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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03 언제나 배고픈 사람을 위한 군것질 <7맛 7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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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4 여적여의 조건 _ 남성에 의해 양분되는 여성 1
- 2016.03.19 허균 <노객부원> 1
- 2016.03.01 로즈 잭슨 _환상성
- 2016.02.29 자료
- 2015.03.20 역사소설 쓰기 _ 메모
- 2013.07.17 이야기의 기원
- 2013.06.17 문학과 환상-토도로프 하태환 譯
글
언제나 배고픈 사람을 위한 군것질 <7맛 7작>
황금가지 테이스터 문학상 <7맛 7작>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3733670
인간은 왜 항상 허기질까?
태어난 후 매일 매일 느껴왔으니 이제는 그만 익숙해져야 마땅한 감각이다. 그럼에도 매 세 끼 느껴지는 허기는 늘 짜릿하고 늘 새로워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다. 배고픔에 지치다보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왜 ‘이렇게까지’ 배가 고픈 건지. 왜 계속 음식을 찾아 헤매게 되는지.
<7맛 7작>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도 한참 배가 고팠다. 아침 점심 모두 거르고 일하는 오후, 퇴근까지는 아직 시계 반 바퀴가 남은 때. 배고파 소리를 사려물며 트위터를 열었는데 <7맛 7작> 발매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음식을 소재로 가지각색 단편 모음. 푸드 프린터 미역국 이야기가 눈을 사로잡았다. 냉면, 스파게티. 카레. 배고플 때 음식 소설집이라니 이건 운명인가요. 돌이켜보면 언제나 배가 고프니까 언제든 이 책을 보게 되었겠구나 싶다.
작품집에는 제목처럼 일곱 가지 음식, 일곱 가지 소설이 담겨 있다. 다루어지는 음식은 미역국, 스파게티, 라면, 냉면, 카레와 (인도) 커리 등 대개 내게 매우 친숙한 메뉴였다. 그 흔한 음식에 작가만의 특별한 비법이 첨가되어 엉뚱기발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입이 출출할 때마다 뜯어먹는 간식처럼 그렇게 한 작품 한 작품씩 꺼내 읽었다. 이야기를 삼키고, 문장을 마시고, 단어를 오독오독 씹었다. 독서가 참 즐거운 식사 시간이 되었다.
1. 일상을 비추는 음식
첫 작품 「해피버스데이, 3D 미역국」은 독자를 훅 이입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연령대와 감성이 나와 얼추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마 30대의 매 마감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종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각박하다 못해 얄팍한 생활, 복사용지처럼 뽑혀 그때 그때 소모되는 나. 그런 내 단짝 푸드 프린터.
자판기와 3D 프린터를 합쳐놓은 듯한 이 기계덕분에 이야기는 독자의 일상에서 한 단 올라간다. 집집마다 들여놓은 푸드 프린터로 인간은 더욱 단절되지만, 오히려 그 푸드 프린터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푸드 프린터로 구현 불가능한 ‘엄마의 손맛 미역국’을 먹어야 할 대 위기에 놓이고 마는데!
기술 문명으로 인한 단절 / 기술 문명으로도 놓칠 수밖에 없었던 인명 / 기술 문명으로 다시 이어진 인연. 소설은 현대 사회의 한계와 가능성을 함께 다루며 거기에 따스한 인간애를 부여한다. 주인공이 받은 기름지고 쫀득한 미역국처럼 따뜻한 결말이다.
매일 먹어야 하기에 시대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는 밥상으로 오밀조밀 맛있는 소설 한 편을 만들었다. 좋은 소재를 다룬 좋은 이야기였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이 작품을 도드라지게 하는 소재인 푸드 프린터 활용이 애매했다는 것이다. 푸드 프린터는 주인공을 돋보여주는 도구지만 메인 서사는 아날로그 미역국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보니 중요한 순간에는 존재감이 사라진다. 소설 초반에 눈맛을 끄는 소재이니만큼 마지막까지 맛이 났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2. 누군가를 떠올리는 촉매제
「해피버스데이, 3D 미역국」에서 주목했던 또다른 꼭지는 음식이 ‘잃어버린 사람’을 회상하게 만드는 키워드로 기능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세 번째 작품 「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과 마지막 작품 「커리 우먼」 에서도 쓰이는 장치다.
「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은 정체불명의 스파게티교 신봉자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를 찾는 남편의 이야기를, 그 수색 의뢰를 받은 탐정의 시점에서 쓴 산뜻 발랄한 이야기다.
평소 먹지 않기 때문에 분위기 낼 때 가기 좋은 스파게티. 알고보면 자취생이 휘적휘적 해먹기 편한, 이색적이면서도 만만한 메뉴 선정과 문체가 잘 맞아 떨어졌다. 세상 무슨 일에도 심드렁해서 계약결혼도 덥석 해버린 남자가 아내를, 아내의 독특함을, 그 내면의 사정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귀엽게 그렸다. 이 작품에서 파스타는 아내에 대한 유일한 단서이자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다.
「커리 우먼」은 주인공의 단골 중고 서점이 난데없이 커리집으로 변모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다. 주인공에게 카레는 미성년자인 자신을 두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어머니의 음식이다. 주인공은 이 신기한 커리집에서 냄비 가득 카레를 끓여놓고 사라져버리는 여자들이 자신의 어머니 외에도 여럿 있으며 그들을 ‘커리 우먼’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은 처음 읽었을 때 이해가 썩 잘되지 않았다. 작품은 카레가 가진 두 가지 위상을 소재로 했고, 매일 매일 관리해야 하는 가정 식단을 간단히 때우게 해주는 집밥 카레 / 이색적인 향과 재료, 먹는 방법으로 이국적 분위기를 듬뿍 느낄 수 있는 인도 커리를 여성의 처지와 접목시켰다.
혼자 아이를 기르며 일하는 미혼모든, 잘 나가는 자본가의 트로피 와이프든. 여성은 모두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의무에 강제로 붙들려 있다. 퇴근도 은퇴도 없이 매일 아침 점심 저녁 밥상을 해결해야 하고 결국 이 의무를 쉽게 이행할 수 있게 해주는 메뉴가 카레다. 그렇게 카레 끓이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그녀가 그 자리를 떠나게 되면? 남는 건 한 냄비의 카레 뿐이다.
작품에서는 ‘커리 우먼’은 카레를 남겨놓고 문득 떠난다고 표현했지만 나는 이를 카레를 끓이다 사라졌다고 받아들였다. 카레에서 커리로. 의무에서 일탈로.
「해피버스데이, 3D 미역국」과 「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 「커리 우먼」의 문체는 제각각이다. 세 작품에서 회상되는 인물의 처지도, 주인공의 목적도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음식을 통해 그들을 회상하는 것만은 같다. 음식이 누군가의 산 증거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문득 내가 먹는 음식 메뉴를, 내 주변 사람들을 돌이켜 보았다. 내 지인들은 나를 무슨 음식으로 기억할까? 매일 마시는 제로 콜라, 친구들과 둘러앉아 철없이 혼자 두 쪽 다 먹었던 치킨 다리, 체하면서도 자꾸 먹었던 쫄면. 지금 내가 떠올리면 죄 한심한 모습 뿐이다. 글쎄. 한심한 건 괜찮은데. 누군가 나를 음식으로 떠올린다면 웃어 줬으면 좋겠다.
3. 벗어날 수 없는 굴레
한편 다섯 번째 작품 「하던 가닥」은 위 세 작품과는 반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위 세 작품이 음식으로 떠나보낸 사람을 회상한다면 이 작품은 국수 가닥의 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의 귀향을 다루기 때문이다.
낡고 오래된 국숫집, 집에 돌아갈 때마다 엄마가 목이 메이도록 들이미는 음식, 스릴러 액션이 섞여 있는 이 작품은 독자의 입에 침보다는 구토감이 치밀도록 한다. 밀가루 음식을, 정말, 끝도 없이 먹이거든. 그 모든 음식을 익히고 지지고 삶는 과정과 입에 넣는 모습을 읽다보면 내가 다 후각을 잃는 것 같다. 온갖 음식 가판대가 다 있는 푸드 코트 한 가운데에 놓인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운명 앞에 다시 선 주인공을 볼 때는 차라리 홀가분한 심정이다.
4. 추리의 단서
음식이 누군가가 남기는 흔적이라면 누군가를 추적할 단서도 될 터다. 「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은 화자가 사설 탐정이다보니 간략하게나마 탐색의 과정을 끼얹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탐정이라는 직업이나 추리 과정은 입맛을 돋워주기 위해 조금 얹는 허브 정도의 역할이다.
음식으로 상대를 추적하는 장치는 여섯 번째 작품 「군대 귀신과 라면 제삿밥」에도 나온다. 제목 그대로 군대에서 귀신에게 라면 제삿밥을 바치게 된 주인공이 라면의 연도로 귀신의 사망연대를 짐작한다. 물론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입대부터 제대까지 귀신, 라면과 함께한 주인공의 경험담이므로 이 추적 과정도 그리 상세하지 않다.
라면 맛을 귀신이 구분해 내어 알아볼까 싶기도 하거니와, 60년대, 80년대에 나온 라면과 같은 상표라고 해도 2010년대 만들어진 라면은 맛이 다를 거라는 점 등등 덜컥거리는 부분들이 있지만……. 애초에 귀신이 왜 그렇게 라면에 환장하는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지만. 역시 넘어가자. 중요한 건 지옥 같은 군대를 주인공이 무사 제대했다는 거니까. 수십년 묵은 귀신까지도 제대 시켜준 라면 성인이여.
(그런데 타이밍 딱 맞춰 군 부대 앞까지 찾아오는 증손녀가 있다니 이 귀신 너무 영험한 거 아니냐)
음식과 추리를 본격적으로 다룬 건 작품집 네 번째 작 「류엽 면옥」이다. 이 작품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마치 1920년대에 정말 냉면집 배달부 생활을 해본 것처럼 사건 정황과 주인공의 직업, 소재가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20년대 경성일보에 실린 기사 한 꼭다리를 가져왔다고 해도 그럴 법 하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과 달리 음식의 조리, 음미 과정에 집착적인 묘사를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당시 냉면가게 안팎의 풍경을 주목한다. 가게 안에서는 냉면 한 그릇을 내오기까지 반죽을 치고 육수를 내는 이들이 있고 가게 밖으로는 배달부 중머리들과 은밀히 정보를 주고 받는 독립군, 그들을 쫓는 경감이 있다.
