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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03 언제나 배고픈 사람을 위한 군것질 <7맛 7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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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4 여적여의 조건 _ 남성에 의해 양분되는 여성 1
- 2016.09.28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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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언제나 배고픈 사람을 위한 군것질 <7맛 7작>
황금가지 테이스터 문학상 <7맛 7작>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3733670
인간은 왜 항상 허기질까?
태어난 후 매일 매일 느껴왔으니 이제는 그만 익숙해져야 마땅한 감각이다. 그럼에도 매 세 끼 느껴지는 허기는 늘 짜릿하고 늘 새로워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다. 배고픔에 지치다보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왜 ‘이렇게까지’ 배가 고픈 건지. 왜 계속 음식을 찾아 헤매게 되는지.
<7맛 7작>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도 한참 배가 고팠다. 아침 점심 모두 거르고 일하는 오후, 퇴근까지는 아직 시계 반 바퀴가 남은 때. 배고파 소리를 사려물며 트위터를 열었는데 <7맛 7작> 발매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음식을 소재로 가지각색 단편 모음. 푸드 프린터 미역국 이야기가 눈을 사로잡았다. 냉면, 스파게티. 카레. 배고플 때 음식 소설집이라니 이건 운명인가요. 돌이켜보면 언제나 배가 고프니까 언제든 이 책을 보게 되었겠구나 싶다.
작품집에는 제목처럼 일곱 가지 음식, 일곱 가지 소설이 담겨 있다. 다루어지는 음식은 미역국, 스파게티, 라면, 냉면, 카레와 (인도) 커리 등 대개 내게 매우 친숙한 메뉴였다. 그 흔한 음식에 작가만의 특별한 비법이 첨가되어 엉뚱기발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입이 출출할 때마다 뜯어먹는 간식처럼 그렇게 한 작품 한 작품씩 꺼내 읽었다. 이야기를 삼키고, 문장을 마시고, 단어를 오독오독 씹었다. 독서가 참 즐거운 식사 시간이 되었다.
1. 일상을 비추는 음식
첫 작품 「해피버스데이, 3D 미역국」은 독자를 훅 이입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연령대와 감성이 나와 얼추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마 30대의 매 마감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종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각박하다 못해 얄팍한 생활, 복사용지처럼 뽑혀 그때 그때 소모되는 나. 그런 내 단짝 푸드 프린터.
자판기와 3D 프린터를 합쳐놓은 듯한 이 기계덕분에 이야기는 독자의 일상에서 한 단 올라간다. 집집마다 들여놓은 푸드 프린터로 인간은 더욱 단절되지만, 오히려 그 푸드 프린터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푸드 프린터로 구현 불가능한 ‘엄마의 손맛 미역국’을 먹어야 할 대 위기에 놓이고 마는데!
기술 문명으로 인한 단절 / 기술 문명으로도 놓칠 수밖에 없었던 인명 / 기술 문명으로 다시 이어진 인연. 소설은 현대 사회의 한계와 가능성을 함께 다루며 거기에 따스한 인간애를 부여한다. 주인공이 받은 기름지고 쫀득한 미역국처럼 따뜻한 결말이다.
매일 먹어야 하기에 시대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는 밥상으로 오밀조밀 맛있는 소설 한 편을 만들었다. 좋은 소재를 다룬 좋은 이야기였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이 작품을 도드라지게 하는 소재인 푸드 프린터 활용이 애매했다는 것이다. 푸드 프린터는 주인공을 돋보여주는 도구지만 메인 서사는 아날로그 미역국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보니 중요한 순간에는 존재감이 사라진다. 소설 초반에 눈맛을 끄는 소재이니만큼 마지막까지 맛이 났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2. 누군가를 떠올리는 촉매제
「해피버스데이, 3D 미역국」에서 주목했던 또다른 꼭지는 음식이 ‘잃어버린 사람’을 회상하게 만드는 키워드로 기능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세 번째 작품 「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과 마지막 작품 「커리 우먼」 에서도 쓰이는 장치다.
