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프로이트. 창조적 작가와 몽상 중
Swimming/BOOKS
2011. 12. 30. 13:08
문학가가 아닌 전문가의 이야기. 문학의 유희성에 대한 진지한 조명. 문학의 가치에 대한 존중.
문학적 성향의 최초의 흔적들을 찾아야 한다면 어린아이드레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어린아이가 가장 애착을 느끼고 몰두하는 것은 놀이다. 어쩌면 우리는 놀고 있는 아이야말로 자김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면에서,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세계의 사물들을 새로운 질서에 맞추어 자신의 취향에 따라 배치하고 있다는 면에서 마치 한 사람의 시인처럼 행동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아이가 그 세계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일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이는 자신의 놀이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으며 엄청난 양의 정의적 움직임을 놀이 속에 쏟아 붓게 된다. 놀이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진지함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일 것이다.(유희의 반의어는 진지함보다도 현실)
(중략)
문학 창조자는 결국 놀이를 하는 아이와 동일한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역시 몽상적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고 그 세계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실과 자신의 몽상적 세계를 선명하게 구분하면서도 창조 행위에 엄청난 양의 정의적 움직임을 쏟고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문학 창조라는 세계의 비현실성에서부터 예술적 기법에 관계된 매우 중요한 결과들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현실 그대로라면 즐거움을 제공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몽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변화되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로는 고통스러운 감정들이지만 그 감정들은 문학 창조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는 관객들에게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중략)
사춘기를 지나 청년이 되면 놀이를 중단하고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그가 놀이에서 얻을 수 있었던 즐거움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한번 경험한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대상을 바꿀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단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단념이 아니라 한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대체 작업인 것이다. 대용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청년이 놀이를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그가 포기하는 것ㅇ느 다른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그가 실제의 대상들에게 기대어 자신의 놀이를 보강했던 그 보강 자체다. 이제 그는 놀이를 하는 대신 자신의 몽상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는 구름잡는 이야기 속에서 모래성을 쌓는 것이다. 흔히 비몽사몽이라고 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어느 순간에서건 이런 몽상의 세계를 그려 보았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중략)
- 성인과 아이의 놀이의 차이
성인의 몽상은 어린아이의 놀이보다 관찰하기 훨씬 어렵다. (중략) 아이들은 그들이 결코 어른들을 위해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어른들에게 놀이를 숨기지 않는다. 반면에 성인이라면 잣니이 빠져있는 몽상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숨기려고 하면서 (중략) 이런 이유로 오직 자신만이 그런 몽상들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또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완벽하게 유사한 몽상적 차조물들을 볼 수 있다는 느낌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중략)
- 몽상의 몇가지 특징
행복한 사람들은 몽상을 좇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오직 만족을 모르는 자들만이 몽상을 좇을지도 모른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몽상을 움직이는 힘이고, 모든 몽상은 욕망의 완결이며 동시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보정이다. (자신의 격을 높이려는 욕망과 성적 욕망)
(중략)
- 백일몽의 법칙
몽상은 세 개의 각기 다른 시간 사이를, 다시 말해 재현 행위의 세 순간 사이를 부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 활동은 현재의 인상에 및락되어 있는데, 이 현재의 인상이란 개인이 품고 있는 어떤 큰 욕망을 일깨우는 한 계기이기도 하다. 이 계기에서 시작해 우리의 정신 활동은 이전의 경험으로 되돌아간다. 정신 활동은 이때 미래와 연관된 상황을 창조해 내는데, 이 상황이 욕망이 충족되는 상황, 더 정확히 말해 낮에 꾸는 꿈 혹은 몽상인 것이다. (중략) 시간을 가로지르는 욕망의 도화선이 요컨대 과거.현재.미래라는 세 시간대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불만족 - 과거 모델 통해 - 미래 이미지로 만들기)
(중략)
- 낮꿈과 창작의 차이
비록 그들(낮꿈러)이 우리에게 자신들이 품고 있는 몽상을 털어놓는다 해도 우리가 그들의 고백을 들으면 결코 어떤 즐거움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몽상들은 거부감을 주거나 기껏해야 냉담한 반응만을 얻게 된다. 그러나 만일 창조적인 작가들이 작업을 학나 혹은 우리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몽상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들려줄 때에는 반대로 진한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여러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일까? (중략) 바로 이 기교 속에 아마도 진정한 시학이 존재할 것이다. 이 기교는 두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창조자는 낮에 꾸는 꿈을 변형시키거나 베일로 가림으로써 자아 예찬이 주조를 이루는 꿈의 성격을 약화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몽상을 통해 순수하게 형식적인, 다시 말해 미학적인 즐거움을 제공하여 독자들을 유희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즐거움은 깊은 정신적 움직임들에서 시작하는 좀더 큰 즐거움에 대한 욕구를 상쇄시킬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을 우리는 흔히 상여 유혹이라거나 혹은 사전 쾌락이라고 불러 왔다.