단편이다보니 인물들의 사연을 대사 몇 마디로 처리하고 주인공의 마지막 결단도 너무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쾌속 전개가 냉면처럼 시원했다. 하필 요즘 겨울이라, 괜히 나까지 20년대 겨울 별미였다는 냉면이 땡겨서 아주 혼났다.
(난 원래 비빔 냉면 파인데 소설을 읽을 때는 동치미 냉면이 너무 땡기더라. 주변에 파는 곳도 없는데! 이럴 때야말로 푸드 프린터 필요한 것 아닌가요!!)
5. 조리까지의 기나긴 여정
한편 재료를 내오고, 손질하고, 조리하는 과정이 중심 장면을 이룬 작품도 있었다. 두 번째 작품 「비님이여 오시어」와 다섯 번째 작품 「하던 가닥」이다.
「비님이여 오시어」는 작품집 중 유일한 판타지 역사물이다. 이 소설의 배경 모델은 세종 시대 극심한 가뭄기. 왕은 청룡을 잡아 비를 빌고자 하고 주인공 숙수가 청룡을 찾아 가는 여정이 아주 길게 다루어진다.
기아와 전염병 유행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여정은 곧 한 끼 한 끼를 이어가는 과제가 된다. 토끼부터 사람까지, 이 작품에 나오는 모든 생물들이 서로를 사냥하고 먹기 위해 목숨을 건다. 마침내 용을 사냥하고, 조리하고, 임금의 앞에 대령하기까지의 과정이 모두 위기다.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는 광기가 되고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예스러운 분위기를 잘 유지하고 옛 음식도 많이 등장하여 신선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도 큰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리는 조선 왕과 숙수의 역할은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닥친 상황에서, 가뭄 해결을 위해 용을 잡는데 달랑 둘만 보낸다는 점도 의아했다. 하지만 이는 판타지 퓨전이라는 장르를 보아 넘어갈 수 있는 문제다.
내가 가장 아쉬운 부분은 주인공 숙수를 보좌하기 위해 보내진 인물, 모량이다. 모량은 동물과 소통하는 이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실상 작품 내에서 역할이 없다. 모량의 액션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 액션이 주인공에게 아무 울림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이 모량 때문에 어떤 생각의 변화를 일으켰나? 그런 적이 없다. 반면 모량은 별 설득 과정이 없어도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캐릭터가 휙휙 바뀐다.
갈등은 일단 두 캐릭터가 각자의 입장을 고수할 때 일어난다. 이 작품에서 모량의 입장이 쉬이 바뀌면서 갈등도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더 첨예한 갈등이 일어났다면 주제도 더 심화되었을 텐데.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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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맛 7작>은 간만에 든 단편집이었다. 책 날개와 중간중간의 작가 소개란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장 많이 느낀 건 결국 동질감이다. 나도 월급날 퇴근길에 있는 파스타 집에 들어가서 한 달 잘 버틴 걸 자축하곤 하는데. 여기 나랑 비슷한 사람이 있구나. 그리 생각하며 오늘도 배를 두들긴다. 이 글 쓰다보니 어느새 점심 때가 지났다.
춥고 북적북적한 도시에서 매일 삼시세끼를 해결하고 있을 우리, 작가와 독자 모두를 응원하고 싶다. 의미 있는 테마 공모전이었고, 이런 재미있는 공모전이 앞으로도 계속 되길!
글
여적여의 조건 _ 남성에 의해 양분되는 여성
웹툰 몇 작품 돌아보다 새삼 느낀 클리셰가 걸려서 몇 자 끄적끄적.
네이버 웹툰 <유미의 세포들>에 등장하는 서새이
유미의 애인, 구웅의 여사친 겸 직장동료다.
친구 사이임을 빌미로 구웅에게 집적거리며 유미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구웅의 옆집으로 이사하는 등 상당히 적극적으로 유미와 구웅 사이를 방해함.
해당 웹툰 댓글란에서는 주로 새이년이라고 불린다.
같은 웹툰에 등장하는 루비
유미의 직장 후배. 유미가 호감을 품었던 직장 동료 우기를 좋아한다.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짜증날만큼 무리한 애교를 구사한다.
우기에게서 유미를 떼어내기 위해 태연하게 얄미운 말만 골라하여 초반부 얄미움을 하드캐리.
역시 당시에는 댓글란에서 루비년으로 불렸다.
최근 우연히 만난 서새이도 우기를 좋아한다고 착각,
유미에게 끌었던 어그로를 새이에게 시전하자 댓글란 평가가 역전했다.
다음 웹툰 <살아 말아>에 등장하는 정혜 (가명: 소유)
소원 동전의 힘으로 청소년이 된 노부부, 육갑/청순과 악연으로 얽힌 인물.
첩 소생으로 육갑의 결혼 전 연인이었다.
육갑이 청순과 갑작스럽게 결혼하자 떳떳하게 살 수 없는 자신의 출신을 비관하고 사라진다.
현재 역시 소원동전의 힘으로 어려져 새 신분을 만들고 모델로 활동 중.
육갑/청순에 대해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
위 세 캐릭터는 네이버, 다음에서 연재 중인 웹툰 두 편에 나오는 여성 조연 들이다. 이들을 뭐라고 해야 할까. 막장드라마에서 온갖 범죄를 불사하는 악녀들에 비하면 소소한 수준들이니 악녀라고까지는 못하겠고... 여주인공의 적인 여성 조연이니 줄여서 여적여라고 해둘까?
이들 세 여적여들은 스타일도, 행동 방식도, 동기도 상당히 유사하다. 그렇다고 이들이 몰개성한 캐릭터라는 건 아니다. 작품에서 충분히 개성을 묘사해주기 때문에 오히려 공통점도 두드러진달까.
새이의 본심 _ 웅이에게 보이는 모습
<살아말아>의 정혜는 '평범한 여자아이'에게는 숭배의 대상이다. 남들 앞에서의 이미지 관리
청순 앞에서 드러내는 본심
여적여들을 묘사할 때 강조되는 이중성
관리 꽤 힘들 긴 머리카락, 청순하냐 귀엽냐 세련되었느냐 차이는 있으나 어쨌든 여주인공에 비해 강조되는 '여성미'. 교묘한 화술과 이중적 태도, 여주인공에게서 남자를 '빼앗거나' 내가 가지지 못한다면 '망가뜨리겠다는' 목표의식... 이들 여적여에 비해 순수하고 담백한 여주인공은 항상 이들에게 당해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녀의 순수함과 진실성이 결국은 승리한다. 여적여는 결국 여적여일뿐 남주인공을 차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실 이런 설정은 굳이 이 웹툰들을 끌어오지 않아도 충분히 익숙하고 지루한 클리셰다. 우리는 이미 아침 저녁 드라마에서, 소설에서, 영화에서, 만화에서 이런 여적여들을 무수히 많이 만났다. 여적여는 여성, 특히 여성의 연애를 다루는 작품이라면 쉽게 등장한다. 이들의 비행은 관객을 빠르게 몰입시키고 마침내 몰락하면서 작품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준다. 이들이 실패하면서 자연히 작품의 권선징악도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언급한 두 작품 모두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았고, 특히 <살아말아>의 경우 아직 정혜의 계획이 다 드러나지 않았기에 이후 진행에 대해 단언할 수 없다.)
확실히 이 여적여들은 얄밉다. 이들이 얼른, 콱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들이 정말 나쁜 년일까? 이들의 공통 특성을 곱씹다보니 좀 우스운 것이다. 여성미 넘치는 외모에 적절히 구사하는 애교, 상대를 거스르지 않는 '현명한' 화술. 이거 다 흔히 가부장제에서 강요하는 '여성의 미덕' 아냐? 얘네는 그런 미덕 기준으로 볼 때 오히려 아주 훌륭한 여성 아니냐고. 어딜 가나 남자들의 기준에 부합하는 완벽한 여성.
왜 클리셰는 이 훌륭한 여성들을 여자의 적으로 설정하는 것일까? 왜 클리셰는 이 여성들의 미덕이 가식이며 기만이라면서 끊임없이 순수한 주인공을 통해 이들을 단죄하는 것일까?
이 '여적여' 혐오가 정말 여성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저런 여성이 실제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저런 여성이 정말 '순수한 여주인공 = 나'에게 해를 끼치는가? 우리는 정말 저런 여성을 싫어하는가?
언제까지 여적여 공식으로 여성 서사를 만들어야 하는가?
이들 여적여들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 세계관에 들어맞는 캐릭터인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이들이 저런 여우짓을 하는 이유, 이들의 성격이 비비 꼬인 이유가 뭘까? 가난해서? 재능이 부족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친구에게 배신 당해서?
아니다. 작중 묘사상 이들의 성격이 꼬인 건 '남자와의 사랑에 실패' 했기 때문이다.
<유미의 세포들> 22화
과거 순수했던 루비는 애인에게 버림 받으면서 '여배우 세포'를 만들고 빙그레썅년으로 거듭난다.
서새이의 심리 상태에 대한 묘사는 더욱 난감하다.
<유미의 세포들> 76화
분명 서새이의 사랑세포는 일을 사랑한다. 그런데도 그녀가 미련은 남았을 망정 오랜 친구 사이인 구웅의 연애를 방해하는 이유는 단 하나, 원하는 건 모두 갖겠다는 감성 세포의 폭주 때문이다.
감성세포가 왜 저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도 없다. 구웅에게 내심 기대며 제 것이라 여기고있었는데 구웅이 애인을 사귀게 되니 외로움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는 것 정도? 다른 인물의 감정 세포가 모두 저렇지는 않다는 것도 포인트. 작중 설정 감성세포는 다 저런 성격이라는 설명도 불가능 하다.
<살아말아> 18화
<살아말아>의 정혜는 <유미의 세포들>의 여적여들보다는 훨씬 복잡한 존재다. 그녀는 남자의 노리개가 되어 창창하던 인생을 망치고 하나 있는 딸에게 푸념을 퍼붇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리고 그런 자신 안에 어머니의 삶의 방식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다. 정혜가 저항해도 세상은 정혜 어머니가 사는 방식 이외는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절망이 정혜를 누르고 있다.
또한 정혜는 육갑과 맺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육갑이 할아버지(가부장)의 갑작스러운 명령' 때문이며 '첩의 딸인 자신은 절대로 손자 며느리 감이 못 된다는 걸' 매우 뚜렷이 인식하고 있다. 정혜의 비뚤어짐은 갑작스러운 실연과 절망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아무리 순수한 마음을 품고 있어도 그녀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 청순이 가부장제의 며느리로 60년간 희생 당했다면 정혜는 그 며느리조차 되지 못하는 여자로 배척당해왔다.