「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은 정체불명의 스파게티교 신봉자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를 찾는 남편의 이야기를, 그 수색 의뢰를 받은 탐정의 시점에서 쓴 산뜻 발랄한 이야기다.
평소 먹지 않기 때문에 분위기 낼 때 가기 좋은 스파게티. 알고보면 자취생이 휘적휘적 해먹기 편한, 이색적이면서도 만만한 메뉴 선정과 문체가 잘 맞아 떨어졌다. 세상 무슨 일에도 심드렁해서 계약결혼도 덥석 해버린 남자가 아내를, 아내의 독특함을, 그 내면의 사정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귀엽게 그렸다. 이 작품에서 파스타는 아내에 대한 유일한 단서이자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다.
「커리 우먼」은 주인공의 단골 중고 서점이 난데없이 커리집으로 변모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다. 주인공에게 카레는 미성년자인 자신을 두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어머니의 음식이다. 주인공은 이 신기한 커리집에서 냄비 가득 카레를 끓여놓고 사라져버리는 여자들이 자신의 어머니 외에도 여럿 있으며 그들을 ‘커리 우먼’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은 처음 읽었을 때 이해가 썩 잘되지 않았다. 작품은 카레가 가진 두 가지 위상을 소재로 했고, 매일 매일 관리해야 하는 가정 식단을 간단히 때우게 해주는 집밥 카레 / 이색적인 향과 재료, 먹는 방법으로 이국적 분위기를 듬뿍 느낄 수 있는 인도 커리를 여성의 처지와 접목시켰다.
혼자 아이를 기르며 일하는 미혼모든, 잘 나가는 자본가의 트로피 와이프든. 여성은 모두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의무에 강제로 붙들려 있다. 퇴근도 은퇴도 없이 매일 아침 점심 저녁 밥상을 해결해야 하고 결국 이 의무를 쉽게 이행할 수 있게 해주는 메뉴가 카레다. 그렇게 카레 끓이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그녀가 그 자리를 떠나게 되면? 남는 건 한 냄비의 카레 뿐이다.
작품에서는 ‘커리 우먼’은 카레를 남겨놓고 문득 떠난다고 표현했지만 나는 이를 카레를 끓이다 사라졌다고 받아들였다. 카레에서 커리로. 의무에서 일탈로.
「해피버스데이, 3D 미역국」과 「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 「커리 우먼」의 문체는 제각각이다. 세 작품에서 회상되는 인물의 처지도, 주인공의 목적도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음식을 통해 그들을 회상하는 것만은 같다. 음식이 누군가의 산 증거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문득 내가 먹는 음식 메뉴를, 내 주변 사람들을 돌이켜 보았다. 내 지인들은 나를 무슨 음식으로 기억할까? 매일 마시는 제로 콜라, 친구들과 둘러앉아 철없이 혼자 두 쪽 다 먹었던 치킨 다리, 체하면서도 자꾸 먹었던 쫄면. 지금 내가 떠올리면 죄 한심한 모습 뿐이다. 글쎄. 한심한 건 괜찮은데. 누군가 나를 음식으로 떠올린다면 웃어 줬으면 좋겠다.
3. 벗어날 수 없는 굴레
한편 다섯 번째 작품 「하던 가닥」은 위 세 작품과는 반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위 세 작품이 음식으로 떠나보낸 사람을 회상한다면 이 작품은 국수 가닥의 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의 귀향을 다루기 때문이다.
낡고 오래된 국숫집, 집에 돌아갈 때마다 엄마가 목이 메이도록 들이미는 음식, 스릴러 액션이 섞여 있는 이 작품은 독자의 입에 침보다는 구토감이 치밀도록 한다. 밀가루 음식을, 정말, 끝도 없이 먹이거든. 그 모든 음식을 익히고 지지고 삶는 과정과 입에 넣는 모습을 읽다보면 내가 다 후각을 잃는 것 같다. 온갖 음식 가판대가 다 있는 푸드 코트 한 가운데에 놓인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운명 앞에 다시 선 주인공을 볼 때는 차라리 홀가분한 심정이다.
