 아니라.... 

... 마지막 상영일인데 이런 뻘포스팅이나 하는 내가 웃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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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보이 인터뷰 개드립

Swimming/x-men 2011. 7. 6. 16:21

그 왜 있잖습니까. 영상 찾기가 귀찮아서 그냥 간단히 설명하자면. 초능력을 선택할 수 있다면 뭐 가지고 싶냐고 물으니까 치던 개드립이요. 매카보이: 사람들을 사랑에 빠지게 하는 능력이여 / 패스밴더: 우왕 너님 굿 난 그냥 하늘을 날라댕길 수 있음 좋겠는데 / 매카보이: ㅋ 내 능력으로 니가 나한테 반하게 해서 니가 날 델구 날라댕김 되잖아 ㅋ / 패스밴더: 어 구랭 ㅋㅋ 

참 인터뷰 자체가 깨알같긴 한데 말야. '넌 내게 반해 넌 내게 빠져 넌 나으 셔틀 헤어날 수 없어' 이것도 터지긴 하지만. 그보다도 그... 그래서 셔틀질을 한다는 가정 하에 말야. 그러고 다니면 대체 무슨 꼴이 될 것인가 하고 한 발짝 상상을 전개해 보면 말이지.




그러니까 다 큰 사내 두 놈이 이러고 다니겠다... 이 말인가?

....
..












 ...
........ 

보티첼리 미안해요... 이런데다 갖다 붙이라고 그린 그림이 아닐텐데...

그런데 저 말 듣는 순간 딱 생각나는 게 저 포즈라... 내가 ... 많이 힘들... 었... 힘들어써ㅏㅓㅏㅏㅣㅣㅏㅣㅏㅓㅣㅏ미ㅏㅓㅣ ... ㅇ<-< 나만 이런 겁니까? 날아다니는 사람이 누군가를 데리고  다니겠다고 하면 포즈가 저런 거 아니면 저거랑 유사한 뭔가 아니겠냐고 !! 

 응 그래 사실 저거 트레이싱 따서 그려보려다가 내 소날이 오거ㅏㅣ미ㅓ나ㅣㅏ 손발이 오금느 오글라들고 ㅓㅏㅣㅣㅏㅁ ㅣㅏ 못해먹겠어서 원 그림 잘라온 거 맞아요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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