정혜는 입장 자각과 객관화 면에서 여주인공 청순보다 훨씬 뛰어난 캐릭터다. 개인적으로 로맨스 코미디라는 장르 한계에서 정혜의 자각과 복수를 얼만큼 표현해줄지 기대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들 여적여들이 비뚤어지는 결정적 이유가 남성들 (가부장제, 이성애 연애관 상)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격 변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남자라니. 로맨스 장르라는 점을 감안해도 다분히 남성 중심적 설명방식 아닌가? 여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중심에는 남성이 있다.
얼마 전 지인에게 순정 만화의 핵심은 이성애 로맨스가 아니라 여성 성장 서사가 아닐까 이야기 했다. 로맨스는 다양한 여성 성장 서사의 한 방식일 뿐인데, 다만 여성에게 허락된 서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로맨스가 메인인 걸로 보이는 것 뿐인 것 같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여성에게 로맨스가 허락되는 건 여성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키는 남주인공이 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성의 이야기임에도 이미 가부장 남성 세계의 법칙을 받아들이기에 여주인공의 적에게도 그대로 남성의 시각이 투영되는 게 아닐까. 1.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여자들이 질투할 것이라는 전제. 2. 남성에게 거짓을 꾸미거나 남성을 위협하는 여성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남성을 사랑하는 여성이 선택받을 거라는 약속.
이런 법칙을 받아들이고 서사를 만든다면 확실히 여적여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다. 여성은 끊임없이 '아름다운 여자'가 되기를 강요 당하면서 동시에 그런 여자를 경계 하도록 가르침 받는다. 지금도 여적여 클리셰는 수없이 재생산되고 변주된다. 사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풀려면 웹툰을 가져올 게 아니라 드라마 세계로 들어가는 게 훨씬 나을 거다. 지상파 3사 아침드라마 비교라거나... 아마 관련해서 이미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고...
어쨌든 이미 있는 클리셰를 쓸 거라면 좀 더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클리셰를 이용하기를 바란다. 다양한 여적여가 아니라, 여적여를 쓰는 이유가 다양해지기를 바란다. 클리셰를 이용해 클리셰를 만든 법칙을 공격하는 이야기가 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는 여성 서사에서 여적여보다 훨씬 재미있고, 다양하고, 효과적인 도구가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여성 캐릭터를 여주인공과 악녀로 양분하는 낙인이 사라진다면, 한 여자를 여자와 _ 그 여자의 적으로 나누는 짓을 멈춘다면. 온전히 한 몸으로 표현되는 여성 개개인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진행될지 나는 너무 기대되는데.
글
허균 <노객부원>
노객부원(老客婦怨)-허균(許筠)
늙은 떠돌이 아낙의 원망-허균(許筠)
東州城西寒日曛(동주성서한일훈) : 동주 성 서쪽, 싸늘한 해도 저무는데
寶蓋山高帶夕雲(보개산고대석운) : 우뚝한 보개산에 저녁 구름 걸려있구나
皤然老嫗衣藍縷(파연로구의남루) : 흰 머리의 늙은 할미가 다 떨어진 옷을 입고서
迎客出屋開柴戶(영객출옥개시호) : 사립문 열고 나와 나그네를 맞아주네.
自言京城老客婦(자언경성로객부) : 스스로 말하길, 서울에서 여지껏 살다가
流離破産依客土(류리파산의객토) : 가족들 다 흩어지고 타향땅에 묻혀 산다오.
頃者倭奴陷洛陽(경자왜노함락양) : 지난번 왜놈들이 한양성을 무너뜨릴 때
提携一子隨姑郞(제휴일자수고랑) : 외아들 손에 잡고 시어머니와 남편 따라
重跡百舍竄窮谷(중적백사찬궁곡) : 먼 길 오며 부르튼 발로 깊은 골짜기에 숨어
夜出求食晝潛伏(야출구식주잠복) : 밤에 나와 밥을 빌고 낮에는 엎드려 있었소.
姑老得病郞負行(고로득병랑부행) : 시모 늙어 병을 얻어 낭군이 업어서 걷고
蹠穿崢山不遑息(척천쟁산불황식) : 험한 산에 접어들면 쉴 겨를이 없었지요
是時天雨夜深黑(시시천우야심흑) : 하늘에선 비까지 내리고 밤은 더욱 캄캄하니
坑滑足酸顚不測(갱활족산전불측) : 웅덩이는 미끄럽고 다리지쳐 발 옮길 곳도 없었소.
揮刀二賊從何來(휘도이적종하래) : 칼 휘두르는 두 왜적은 어디서 왔는지
闖暗躡蹤如相猜(틈암섭종여상시) : 어둠 속에 머리 내밀며 서로 다투어 뒤를 밟아
怒刃劈脰脰四裂(노인벽두두사렬) : 성난 칼날 목을 갈라서 네 조각을 내버리니
子母倂命流冤血(자모병명류원혈) : 어미와 아들 함께 죽어 원통한 피를 흘렸다오.
我挈幼兒伏林藪(아설유아복림수) : 나는 어린 아들을 이끌고서 숲속에 숨었는데
兒啼賊覺驅將去(아제적각구장거) : 아이 울음에 들켜 잡혀가고 말았으니
只餘一身脫虎口(지여일신탈호구) : 내 한 몸 겨우 남아 호랑이 아가리 벗어났지만
蒼黃不敢高聲語(창황불감고성어) : 허둥지둥 경황없어 소리 높여 말도 할 수 없었소.
明朝來視二骸遺(명조래시이해유) : 날이 밝아서야 가보니 두 시체 남아 있는데
不辨姑屍與郞屍(불변고시여랑시) : 시모의 시신인지 남편의 시신인지 가려낼 수 없었다오
烏鳶啄腸狗嚙骼(오연탁장구교격) : 까마귀와 솔개가 창자 쪼고, 개들이 뼈를 씹는데
虆梩欲掩憑伊誰(라리욕엄빙이수) : 들것과 가래로 덮으려고 했지만 부탁할 사람 누가 있을까
辛勤掘得三尺窞(신근굴득삼척담) : 애 써서 간신히 석 자 깊이 구덩이를 파고
手拾殘骨閉幽坎(수습잔골폐유감) : 남은 뼈 손수 거두어 봉토하고 나니
煢煢隻影終何歸(경경척영종하귀) : 의지 할 곳 없는 외그림자 끝내는 어디로 돌아갈까
隣婦哀憐許相依(린부애련허상의) : 이웃 아낙 가여워하여 서로 의지하자 하더군요
遂從店裏躬井臼(수종점리궁정구) : 주막에 얹혀 살며 물 긷기와 절구질
餽以殘飯衣弊衣(궤이잔반의폐의) : 남은 밥찌질 먹고 다 떨어진 옷 입었다오.
勞筋煎慮十二年(로근전려십이년) : 고단한 생활로 속태우기 십이년
面黧髮禿腰脚頑(면려발독요각완) : 얼굴은 검어지고, 머리는 듬성, 허리도 다리도 뻐근한데
近者京城消息傳(근자경성소식전) : 근자에 서울 소식 드문드문 들으니
孤兒賊中幸生還(고아적중행생환) : 부모 잃었던 아들놈이 적중에서 요행히 살아왔다더군요.
投入宮家作蒼頭(투입궁가작창두) : 대궐에 투숙하여 창두가 되었다 하오.
餘帛在笥囷倉稠(여백재사균창조) : 옷장에는 비단이 남아돌고 창고에는 곡식 가득하니
娶婦作舍生計足(취부작사생계족) : 장가들고 집 마련하여 생계가 풍족하다 하나
不念阿孃客他州(불념아양객타주) : 타향에서 떠돌이하는 제 어미쯤은 잊은 게지요.
生兒成長不得力(생아성장불득력) : 아들을 낳아 성장했으나 그 덕을 보지는 못하오.
念之中宵涕橫臆(념지중소체횡억) : 한밤중에도 생각할수록 뺨에 눈물이 흘러내린다오.
我形已瘁兒已壯(아형이췌아이장) : 내 꼴은 벌써 시들었고 아들은 이미 장년이 되었으니
縱使相逢詎相識(종사상봉거상식) : 비록 만나더라도 알아볼 리 있을까.
老身溝壑不足言(로신구학불족언) : 늙은 내 몸 구렁에 버려지는 건 더 말할 나위 없거니
安得汝酒澆父墳(안득여주요부분) : 어찌하면 네 술이라도 얻어 아비 묘에 부어볼 수 있을까.
嗚呼何代無亂離(오호하대무란리) : 아 슬프구나, 어느 시대인들 난리야 없었으랴만,
未若妾身之抱冤(미약첩신지포원) : 이 못난 여편네처럼 원통하기는 처음일레라.
글
로즈 잭슨 _환상성
사회적 구조와 '규범들'이 우리 내부에서 재생산되고 유지되는 것은 무의식 속에서이며, 따라서 무의식의 영역으로 다시 관심을 돌림으로써만 우리는 사회와 개인 사이의 관계들이 결정되는 방식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줄리엣 미첼은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가 사고idea를 통해 인간 사회의 필수적 법칙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식은 의식적인 것이기보다는 무의식적인 것이다 - 정신분석학의 특별한 임무는 우리가 무의식적 정신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사고의 유산과 인간 사회의 법칙들을 획득하는지를 해독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 무의식적 정신이란 우리가 그러한 법칙들을 획득하게 되는 방식이다. (Juliet Michell, Psyboanalysis and Feminism)- 15p
무의식적 충동을 표현하는 문학적 환상물들은 특히 정신분석학적 독법에 개방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ㅇ느 빈번히 '인간사회의 법칙들'과 그러한 법칙들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 사이의 긴장을 도해 형식으로 보여준다. - 16p
하나의 양식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할 수 있는 바는, 이러한 문학 담론의 특별한 유형이 주어진 시대의 관습에 매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어진 언어 구조물의 유형에도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오히려간헐적으로나마 다시 부활하고 갱신될 수 있는 형식적 기능성으로서, 마치 그 자신을 제공하기라도 하듯, 역사의 전 시대를 가로지르는 표현의 한 양식, 유혹의 한 양식으로 지속된다는 것이다. - Fredric Jameson Magical narrative : romance and game - 16
환상은 많은 관련 장르들을 출현시키는 하나의 문학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환상은 다양한 조합으로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허구물을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의 범위를 제공하다.