4. 추리의 단서
음식이 누군가가 남기는 흔적이라면 누군가를 추적할 단서도 될 터다. 「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은 화자가 사설 탐정이다보니 간략하게나마 탐색의 과정을 끼얹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탐정이라는 직업이나 추리 과정은 입맛을 돋워주기 위해 조금 얹는 허브 정도의 역할이다.
음식으로 상대를 추적하는 장치는 여섯 번째 작품 「군대 귀신과 라면 제삿밥」에도 나온다. 제목 그대로 군대에서 귀신에게 라면 제삿밥을 바치게 된 주인공이 라면의 연도로 귀신의 사망연대를 짐작한다. 물론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입대부터 제대까지 귀신, 라면과 함께한 주인공의 경험담이므로 이 추적 과정도 그리 상세하지 않다.
라면 맛을 귀신이 구분해 내어 알아볼까 싶기도 하거니와, 60년대, 80년대에 나온 라면과 같은 상표라고 해도 2010년대 만들어진 라면은 맛이 다를 거라는 점 등등 덜컥거리는 부분들이 있지만……. 애초에 귀신이 왜 그렇게 라면에 환장하는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지만. 역시 넘어가자. 중요한 건 지옥 같은 군대를 주인공이 무사 제대했다는 거니까. 수십년 묵은 귀신까지도 제대 시켜준 라면 성인이여.
(그런데 타이밍 딱 맞춰 군 부대 앞까지 찾아오는 증손녀가 있다니 이 귀신 너무 영험한 거 아니냐)
음식과 추리를 본격적으로 다룬 건 작품집 네 번째 작 「류엽 면옥」이다. 이 작품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마치 1920년대에 정말 냉면집 배달부 생활을 해본 것처럼 사건 정황과 주인공의 직업, 소재가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20년대 경성일보에 실린 기사 한 꼭다리를 가져왔다고 해도 그럴 법 하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과 달리 음식의 조리, 음미 과정에 집착적인 묘사를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당시 냉면가게 안팎의 풍경을 주목한다. 가게 안에서는 냉면 한 그릇을 내오기까지 반죽을 치고 육수를 내는 이들이 있고 가게 밖으로는 배달부 중머리들과 은밀히 정보를 주고 받는 독립군, 그들을 쫓는 경감이 있다.
단편이다보니 인물들의 사연을 대사 몇 마디로 처리하고 주인공의 마지막 결단도 너무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쾌속 전개가 냉면처럼 시원했다. 하필 요즘 겨울이라, 괜히 나까지 20년대 겨울 별미였다는 냉면이 땡겨서 아주 혼났다.
(난 원래 비빔 냉면 파인데 소설을 읽을 때는 동치미 냉면이 너무 땡기더라. 주변에 파는 곳도 없는데! 이럴 때야말로 푸드 프린터 필요한 것 아닌가요!!)
5. 조리까지의 기나긴 여정
한편 재료를 내오고, 손질하고, 조리하는 과정이 중심 장면을 이룬 작품도 있었다. 두 번째 작품 「비님이여 오시어」와 다섯 번째 작품 「하던 가닥」이다.
「비님이여 오시어」는 작품집 중 유일한 판타지 역사물이다. 이 소설의 배경 모델은 세종 시대 극심한 가뭄기. 왕은 청룡을 잡아 비를 빌고자 하고 주인공 숙수가 청룡을 찾아 가는 여정이 아주 길게 다루어진다.
기아와 전염병 유행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여정은 곧 한 끼 한 끼를 이어가는 과제가 된다. 토끼부터 사람까지, 이 작품에 나오는 모든 생물들이 서로를 사냥하고 먹기 위해 목숨을 건다. 마침내 용을 사냥하고, 조리하고, 임금의 앞에 대령하기까지의 과정이 모두 위기다.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는 광기가 되고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예스러운 분위기를 잘 유지하고 옛 음식도 많이 등장하여 신선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도 큰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리는 조선 왕과 숙수의 역할은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닥친 상황에서, 가뭄 해결을 위해 용을 잡는데 달랑 둘만 보낸다는 점도 의아했다. 하지만 이는 판타지 퓨전이라는 장르를 보아 넘어갈 수 있는 문제다.