문학적 성향의 최초의 흔적들을 찾아야 한다면 어린아이드레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어린아이가 가장 애착을 느끼고 몰두하는 것은 놀이다. 어쩌면 우리는 놀고 있는 아이야말로 자김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면에서,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세계의 사물들을 새로운 질서에 맞추어 자신의 취향에 따라 배치하고 있다는 면에서 마치 한 사람의 시인처럼 행동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아이가 그 세계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일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이는 자신의 놀이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으며 엄청난 양의 정의적 움직임을 놀이 속에 쏟아 붓게 된다. 놀이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진지함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일 것이다.(유희의 반의어는 진지함보다도 현실)
(중략)
문학 창조자는 결국 놀이를 하는 아이와 동일한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역시 몽상적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고 그 세계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실과 자신의 몽상적 세계를 선명하게 구분하면서도 창조 행위에 엄청난 양의 정의적 움직임을 쏟고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문학 창조라는 세계의 비현실성에서부터 예술적 기법에 관계된 매우 중요한 결과들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현실 그대로라면 즐거움을 제공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몽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변화되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로는 고통스러운 감정들이지만 그 감정들은 문학 창조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는 관객들에게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중략)
사춘기를 지나 청년이 되면 놀이를 중단하고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그가 놀이에서 얻을 수 있었던 즐거움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한번 경험한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대상을 바꿀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단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단념이 아니라 한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대체 작업인 것이다. 대용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청년이 놀이를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그가 포기하는 것ㅇ느 다른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그가 실제의 대상들에게 기대어 자신의 놀이를 보강했던 그 보강 자체다. 이제 그는 놀이를 하는 대신 자신의 몽상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는 구름잡는 이야기 속에서 모래성을 쌓는 것이다. 흔히 비몽사몽이라고 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어느 순간에서건 이런 몽상의 세계를 그려 보았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중략)
- 성인과 아이의 놀이의 차이
성인의 몽상은 어린아이의 놀이보다 관찰하기 훨씬 어렵다. (중략) 아이들은 그들이 결코 어른들을 위해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어른들에게 놀이를 숨기지 않는다. 반면에 성인이라면 잣니이 빠져있는 몽상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숨기려고 하면서 (중략) 이런 이유로 오직 자신만이 그런 몽상들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또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완벽하게 유사한 몽상적 차조물들을 볼 수 있다는 느낌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중략)
- 몽상의 몇가지 특징
행복한 사람들은 몽상을 좇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오직 만족을 모르는 자들만이 몽상을 좇을지도 모른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몽상을 움직이는 힘이고, 모든 몽상은 욕망의 완결이며 동시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보정이다. (자신의 격을 높이려는 욕망과 성적 욕망)
(중략)
- 백일몽의 법칙
몽상은 세 개의 각기 다른 시간 사이를, 다시 말해 재현 행위의 세 순간 사이를 부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 활동은 현재의 인상에 및락되어 있는데, 이 현재의 인상이란 개인이 품고 있는 어떤 큰 욕망을 일깨우는 한 계기이기도 하다. 이 계기에서 시작해 우리의 정신 활동은 이전의 경험으로 되돌아간다. 정신 활동은 이때 미래와 연관된 상황을 창조해 내는데, 이 상황이 욕망이 충족되는 상황, 더 정확히 말해 낮에 꾸는 꿈 혹은 몽상인 것이다. (중략) 시간을 가로지르는 욕망의 도화선이 요컨대 과거.현재.미래라는 세 시간대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불만족 - 과거 모델 통해 - 미래 이미지로 만들기)
(중략)
- 낮꿈과 창작의 차이
비록 그들(낮꿈러)이 우리에게 자신들이 품고 있는 몽상을 털어놓는다 해도 우리가 그들의 고백을 들으면 결코 어떤 즐거움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몽상들은 거부감을 주거나 기껏해야 냉담한 반응만을 얻게 된다. 그러나 만일 창조적인 작가들이 작업을 학나 혹은 우리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몽상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들려줄 때에는 반대로 진한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여러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일까? (중략) 바로 이 기교 속에 아마도 진정한 시학이 존재할 것이다. 이 기교는 두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창조자는 낮에 꾸는 꿈을 변형시키거나 베일로 가림으로써 자아 예찬이 주조를 이루는 꿈의 성격을 약화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몽상을 통해 순수하게 형식적인, 다시 말해 미학적인 즐거움을 제공하여 독자들을 유희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즐거움은 깊은 정신적 움직임들에서 시작하는 좀더 큰 즐거움에 대한 욕구를 상쇄시킬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을 우리는 흔히 상여 유혹이라거나 혹은 사전 쾌락이라고 불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