언어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환상의 기본 모델은 언어능력 language 또는 랑그 langue로 볼 수 있는데, 이것으로부터 다양한 형식들 또는 파롤parole이 파생된다. 이러한 양식으로부터 로망스 문학(요정담과 과학소설) 또는 경이문학the marvellous과 환상 문학(포, 아이작 디네센, 모파상, 고티에, 카프카, 러브크래프트), 그리고 비정상적인 심리 상태. 망상. 환각 등을 다루는 관련 이야기들이 파생. 발전한다. - 17
세속화된 문화 속에서 타자성에 대한 욕망ㅇ느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대안적 공간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욕망은 이 세계를 친숙하고 편한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면서 이 세계에 부재하는 영역을 지향하게 된다. 그것은 대안적 질서 대신 '변형' 즉 재편성되고 탈위치화된 세계를 창조한다. 이러한 ㅂ녀형과 해체의 과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유용한 용어가 바로 점근축paraxis이다.
이것은 par-axis. 즉 중심축의 양쪽에 위치하며 본체 곁에 위치하는 축을 의미한다. 점근축은 환상적인 것의 장소 또는 공간과 관련된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환상에 의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위협당하는 '실제' 의 본체와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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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1
문학에서 환상성의 주제는 보이지 않는 것 un-seen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문제, 즉 말해질 수 없는 것 un-said을 표현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삼는다. 환상은 불연속적이지만 연결된 단위들로 구성도니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정상적인 혹은 '상식적인' 관점을 위반하면서 각가의 것들을 분리시키는 구별이 부재하는 상황을 설정하거나 그 부재를 폭로한다. 환상은 한계들, 한계짓는 범주들과 그것들이 투영된 분해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그것은 '리얼리티'를 하나의 일고나도니 단일 관점의 실체로 보는 지배적 철학적 전제, 바흐친이 '단상적'이라고 명명한 편협한 시각을 전복시킨다. 환상성의 주제적 요소들이 동일한 원천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은 실재적인 것을 연대기적 시간구조와 삼차원의 공간조직을 통해 명명하고 위치지음으로써 분리시키는 범주들을 ㅂ누해하는 것이며 숨겨지고 암흑 속으로 / 암흑으로 내던져진 공간을 전경화하는 것이다.
토도로프가 환상의 핵심 자질로 규정한 머뭇거림을 서사적 구조의 층위에 기입하는 것은 환상의 중심적인 주제적 이슈, 예컨대 '실재적인 것'의 본질에 관한 불확실성, '사실주의'와 ;진실' 범주의 문제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라고 선언하는 문화에서) '보이는 것'과 '아는 것'을 문제삼는 것 등과 같은 주제적 이슈의 치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 69
토도로프가
글
글
역사소설 쓰기 _ 메모
린다 허천 _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과 전략
123
과거란 우리가 과연 그것을 알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역사기록 메타픽션은 이러한 사실주의적 철학을 일단 수용한 다음, 과거가 아무리 독립성을 지닌 것이라해도 결국 현재의 표면과 내부에 '우리를 위해' '지금' 남겨진 흔적들로만 존재한다는 반사실주의적 견해를 그것과 대면하게 만든다. 부재하는 과거는 단지 정황증거들을 통해 추론될 수 있을 뿐이다.
글
이야기의 기원
우리는 예술을논하기전에 예술이 생겨난 과정부터 살펴봐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마치 기성품 치즈케이크를 구입하듯이 쉽게 블렉벨벳 엘비스 같은 기성품 예술을 향유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대부분 동안, 그리고 대부분의 사회에서 예술은 모든 사람이 천을 짜거나 돌을 깎고, 노래하거나 춤추고, 이야기를 말하고 재현하면서 일군 공동 노력의 결실이었다. 예술에 참여하려는 욕망을 이해하려면 예술을 향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이해해야 한다.
예술은 보통 농밀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예술이 탄생할 무렵에는 예술의 재료가 거의 비축되어 있지 않았다. ... 편안하고 편리한 도시 생활에서도 예술을 창작하려면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한다. ...
예술을 부산물로 보는 가설을 강력히 내세움으로써 핑커는 오히려 예술의 진화적 설명에 크게 기여한다. 그 가설이 실패하면 예쑬은 부산물이 아니라 적응의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술이 아무런 이득도 주지 못한다면, 거저 얻은 쾌락을 전달하는 약물처럼 생물학적 이익을 모방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그런데도 예술을 생산하는 데 많은 시간, 노력, 자원이 들어간다면, 예술적 성향은 약점이 되어 이미 오래전에 치열한 진화적 경쟁 과정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자연선택ㅇ느 이익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드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만약 부산물 가설이 옳다면, 수천 세대에 걸쳐 오히려 예술적 성향이 뒤떨어지는 수많은 개체와 사회가 번영해을 것이다. 예술을 생산하느라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되며, 휴식하고 자원을 보존할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술을 생산하는 데 쓸 시간과 힘으로 새 자원을 생산한다든가,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하는 등 이득을 만들어내는 활동에종사할 수도 있다. 그래서 리처드 도킨스는 이렇게 얘기한다. "자연선택은 예언의 이론이다. 다윈주의자는 자신 있게 예언할 수 있다. 만약 비버에게 둑을 쌓는 일이 쓸모없는 시간 낭비라면 둑을 쌓지 않는 다른 비버가 더 잘 생존할 테고, 둑을 쌓지 말라는 유전적 성향을 후대에 전승할 것이다."
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만약 진정으로 예술이 쓸모없는 것이라면,예술적 성향이 별로 없고 엄격히 실용적이고 경쟁적인 현실주의자들이 생존과 대량 번식에 성공했을 테고, 그 후손들이 오랜 진화를 거치며 예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몰아냈을 것이다. ...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술이 없는 인간 사회는 없으며, 지금까지 성공적인 사회는 예술이 크게 발달한 사회였다.
사회 생활ㅇ느 분명히 이득을 준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강력한 생존도구 라는 말은 옳다. 그러나 사회생활에는 긴장도 따른다. 사회 생활의 극단에 해당하는 도시는 노동과 용역을 집중하는 강력한 이득을 주지만 인구 밀집, 통제, 조정 같은 문제를 해소하느라 많은 비용이 든다. 만약 부산물 가설이 옳다면, 즉 예술의 이득이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사람들은 예술이 주는 즐거움이 없이도 도시에서 잘 살 수 있을 테고 도시 생활의 긴장에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생활은 좀 단조롭지만 편리하면 그뿐이다. ... ...
물론 여기에는 명확한 근거가 있다. 예술이 가능한 이유는 하짐나 이 주장은 인간의 기술 덕분에 진화의 선택 압력을 완화할 만큼 잉여가 쌓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예를 들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에게 예술이 오랜 기간 핵심적이었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귿릉느 모시 거친 환경에서오래 생존해왔을 뿐 아니라, 클리퍼드 포섬 티야팔티야리, 캐슬린 페티야레 드으이 작품에서 보듯 현대의 전문화된 예술 세계에 기여할 기회가 주어지자 지난 수십 년 동안 대단히 탁월하고 인상적인 회화를 선보였다.
만약 예술이 인간 생존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면, 그 방면에서 완전히 쓸모가 없었다면, 그리고 밀러가 말하듯이 그 쓸모없음이 바로 예술이 성적 선택의 결과임을 나타낸다면, 우리는 생식 능력을 가질 때에만 ... 예술에 열중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기가 자장나...를 듣고 즐거워하는 것, 할머니가 아마포, 양모, 솜을 짜면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 누군가 말없이 소성를 읽거나 오래 전에 죽ㅇ느 예술가의 작품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두 가설 다 옳지 않다는 사실은 예술이 모종의 생존 기능에 부합하도록 진화에 이ㅡ해 설게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답을 말하기 전에 먼저 예술을 행동으로 규정하도록 하자. 나는 예술은 일종의 인지 놀이로 여길 수 있따고 본다. 즉 예술은 풍부한 추론과 유형화된 정보를 선호하는 인간의 취향에호소함으로써 인간의 관심을 끌려는 행동 양식을 가리킨다.
이런생각을 바탕으로 나는 예술의 두 가지 주요한 기능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예술은 정신의 적응력을 자극하고 훈련하는 기능을 한다. 신체와 행동에 대한 놀이의 기능은 같다. 예술이 가능하게 해주는 유형의 고도한 집중이 반복적으로 두뇌를 자극하고 활성화시키면 점차 두뇌의 연결이 달라져 인간의 중요한 지각, 인지, 표현 체계, 특히 시각, 청각, 운동, 사회적 인지가 변형된다. 예술의 다른 기능들은 전부 여기에서 파생된다.
둘째, 예술은 창의성을 낳는 사회적.개인적 체계가 된다. 지금 여기에국한되거나 주어진 조건에 예속되지 않은 선택을 낳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기능은 이것에 의존한다.
140~
예술과 놀이의 밀접한 관계, 그 두 가지의 자기보상적 성격을 알려면 그림 그리는 침팬지를 보라. 1950년대에 데스먼드 모리스가 보살피던 침팬지들에게 물감, 붓, 종이를 줬을 때 침팬지들은 아무런 외적 보상을 받지 않았는데도 글미에 빠져들었다. 먹이를 준 침팬지들은 오히려 마지못해 붓을 한 번 놀리고는 사탕이나 받아먹으려 했다. 하지만 동기가 보상으로 중단되지 않는 침팬지들은 그림에 완전히 몰두했다. 그들은 그림에 집중하고 집착했으나 자기 생각에 그림 한 장을 다 그렸다 싶으면 그 그림에 두 번 다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인간 예술은 대개 그 근원이었던 놀이의 상태로 계속 머물거나 다시 놀이와 비슷해진다. 희극은 놀이와 가까워질 뿐 아니라 아예 놀이를 지향하기도 한다. ... 잉그마르 베리만처럼 인간의 조건을 집요하게 파고든 영화 제작자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도 영화 제작을 유년기로 돌아가는 것, 게임, 일종의 놀이라고 말했다.