내가 가장 아쉬운 부분은 주인공 숙수를 보좌하기 위해 보내진 인물, 모량이다. 모량은 동물과 소통하는 이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실상 작품 내에서 역할이 없다. 모량의 액션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 액션이 주인공에게 아무 울림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이 모량 때문에 어떤 생각의 변화를 일으켰나? 그런 적이 없다. 반면 모량은 별 설득 과정이 없어도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캐릭터가 휙휙 바뀐다.
갈등은 일단 두 캐릭터가 각자의 입장을 고수할 때 일어난다. 이 작품에서 모량의 입장이 쉬이 바뀌면서 갈등도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더 첨예한 갈등이 일어났다면 주제도 더 심화되었을 텐데.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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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맛 7작>은 간만에 든 단편집이었다. 책 날개와 중간중간의 작가 소개란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장 많이 느낀 건 결국 동질감이다. 나도 월급날 퇴근길에 있는 파스타 집에 들어가서 한 달 잘 버틴 걸 자축하곤 하는데. 여기 나랑 비슷한 사람이 있구나. 그리 생각하며 오늘도 배를 두들긴다. 이 글 쓰다보니 어느새 점심 때가 지났다.
춥고 북적북적한 도시에서 매일 삼시세끼를 해결하고 있을 우리, 작가와 독자 모두를 응원하고 싶다. 의미 있는 테마 공모전이었고, 이런 재미있는 공모전이 앞으로도 계속 되길!
글
건국의 정치 - 181~186p 정몽주의 등장과 불행한 의식
공민왕 5년 7월 인당에게 벌어졌던 일이 재현되었다. 장군들의 군사적 승리는 정치적 위협이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찬양받는 것이다. 그것이 당대의 역사이다. 그들은 그 시대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의미 안에서만 수용된다. 사가史家들이 공정한 이유는 그들이 역사 밖에 있는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역사가는 그로 인해 당대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정치가들의 경우 당대를 넘어서는 의미를 이해한다 해도 정치적 불가피성은 그들에게 한정된 선택을 강요한다. 이런 정치가는 스스로가 분열되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현실의 불가피성과 역사의 이념 사이에서 방황한다. '불행한 의식'은 역사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이 아니라,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의식이다. 그러나 역사의 목적이 없다면 역사는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역사의 목적은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탄생된다. 그 경우 역사는 도달해야 할 목적을 가진다. 목적론적 역사는 자연적 의식이 아니라 불행한 의식의 역사이다.
정몽주는 엯사의 이러한 성격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었다. 홍언박 등 당대의 유수한 정치가들은 장군들의 살해를 불가피한 일로,혹은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였다. 공민왕 역시 그랬다. 그들은 당대의 역사 안에서 그들을 이해했다. 그러나 안우의 아들에게 보인 공민왕의 연민을 볼 때 공민왕은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공민왕은 안우 등이 정치적 불가피성의 희생자임을 알고 있었다. 안우 등을 처형한 뒤 내린 교서에서 왕은 "옛 공로를 생각하여 처자에게는 죄가 미치지 않게 할 것이며, 아울러 그 관할에 소속된 대소 관리는 관계 기관으로 하여금 공을 헤아려 서용케 할 것"을 명했다. 또한 안우의 어린 아들이 헐벗은 몸으로 길가에 서 있따는 말을 듣고, "슬퍼하여서 불러 궁중에 두고 돌아갈 곳을 물어서 보냈고, 안우의 휘하 군사가 놀라 무너지자 왕이 불러서 위로하였다"고 한다. 백성들 역시 이들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방실의 아들은 중문中文이다. 안우의 아들은 나이가 겨우 10여 세였다. 저자에 나가 놀자, 사람들이 음식을 먹이면서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이 편하게 먹고 잘 수 있는 것은 모두 원수의 공"이라 말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고려사 열전 26, 안우)
정치가들과 달리 평범한 사람들의 윤리로는 이들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민왕 13년 정도전은 일찍이 정세운이 개경의 동문 밖에 심은 버드나무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성을 나와 남쪽 바라보니 갈 길은 멀고 먼데,
동풍 불어 때는 바로 이월 초순,
뉘라서 도성 문에 버들을 심었느냐.