예술이 흡인력을 가지는 이유는 쾌락을 일깨우기 때문이며, 예술이 쾌락을 일깨우는 이유는 놀이처럼 우리의 신체를 미세조정하기 때문이다. 소규모 사회- 인간의 과거대부분이 해당된다-에서는 모두가 노래와 춤, 직조와 조각, 분장과 의상 등 공동체 예술에 동참한다. 분업이 상당히 진척된 대규모 사회에서 전문 예술가는 고도로 집중된 연ㅅ브과 노력 덕분에 실력이 향상된다. 그런 사회의 경우 유년기가 지남녀 성인은 각종 예술의 생산자보다 소비자가 된다.... 생산자에게나 소비자에게나 예술은 권태를 피하게 해준다. 예술은 호기심을 되살려주는 감ㅈ넝이며, 타성에 젖는 것을 막아준다.
인지놀이로서의 에술이 우리 능력을 높여준 덕분에 우리는 최소한 각각의 예술이 중점을 두는 영역에서 효과적인 견해와 행동을 구성할 수 있다.
예술은 정확히 어디서 출발할까? 우리가 유형화된 인지 놀이를 예술이라고 부르며 즐기는 이유는 유형에 대한 우리의 독특하 기호가 퐁류에게 널리 퍼진 놀이의 충동과 결합을 이루기 때문이다. ... 다른 어느 종보다도 인간은 유년기부터 타인의 관심을 끌고자 하며, 그것을 섬세하게 고려하고, 완전하게 공유하고자 한다. (ex> 흰자위가 보여 시선 방향 뚜렷한 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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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설명하려면 관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술은 관심이 없으면 죽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사람들ㅇ느 진화적 설명의 안과 밖에서 두루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따. 예술은 우리 정신을 변형시킨다. 말하자면 우리의 관심을 자장가에서 가족이 함께 노래 부르기로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그런 관심의 유도가 놀이로 진화했다는 특별한 역할의 측면에서 예술을 바라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관심의공유: 예술과 조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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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 소리와 그림과 이야기를 가지고논다. 서로에게서 효과적으로 배우고 , 예술의 즐겅무을 다른이와 공유하고자 한다. 예술을 직접 실행하든 구경하든 예술에 참여하는 것ㅇ느 놀이처럼 자기보상적인 성격을 가진다 또한 그 목적은 바로 관심을 포착하고 보상하는 데 있으므로 예술은 곧 필수적인 것이 된다. 전문화된 예술과 기계호된 재생산이 없던 시절에 우리는 서로에게 사회적 오락을 제공했다. ...
163 대화를 나눌 때 우리가 남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이유는 반드시 남들이 우리에게 뭔가 보상해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땜누이 아니다. 그보다도 우리는 말을 통해 지위를 추구한다. 즉 우리의 말이 남들에게 어떤 연관성과 가치를 가지느냐에 따라 지위를 얻고자 한다. 대화에서 우리는 그냥 서비스로 정보를 주는 게 아니라 청중이부여하는 지위를 얻기 위해 준다. 말하자면 지위라는화폐로 서로에게 보상해주는 것이다.
...
예술에서는 ... 작품에 특별히 공을 들여 타당성의 기준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인 방식으로 관심을 끌고자한다. 어떤 음악가나 작가도 누가 어디서 자신의 잠재적인 흐토극을 듣거나 블록버스터를 읽을지는 알지 못한다. 다양한 상황에서도 관심을 끄는 특별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예술은 지위라는 화폐를 획득하는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 우리가 인정을 갈망하고, 가능하담녀 존중, 위신, 지위도 얻고자 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가져오는 관ㅅ밍느 지위의 첫 보상과 더불어 훗날이 이익을ㅇ ㅟ한 토대를 제공하기 땜누에 예술가는 넓고 높고 지속적인관ㅅ미에댛나 욕망에 강력하게 이끌릴 수 있다.
.. 예술이 예술가의 고낫미을 끌 수 있다면, 유형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인 욕구도 달느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책략은 금세 다른 사람들에 의해 변형되게 마련이다. 그 이유는 누구나 관ㅅ미이 주는 지위를 추구하며, 모방의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
문학과 환상-토도로프 하태환 譯
중략. 한 두 단어 바꿈. (괄호 안에 나 혼자 중얼거림 있음). 오타 있음.
문학 작품을 익는 독자는 원칙적으로 작품의 주인공과 동화하는데, 환상적인 문학 장르는 이 독자로 하역므 낯선 사건의 성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망설이도록 한다. (중략) 달리 말하면 독자는 이상한 사건이 있다거나 있지 않다고 작정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상 문학은 근본적으로 독자가 사건의 성겨을 정함에 있어 머뭇거리고 <주저> 하게 한다는 사실 위에 기초하는 것이다. 또한 환상 문학은 독서의 유형을 강요한다. 독서 유형을 정하지 않고서 읽게 되면, 독자는 환상적인 것 속에서 동화적 비유나 시적 효과밖에 보지 못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반드시 의무 사항은 아니지만, 환상적인 작품 속에 흔히 나타나는 언어적이고 구문적인, 그리고 의미적인 (또는 테마적인) 특징들이 있다. 이렇게 한 작품에 내재하는 요소들을 분석하고 기술하는 작업은 다른 곳에서 이미 소개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관점을 바꿔 환상 문학을 그 외부로부터, 즉 문학 일반적인 또는 사회 생활적인 시점으로부터 접근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환상문학이란 무엇인가? 가 아니라 왜 환상 문학인가? 이다. 첫번째 질문은 그러한 문학 장르의 구조에 관한 것이고,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두번째 질문은 그 기능들을 겨눈다고 할 것이다.
기능에 관한 질문 역시 제기되자마자 여러 개로 나눠지게 되고, 또 여러 특수한 문제들로 갈라진다 이 질문은 환상적인 것 위에, 다시 말해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반응 위에, 그리고 또 초자연적인 것 그 자체 위에 제기된다. 마지막의 초자연적인 것 위에서도 초자연적인 것의 문학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럼 맨 마지막의 초자연적인 것의 사회적 기능부터 시작하기로 하겠다.
우리는 피터 펜졸트의 지적 속에 이에 대한 대답이 언뜻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작가들에게 초자연적인 것은 자기들이 도저히 사실주의적 용어들을 빌려서 할 수 없을 그런 사물들을 묘사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초자연적 사건들이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에 대해 믿지 않고 의심을 품을 수는 있다. 그렇짐나 이 주장 속에는 분명 일편의 진실이 들어 있다. 즉 환상적인 것은 거기에 호소하지 않는다면 접근할 수 없는 어떤 한계들을 뛰어넘도록 해준다.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잘 생각해 보면 이러한 주장이 일리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근친 상간, 동성애, 집단 섹스, 시간, 지나친 관능성 등과 같은 테마들을 환상 문학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떤 검열에 의해 금지된 테마들의 목록을 읽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실제로 이 테마들 각각은 금지되어 있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금지될 수 있다. 게다가 환상적이라는 색깔이 언제나 작품들로 하여금 엄격한 검열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승려}와 같은 작품은 재판을 찍는 것이 금지되었다.
제도적인 검열의 곁에, 조금 더 교묘하고 일반적인 다른 검열이 있다. 그것은 작가들의 심리 자체 속에서 지배하는 검열이다. 어떤 행위가 사회의 벌을 받는다는 것은 개인 속에서 행사되는 벌을 자극하게 되고, 그가 터부시된 테마들에 접근하는 것을 금한다. 따라서 환상적인 것은 단순한 핑계 이상으로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검열과 싸우는 수단이다. 예를 들어 성적인 폭발을 악마의 농간에 의한 것이라고 해놓으면 모든 종류의 검열을 피하기 쉬울 것이다.
환상적인 것들 중에서 타인과 관계되는 테마들은 직접적으로 터부에 속하고 그럼으로써 검열의 대상이 되는데, <나>와 관계되는 테마들도 마찬가지다. <나>에 관계되는 테마들이 광기로 돌려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신 이상자의 생각은 터부를 위반하는 범죄자들에 못지 않을 만큼 엄한 사회적 단죄를 받는다. 그래서 광인은 범죄자처럼 갇히는 것이다. 광인의 감옥은 요양원이라고 불린다. 사회가 마약 사용을 억제하고, 또한 마약 사용자를 감금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마약은 유죄라고 평가된 사유 방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종류의 테마망들에 가해진 단죄의 방식을 체계화할 수 있고, 또 초자연적 요소들을 도입하는 것은 이러한 단죄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렇나 테마들의 유형은 정신병적인 유형과도 일치한다. 초자연적인 것의 기능은 텍스트들을 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법을 위반하기 위한 것이다
19세기 작가들이 가지고 있던 개인적인 가능성들과 오늘날의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테오필 고티에가 등장 인물의 시간을 우리에게 묘사해 주기 위해 취해야 했던 우회적인 방법, 즉 흡혈귀적인 모호한 유희를 기억한다. 그렇다면 19세기와 20세기의 거리를 가늠해 보기 위해, 같은 변태성을 다루는 조르주 바타이유의 {하늘의 파랑} 발췌를 보자
[이것이 나에게 일어난 독특한 사건입니다. 어느 날 밤 나는 한 나읻느 여자가 금방 숨을 거둔 아파트에 들렸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 촛불 사이의 침대 위에 있었습니다. 두 팔은 몸을 따라 길게 놓여 있었는데 손을 모으지는 않았습니다. 밤에는 방에 아무도 없었지요. 그 순간 나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나는 새벽 세시경에 잠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시체가 있는 방으로 간다는 생각을 했지요. 나는 공포에 질렸스비다. 그렇지만 아무리 떨려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달아나지 않고 시체 앞에 그대로 있었으니까요. 결국에는 내 잠옷을 벗어내렸습니다.]
[당신은 어디까지 갔습니까?]
[나는 꼼짝 않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때문에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일은 거리를 두고서 간단히, 보기만 하면서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예뻤나요?]
[아니오. 완전히 시들어버린 여자였습니다.]]
왜 바타이유는 고티에가 간접적으로만 언급할 수밖에 없던 욕구를 직접적으로 묘사할 배짱을 갖게 되었을까? 다음과 같은 대답을 제시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 책의 발간 사이에 하나의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몰고 온 가장 잘 알려진 결과는 정신분석학의 출현이다. 오늘날에는 정신 분석학이 맨 청므 나왔을 때 부딪쳤던 저항을 잊어가고 있다. 그 저항은 정신 분석학을 믿지 않았던 학자들로부터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도 왔다. 그러니까 인간의 심리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변화를 나타내는 신호가 바로 정신 분석학이다. 바로 그 변화가 어떤 테마들에 대한 접근을 급했던 사회적 검열을 제거해 주었다. 그러한 검열이 존재했던 19세기에는 {하늘의 파랑} 발간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이 책은 그때에는 쓰여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드는 18세기에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18세기에 가능한 것이 19세기에도 꼭 그렇지는 않다. 다른 한편으로, 화자의 어떤 태도를 내포하고 있는 바타이유적 묘사의 메마름과 단순성은 예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신 분석학의 도래가 터부들을 파괴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 터부들은 단지 자리를 이동했을 따름이다.
좀더 멀리 가보자. 정신 분석학은 환상 문학을 대체하였다(그리고 그럼으로써 환상 문학을 무용하게 만들었다) 오늘 날에는 지나친 성적 욕구에 대해 말하기 위해 악마에게 호소할 필요가 없으며, 시체에게 끌리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흡혈귀에게 호소할 필요가 없다. 정신 분석학과 그로부터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영감을 받은 문학은 그런 주제들을 위장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여 다룬다. 환상 문학의 테마들은 하나도 틀리지 않고 지난 50여 년 동안 심리 연구의 테마가 되었다. 우리는 이미 앞의 연구들에서 그에 관한 충분한 예를 들어주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예로써, 이중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프로이트이ㅡ 시대에서부터 고전적인 연구 주제였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오토 랑크의 돈 주앙:이중성에 관한 연구). 악마에 관한 주제도 수많은 연구의 대상이었다. 프로이트 자신도 18세기의 악마적인 신경증의 경우에 대한 연구를 하였고, 샤르코를 따라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이 먼 옛날의 신경증들이 악마적인 의상 아래서 제시되었다고 해서 놀라지 맙시다.>
환상 문학의 테마들과 정신 분석학의 테마들 사이의 접근에 관한 명백한 예가 또 있다. 나는 앞서 <나>에 관한 테마망 속에는 우리가 범결정주의적 행위라고 명명한 것이 있음을 밝혔다. 이것은 우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비록그 관계가 우리를 빠져 나간다 할지라도 사실들 사이에는 언제나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하는, 두루 일반화된 인과론이다. 따라서 정신 분석학은 바로 이 결정주의를 최소한 인간의 심리적 활동 영역 속에 하나도 어김없이 적용하고 인정한다. 프로이트는 {일상 생활의 정신 병리학} 속에서 <심리적 생활 속에서는 자의적인 거싱나 미리 결정되지 않았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고 말한다. 그로부터 범결정주의에 대한 믿음 외 다른 것 아닌, 미신의 영역이 정신 분석학의 주요 관심 사항의 일부가 된다.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학이 이 영역 속에 동비할 수 있는 이동을 지적한다. <재수 없는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중욯나 계획을 포기해 버리던 이 로마인의 행동은 상대적으로 일리가 있다. 즉 그는 자기의 예감에 맞춰 행동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문지방을 잘못 디뎠기 때문에 계획을 포기해 버릴 때, 그는 우리 같은 믿지 않는 자들보다 한 수 위임을 드러내고, 그가 우리보다 더 훌륭한 심리학자임을 보여주었따. 그에게 걸음을 잘못 디뎠다는 것은 이 계획에 대한 회의와 내적인 반댈가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계획을 실행한느 순간에 회의와 내적인 반대의 힘이 그의 의도와 힘을 제거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정신 분석학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독립적인 사실들 사이에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환상적인 동화의 화자와 유사한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를 보면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한 것이 타당함을 알 수 있다. <중세는 아주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심리학적인 관점에서는 거의 정확하다고 할 정도로 이런 모든 좋지 않은 현상들을 악마의 탓으로 돌렸다. 나 역시도 이런 비밀스런 힘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정신 분석학이 바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이상하게 불안한 것이 되었음을 알고서 놀라지 않는다.>
이렇게 초자연적인 것의 사회적 기능을 살펴본 다음, 문학으로 되돌아와서, 이번에는 작품 안에서 초자연적인 것이 하는 기능들을 관찰하기로 하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전에 한 번 한 바 있다.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이용하여 어떤 생각을 더 잘 나타내주고자 하는 여러 비유들은 별도로 치고, 세 가지의 기능을 구별했다.
실용적인 기능: 초자연적인 것은 독자를 감동시키고, 놀라게 하며 또는 단순히 독자들을 긴장 속에 붙들어놓는다.
의미적인 기능: 초자연적인 것은 자기 스스로의 나타남, 즉 자기 자신을 지적한다.
구문적인 기능: 초자연적인 것은 스토리의 전개 속에 들어간다.
이 세번째 기능은 다른 둘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전체 문학 작품과 연결되어 있다. 이제 그것을 명확히 해보겠다.
초자연적인 것을 가꿔내는 작가들과 작품 속에서 특히 행위의 전개에 집착하는, 다시 말해 이야기를 하는데 우선을 두는 작가들 사이에는 묘한 일치가 존재한다. 선녀나 요정이 나오는 동화는 일차적인, 그리고 또 가장 안정된 스토리 형태를 준다. 따라서 이런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발견한다. [오디세이아], [데카메론], [돈키호테]는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가 경이로운 요소들을 포함한다. 이것들은 동시에 과거의 가장 위댛나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서도 맟나가지다. 발자크, 메리메, 위고, 플로벨, 모파상은 환상적인 단편들을 썼던 이야기꾼들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서로 내포 관계가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스토리를 이어가는 데 초자연적인 것에 호소하지 않는 역사물 작가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둘의 일치 관계는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흔하게 일어난다. 러브크레프트는 일찍이 이런 사실을 지적했다. <환상적인 것을 쓴 대부분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포는 인물들을 그리는 것에서보다는 사건 속에서, 훨씬 폭넓은 차원의 서술적 효과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이런 일치를 설명하려면, 잠깐이라도 틈을 타서 스토리의 성격 자체에 대한 질문부터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현대 텍스트에서 보통 발견되는 스토리가 아니라 최소 단위의 스토리 이미지, 즉 그것 없이는 어디에 스토리가 있다고 말할 수 없는 핵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이미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모든 스토리는 유사한, 그렇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두 균형 사이의 움직여 감(나 이해:이동)이다.> 스토리의 처음에는 언제나 안정된 상황이 있고 인물들은 어떤 전체적인 모습을 형성하는데, 그 못브은 유동적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일정 수의 근본적인 특징들을 다치지 않고 보존된다. 예를 들어 한 어린아이가 가족의 품에서 살고 있다고 하자. 그는 자체의 율을 지난 한 작은 사회 속에 참여해 있다. 이어서 이 적막을 깨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것은 어떤 불균형을 도입한다(원한다면 이것을 부정적인 균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집을 떠난다. 이야기의 끝에 이르면, 수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다음 장성한 아이는 아버지의 집에 다시 합류한다. 이렇게 해서 균형은 회복된다. 그렇지만 이 균형은 이제 처음의 균형이 아니다. 아이는 이젠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한 성인이다. 따라서 이러한 초보적인 스토리는 두 유형의 에피소드르 포함한다. 하나의 유형은 균형 또는 불균형의 상태를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통과를 그린다. 첫번째 유형의 에피소드들과 두번째 유형의 에피소드들은 정체적인 것과 역동적인 것, 안정과 변화, 형용사와 동사처럼 서로 대립한다. 모든 스토리는, 흔히 알아보기는 쉽지 않더라도 이런 근본적인 도식을 포함한다. 처음이나 끝을 없앨 수도 있고 그 자리에 설명이나 다른 완전한 스토리를 끼워넣을 수도 있다.
그러면 이제는 이러한 도식 속에 초자연적인 것들을 위치시켜 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아랍이나 나이트]에 나오는 [카마랄자만의 사랑이야기]를 보자 이 카마랄자만은 페르시아 왕의 아들이다. 그는 그 왕국 안뿐만 아니라 왕국 밖 어디에서도 가장 잘생기고 지혜롭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그를 결혼시키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이 젊은 왕자는 갑자기 자신 속에서 여자들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혐오감을 발견하고 아버지의 명령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를 벌하기 위해 왕은 탑 속에 그를 가둔다. 이것이 (불균형의) 상황으로서 십 년이라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초자연적 요소가 개입한다. 어느 날 메문이라는 요정이 긴 여행을 하던 중에 이 아름다운 젊은이를 발견하고 그에게 반해버린다. 이어서 그녀는 남자 요정인 다나슈를 만나는데, 그도 중국의 한 공주를 알고 있다. 그런데 틀림없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공주도 결혼하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이 두 주인공의 미를 비교해 보기 위해 두 요정은 잠들어 있는 공주를 역시 잠들어 있는 왕자의 침대로 옮긴다. 이어서 그들은 그 둘을 깨워 그들을 관찰한다. 이어서, 이렇게 밤에 언뜻 만난 후에 왕자와 공주가 재결합하기 위해 벌이는 여러 모험들이 뒤따른다. 결국 그들은 서로 만나게 될 것이며 새로 가정을 이룰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완벽하게 사실주의적인 처음의 균형과 마지막의 균형을 가지고 있다. 초자연적인 사건은 중간적인 불균형을 깨뜨리고, 두번째 균형을 찾아나서는 긴 추구를 유발하기 위해 개입한다. 초자연적인 것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동하는 경과를 그리는 일련의 에피소드들 가운데 나타난다. 사실, 몯느 참여자들이 공고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처음의 안정적인 상황을 가장 잘 뒤집어엎을 수 있는 것은, 그 상황뿐만 아니라 세상 그 자체에 대해 외적인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 있겠는가?
고정된 법, 잘 설정된 규칙, 이것은 스토리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법의 위배가 신속한 변화를 불러오게 하려면, 초자연적인 힘들이 개입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렇지 않으면 한 인간적인 심판자가 원래의 균형에 균열이 생겼음으 알아보게 될 때까지 기다리느라 스토리가 질질 끌게 될 위험이 있다.
뚜 [두번째 탁발승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탁발승은 지하에 있는 공주의 방에 있다. 그는 그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한, 공주를 가지고 즐기면서, 그리고 공주가 제공하는 맛있는식사를 먹으며 지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뿐이라면 스토리는 아무 재미도 없이 끝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하나의 금지, 규칙이 있다. 그것은 정령의 부적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은 즉각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자 제재자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만큼 상황은 신속하게 변하게 될 것이다. <부적이 깨뜨려지자마자 궁전이 뒤흔들리며 곧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또는 [세번째 탁발승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여기서의 법은 신의 이름을 발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어기면서 주인공은 초자연적인 것의 개입을 유발한다. 그의 뱃사공 청동인은 물 속으로 뒤집어진다. 조금 후의 법은 한 방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어기자 주인공 앞으로 말이 한 마리 나타나서 그를 하늘로 데리고 가버린다. 그와 함께 줄거리는 무서울 정도로 빨리 진행된다.
이 예들에서, 안정된 상황의 단절에는 초자연적인 것이 개입이 따른다. 경이적인 요소는 다음의 기능을 최대로 충족해 주는 서술적인 재료이다. 즉 앞선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고, 기왕에 설정된 균형(또는 불균형)을 깨뜨린다.
이러한 변화는 다른 수단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수단들은 덜 효율적이다.
초자연적인 것이 보통 어떤 행위의 이야기와 결합하기 때문에 그것이 묘사나 심리 분석에만 집착하는 소설 속에 나타나는 것은 아주 드물다(헨리 제임스의 예가 여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것과 서술 사이의 관계가 명확해진다. 초자연적인 것이 들어가는 몯느 텍스트는 하나의 스토리이다. 왜냐하면 초자연적인 사건은 우선 미리 설정된 균형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초자연적인 요소들 사이에 친화력이 존재한다 해서 모든 스토리가 그런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점에서 초자연적인 것의 사회적 기능과 문학적 기능이 하나가 되는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법을 위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회 생활 안에서든, 혹은 스토리 안에서든, 초자연적인 것의 개입은 언제나 미리 설정된 규칙 시스템에 단절을 가져오고, 그 점에서 그 정당성이 발견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환상적인 것 그 자체의 기능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초자연적인 사건의 기능이 아니라 그 사건이 유발한 반응의 기능에 대해서이다. 초자연적인 것, 그것을 글자 그대로 취하는 문학 장르, 경이로운 것 등이 문학에서 줄곧 존재해 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지만, 환상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짧은 생명밖에 누리지 못할 마큼 이 질문은 흥미로운 것 같다. 환상적인 것은 18세기 말경에 카조트cazotte와 함께 체계적인 방식으로 출연했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나 모파상의 단편들 속에서 이 장르의 미학적으로 만족할 만한 예들을 보게 된다. 우리는 다른 세기들에서도 환상적인 <주저함>의 예들을 만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나 주저함이 텍스트 잣니에 의해 줴화된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환상 문학이 이렇게 짧은 수명밖에 누리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또는 왜 호나상 문학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환상적인 것을 묘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더 유형들을 더 가까이에서 검사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독자와 주인공은 이런 사건이나 현상이 현실에 속하는지 상상에 속하는지, 그것이 사실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환상이 정의에 그 깁노틀을 제공해 주었던 것은 사실적인 것의 범주이다.
이런 사실을 의식하자마자 우리는 깜짝 놀라며 정지해야 한다. 그 정의에서부터 시작하여, 문학이라 하는 것은 사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의 구별,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구별을 넘어서 간다. 차라리 어느 면에서는 문학과 예술 덕분에 이런 구별을 지탱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문학 이론가들은 그 말을 수차에 걸쳐 했다.
예술은 길이 되기에 충분히 진실하고 또 그렇지 않으며, 장애로 변하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이고또 그렇지 않다. 예술은 <마치 그러한 것처럼>이다. - 모리스 블랑쇼, 불의 부분, 26
문학은 수학처럼 한 귀퉁이를 존재와 비존재의 반대 명제 속에 박아놓고 있는데, 이것ㅇ느 추론적인 사유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 우리는 햄릿과 팔스타프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 노스롭 프라, 비평의 해부, 351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문학은 모든 이분법에 이의를 제기한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불연속적이 여러 조각들로 자른다는 것은 언어의 속성 자체이기도 하다. 이름이란 그것이 형성하는 개념 중에서 하나 또는 몇 개의 특성들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특성들을 배제해 버리고, 이것과 그 반대의 명제만을 제기한다. 그런데 문학은 단어들에 의해 존재한다. 그렇지만 문학의 소명은 언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언어적인 분할들을 넘어서는 것이다. 언어의 내부에서 문학은 모든 언어에 내재한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것이다.
문학적 담론의 특징은 저 너머로 가는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없다). 문학은 언어가 자살하는 데 쓰는 무기와 같다.
그렇다면 사실적인 것과 비사실적인 것 사이의 대비처럼 언어적인 대립들 위에 기초한 이런 문학적 다양성이 바로 문학이 아니겠는가.
사실 문제는 더 복잡하다. 그가 특별히 겨냥한 주저함에 의해, 환상 문학은 사실적인 것과 비사실적인 것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대비가 존재한다는 것을 문제로 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비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비의 대립항들을 알아보고 인정해야 한다. 이어서 그중 하나를 희생시키려면 어떤 것을 희생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바로 그런 식으로 환상 문학이 남겨놓은 모호한 이중적 인상이 설명된다. 즉 한편에서는, 모든 문학에 고유한 사실과 비사실 사이의 한계를 문제 삼는 것이 그 노골적인 중심이 됨에 따라, 환상 문학은 문학의 핵심 자체른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환상 문학은 문학의 입문 과정밖에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일상 언어의 형이상학을 깨부수면서, 그 일상 언어에 생명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 문학은 비록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출발하는 것일지라도 언어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에 어떤 책에 제시된 세계의 몇몇 사건들이 드러내놓고 상상적인 것으로 주어진다면, 그 사건들은 바로 그로 인해 책의 나머지가 가진 상상적인 성격에 이의를 제기한다. 어떤 출현이 과도하게 흥분한 상상의 열매에 불과한 까닭은 바로 그를 둘렀나 모든 것이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상 문학은 상상력의 찬가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텍스트의 대부분을 현실에 속한 것으로, 미리 존재한 사물에 주어진 이름으로 제시한다. 환상 문학은 우리의 손 사이에 두 개념을 남겨놓는다. 하나는 현실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의 개념인데 그 어느 쪽도 불만족스럽다.
사실 19세기는 사실과 상상력의 형이상학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환상 문학은 이 실증적인 19세기의 그릇된 의식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아무도 외적인 움직일 수 없는 사실성을 믿을 수 없고 이렇나 사실성을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문학도 믿을 수 없다. 단어들은 사물들이 상실해 버린 자율성을 획득했다. 이런 다른 시야가 있음을 줄곧 주장해 오던 문학이 아마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한 원동력 중의 하나이다. 그 모든 페이지 내내 언어학적인 고착된 유형화를 전복시키던 환상 문학 자신도그로부터 치명타를 맞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이 죽음으로부터, 이 자살로부터 새로운 문학이 탄생하였다. 따라서 20세기의 문학이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것보다 더 문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건방짐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은 물론 가치 판단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면 안 된다. 바로 그런 사실로부터 그 장점이 감소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초자연적인 것의 스토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 범주에 들어가는 텍스트 중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카프카의 변신으 들어보자. 여기서 초자연적이 사건은 텍스트의 바로 첫 문장에서 주어진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빠져나오며, 그레고르 잠자는 그의 침대 속에서 진짜 벌레로 변한 채 잠을 깼다.> 이 글의 뒤에는 주젛망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간단한 언급들이 있다. 그레고르는 우선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는 곧 그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그는 합리적인 설명을 찾기를 즉각 포기해 버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레고르는 조금씩조금씩 현재 환각이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일었다. 그의 내적인 확신에 따르면 그의 목소리의 변화는 더위와 추위 같은 것의 서곡이었고 여행자의 직업적인 병이었다.> 라는 문장이 따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간략한 주저함의 언급은 스토리의 전체 움직임 속에 잠겨버린다. 그 전체 속에서 가장 놀라운 일은 바로 이 놀라운 사건 앞에서 놀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고골의 [코]에서와 마찬가지다(카뮈는 카프카에 대해 <이러한 놀람의 결핍에 대해 그 이상 더 놀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차츰차츰, 그레고르는 자신의 상황으 ㄹ비정상적인 것으로, 그렇짐나 아무튼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가 일하고 있는 회사의 관리인이 그를 찾으러 오자, 그레고르는 아주 비위가 상한 나머지 이렇게 자문한다. <언젠가는 이 사람에게도 같은 종류의 불행이 닥치지 않을까. 결국, 그렇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지.> 그는 모든 책임으 면하게 해주고, 사람들이 자기를 보살피게 해준 이 새로운 상태 속에서 어떤 위안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기 부모들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귿릉르 놀라게 했다면, 그건 안심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책임이 없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만약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잘된 일이라고 여긴다면, 괴로워한들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포기는 우선 그부터 찾아온다. 그는 마침내 <자기 의무는 임시로 스스로 냉정을 찾는 일이고, 자신의 상황이 본의 아니게 가족들에게 끼치게 된 손해를 자기가 인내하고 감사를 표함으로써 참ㅇ르 많나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이 모든 문장들은 한 인간이 벌레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발목이 부러진 것과 같은 전적으로 가능한 사건에 의거하고 있는것 같다. 그레고르는 차츰차츰 자기의 동물성에 익숙해진다. 우선 물리적으로는 인간들의 음식과 쾌락들을 거부하고, 정신적으로도 만약 기침ㅇ르 한 번 했으면 그것이 인간의 것인지 아닌지 자신의 판단을 신뢰할 수 가 없다. 그가 그 위에 눕기를 좋아하는 어떤 그림 하나를 누이가 그로부터 빼앗아가려고 한다는 의심이 들자, <그는 자기 누이의 얼굴 위로 뛰어들> 기세이다.
차후로는, 그레고르가 가족이 그렇게 바라는 자신의 죽음이라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포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는 북받치는 애정을 느끼며 가족들을 다시 생각했다. 그가 떠나야 한다는 것,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그의 견해는 자기 누이의 견해보다도 훨씬 확고했다.>
그 가족의 반응도 유사한 전개를 따른다. 우선 놀람은 있지만 주저는 없다. 즉각적으로 아버지의 적대감이 온다. 벌써 첫번째 장명네서, <아버지는 가차없이 자기 아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생각하면서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란 최고의 매정함이라고 결정하고 있었음을 자기가 변한 첫날부터 알고 있었다>고 자인한다.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 그렇짐나 그를 돕기에는 전적으로 무력하다. 그의 누이는 처음에는 그와 가장 가까웠으나 곧 포기하고 마침내는 터놓고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레고르가 죽게 되었을 때, 그녀는 모든 가족들의 감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저걸 치워버릴 방도를 생가해야 해요. 우리는 저것을 간호하고 참아내기 위해 인간적으로 할 일을 모두 했어요. 내 생각에는 누구도 우리에게 조금도 비난할 수 없을 거예요.> 가족들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그레고르의 변신이 그들을 슬프게 했지만, 그 변신은 차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다른 세 사람은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하고, 다시 생활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그들은 미래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잘 생각해 보면 장래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셋 모두가 정말 괜찮은 상황들을 발견했는데, 그 상황은 후에 많은 것을 주기로 약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 단편이 막을 내리느 지점은 블랑쇼가 말한 공포의 절저응로서, 그 누이의 새로운 인생으로의 개안, 즉 관능으로의 개안이다. (...관능?)
우리가 이 스토리에 앞서 설정한 범주들을 가지고 접근해 보면, 그것이 전통적 환상 서사와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선 이상한 사건은 점층법의 정상으로서 일련의 간접적인 지적들 다음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 사건ㅇ느 첫 문장 속에 포함되어 있다. 환상적인 스토리는 완전히 자연적인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초자연적인 것에 이른다. 그렇지만 변신은 초자연적인 사건으로부터 출발하여 스토리가 진행하면서 그 사건에 점점 더 자연적인 모습을 부여한다. 그래서 마지막은 초자연적인 것과는 최대한 멀어지게 된다. 단숨에 모든 주저함이 불필요하게 된다. 주저함은 놀라운 사건의 인식을 준비하는 데 사용되었고,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초자연적인 것으로의 이동을 특징짓던 것이었다. 여기서 묘사된 것은 거꾸로 된 움직임이다. 즉 설명할 수 없는 사건 뒤를 잇는 것은 적응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적응은 초자연적인 것에서 자연적인 것으로의 이동을 특징짓는다. 주저와 적응은 두 개의 대칭적이고 상반된 진행을 지적한다.
다른 한편, 주젛마과 놀람조차도없고 초자연적인 요소들의 현재함이 없다고 해서 변신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장르, 즉 초자연적 경이 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경이 문학은 우리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법칙들을 가진 세계 속에 잠겨 있음을 내포한다. 물론 변신에는 충격적이고불가능한 사건이 문제된다. 그렇짐나 그 사건은 결국에는 역설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그런 점에 있어서 카프카의 스토리들은 동시에 경이 문학에도 속하고 낯선 것의 문학에도 속한다. 이 스토리들은 명백히 양립하기 어려운 두 장르가 일치하는 경우이다. 초자연적인 것이 주어진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계속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일견 변신에 비유적인 의미를 주고 싶어한다. 그렇짐나 이 의미를 정확히하려고 시도함녀 즉시 고골의 코와 함께 만났던 현상과 아주 유사한 현상에 봉착하게 된다(최근에 빅토르 에르히리가 보여주었듯이 이 두 이야기의 유사성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물론 이 텍스트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적인 해석들을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텍스트는 그런 해석의 어떤 것도 확실히 해줄 뚜렷한 단서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카프케에 대해, 그의이야기들은 (글자 그대로의 차원에서) 우선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변신에서 묘사된 사건도 다른 여느 문학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사실적이다.
가장 훌륭한 공상 과학 텍스트들도 유사한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처음에 주어진 것들은 초자연적이다. 로봇, 외계인들, 우주적인 공간, 이야기의 움직임은 겉으로는 경이스러워 보이는 이 요소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우리와 가까운 것이며, 그렇나 것들이 어느 만큼이나 우리 생활 속에 들어 있는가를 보도록 강요한다. 로버트 셰클리의 한 단편은 동물의 몸ㅇ에 인간의 뇌를 이식하는 경이로운 수술로부터 시작한다. 이 단편은 결국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 동물과 공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신체). 다른 소설은 싫은 사람들을 제거하는, 전혀 그럴 법해 보이지 않는 조직의 묘사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우리는 그런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친숙한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제거 서비스). 독자는 여기서 적응의 과정을 겪게 된다. 우선 초자연적인 사실 아에 놓이게 되고 이어서 그는 결국 그 <자연성>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한 스토리 구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환상 문학에서는, 낯설거나 이상한 사건이 정상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평가된 것의 바탕 위에서 보여진다. 그 때무네 자연의 법칙을 위배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의식을 강력하게 지배한다. 카프카에게서는 초자연적 사건이 더 이상 주저함을 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묘사된 세상 전체가 이상한 것이며, 이상한 사건만큼이나 밑바탕 자체도 비정상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전도된 환상의 문제를 다시 보게 된다. 환상 문학은 깨뜨리기 위하여 사실적인 것, 자연적인 것, 정상적인 것의 존재를 가정한다. 그렇지만 카프카는 그 문제를 뛰어넘는다. 그는 비합리적인 것을 유희의 일부로 다룬다. 그의 전체 세계는 악몽적이거나 최소한 어둠의 논리를 따르고 있으며, 실제적인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독자에게는 어떤 주저가 나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인물은 전혀주저함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보았던인물과의 동화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카프카적인 이야기는 우리가 환상 문학의 두번째 조건이라고 했던 것, 즉 텍스트 안에서 주저를 재현하는 것(특히19세기 작품의 특징)을 버린다.
사르트르는 블랑쇼와 카프카의 소설들에 대해서 환상 문학 이론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방금 개진했던 것과 아주 빗ㅅ하다. 그 이론은 {상황 I} 속의 논문 [아미다브 또는 하나의 언어로 간주된 환상적인 것에 대하여]에 나타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블랑쇼나 카프카는 더 이상 특이한 존재들을 그리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인간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환상적인 대상만이 있을 따름이다. 몸의 반쪽만 세상에 담그고 있는 종교인이나 영지주의 인간이 아니라, 지나가는 영구차에게 인사를 하고, 교회에 가서 무릎을 꿇으며, 어떤 국기를 따라 박자에 마줘 행진하는, 주어진 인간, 자연적인 인간, 사회적인 인간이다.> <정상적인> 인간이 바로 환상적인 존재이다. 환상적인 것은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된다.
이러한 변신은 그 장르의 기술에 중대한 결과를 낳게 된다. 예전에는 독자가 동화한 주인공이 완벽하게 정상적인 존재였다면 (그래야 동화가 쉬워지고 주인공과 함께 이상한 사건들 아펭서 놀랄 수 있다), 여기서는 바로 이 주인공이 <환상적>이다. [성]의 주인공도 그러하다. <그의 모험과 시야를 함께 나눠야 할 이 측량사에 대해, 우리는 금지된 마을에서 기를 쓰고 머무르려고 하는 그의 이해할 수없는 고집 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로부터 만약 독자가 등장인물과 동화한다면 독자 자신도 현실로부터배제된다는 결과가 나온다. <그래서 세상을 디집어서 세워야 하는 우리의 이성은, 이런 악몽 속에 휩쓸리게 됨으로써그 자체가 환상적이 된다.>
카프카와 함께 우리는 일반화한 환상 앞에 직면한다. 책의 전체 세상과 독자 자신이 거기에 포함되게 된다. 사르트르가 자기의생각을 보여주기 위해 즉석에서 만들어낸, 이러한 새로운 환상을 보여줄 아주 명확한 예가 있다. <나는 앉는다. 크림 커피를 주묺나다. 종업원은 주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게 한다. 그리고 그도 실수하지 ㅇ낳기 위해 주문을 반복한다. 그는 뛰어가서 내 주문을 두번째 종업원에게 전달한다. 두번째 종업원은 그것을 쪽지에 기록하고 그 쪽지를 세번째 종업원에게 전달한다. 마침내네번째 종업원이 와서내 테이블 위에 잉크를 놓으며 말한다. [여기 있습니다.] [그렇지만 난 크림 커피를 주문했는데요.] 하고 내가 말한다. [그렇지요, 정확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는 가버린다. 만약에 독자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건 종업원들의 익살에 관한 것이라거나 또는 어떤 집단적 강박 관념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예를 들어 모파상은 [오를라]에서 그렇게 믿길 바랐다), 우리는 글을 잘못 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독자에게 이런 기묘한 일들이 정상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세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면, 독자는 단숨에 환상적인 것의 한가운데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고전적 환상 서사와 프카 서사의 차이이다. 전자의 세계에서 예외였던 것이 여기서는 규칙이 된다.
결론적으로, 카프카는 초자연적인 것과 그러한 그대로의 문학을 희한하게 종합해서, 우리로하여금 문학 자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수없이 문학의 역설적인 위상에 대해 언ㄱ브했다. 문학은 일상 언어 자신이 보기에는 모순이라고하는 것을 먹고 산다. ㅁ누학은 말과 말을 뛰어넘는 것 사이의 반대 명제,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반대 명제를 담당한다. 카프카의 작품은 우리에게 훨씬 더 멀리 가도록 해줬으며, 어떻게 해서 문학이 그 심장부 안에서 또 다른 모순을 살게 하는 가를 보여주었다. 이런 작품에 대한 명상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리스 블랑쇼의 [카프카와 문학]이라는 수필이 쓰여진다. 보통의 단순주의적 관점은 문학을 (그리고 언어를) <현실>의 이미지로, 문학이 아닌 것의 복사로, 평행하게 달리면서 유사한 일련의 것으로 소개한다. 그렇짐나 이러한 관점은 이중으로 잘못되었다. 왜냐하면그것은 언술된 것의 성격과 언술 행위의 성격을 똑같이 배신하기 때문이다. 단어들은 그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느 사물들 위에 부착된 꼬리표가 아니다. 사람이 글을 쓸 때면, 그는 오직 그것만을 하는 것이다. 글쓰기의 몸짓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고 그 외 다른 어떠한 경험에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동시에 내가 글을 쓸 때면 나는 뭔가에 대해 쓴다. 비록이 뭔가가 글쓰기라 할지라도 말이다. 글쓰기가 가능하려면 그것은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죽음은 글쓰기 자신마저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더 이상 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은 자기 자신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만 가능한 것이다. 즉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거기 현재해 있으면 문학을 위한 자리는 없게 된다. (없어진다.) 또 우리가 문학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면,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어진다. 그것은 바로 블랑쇼가 말했던 것과 같다. <만약 언어가, 특히 문학 언어가 지속적으로 미리 잣니의 죽음을 향해 투신하지 않는다면 문학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불가능을 향한 움직임이 바로 문학의 조건이고 그를 기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의 부분} 28
가능과 불가능을 화해시키고자 하는 줄기찬 작업이 <불가능>이란 단어 자체에 대한 정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은 <없다>. 여기에 문학의 가장 커다란 역설이 있다.
옮긴이: 건국대 불문학 강사 하태환
세계의 문학 1997 여름호 84 161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