해마다 버들솜 날아 사람의 슬픔을 더해주네. (삼봉집 出城)
그러나 이 사건을 역사의 보편적인 문제와 결부시켜 이해했던 사람은 정몽주였다. 김득배와 정몽주는 좌주와 문생 관계였다 김득배는 원래 과거에 급제한 문신으로 정당문학에 올랐다. 그는 공민왕 9년 10월에 지공거 (과거 시험관)를 맡아 정몽주를 뽑았다. 당시의 습속에서 '좌주-문생' 관계는 부자 관계처럼 인식되었고, 평생 동안 유지되는 중요한 정치적, 윤리적 관계의 하나였다. 김득배가 죽자 직한림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시체를 거두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아아! 황천이여! 나의 죄가 무엇이며, 아아 황천이여!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대개 듣건대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림은 하늘이요, 선인을 상 주고 악인을 벌함은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나 그 이치는 하나인즉,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하였으나,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김은 과연 무슨 이치며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함은 또한 무슨 이치입니까? 지난날 홍건적이 침입하여 임금이 서울을 떠나시니 국가의 운명이 한 가닥 실 끝에 달린 것처럼 위태롭거늘, 오직 공이 먼저 대의를 선창하자 원근이 향응하였고 몸소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능히 삼한의 대업을 회복하였으니, 무릇 이제 사람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자는 것이 그 누구의 공입니까?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공으로써 덮는 것이 옳을 것이요, 죄가 공보다 무겁더라도 반드시 그 죄를 자복시킨 뒤에 베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말의 땀이 마르지 않고 개선하는 노래가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태산 같은 공을 오히려 칼날의 피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로써 하늘에 묻는 바입니다. 나는 그 충혼忠魂, 장백壯魄이 천추만세토록 반드시 구천의 아래서 울음을 머금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아, 명命이로구나!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고려사 열전 26, 안우)
비통함으로 가득한 이 글은 장차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는 듯한 글이다. 그런데 이 글에는 단순한 슬픔 이상으로 당대 고려의 정신이 직면한 분열과 위기가 격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정몽주는 인간세계의 부조리와 하늘 및 인간의 관계를 묻고 있다. 그것은 일찍이 사마천이 중국 역사를 시작하면서 물었던 물음과 같은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천도天道는 특별히 친한 자가 없으며 항상 선인과 함께한다고. 백이. 숙제 같은 사람은 정말 선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인을 쌓고 깨끗한 행동을 하였는데 굶어 죽고 말다니! 70명의 문도 중에서 공자는 안회만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칭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안회는 굶기가 일쑤였고 술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여 베푸는 것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 나는 심히 당혹감을 금치 못하겠다. 도대체 이른바 천도라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기 열전 1. 백이숙제)
하늘은 인간과 만물을 낳았으니 인간과 하늘은 하나가 아닌가? 그런데 역사의 이 비극들은 어찌된 것인가? 과연 하늘은 존재하는가? 우리의 이해가 잘못된 것인가? 하늘이 인간을 이긴다 하고 인간이 하늘을 이긴다 하면, 하늘과 인간은 달느가?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영원한 가치의 기준이 존재할 수 있는가? 모든 가치는 상대적일 뿐 절대적인 가치는 없는 것인가?
정몽주의 이 모든 질문은 결국 그가 혼란에 빠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학문을 통해 배운 세계가 아니었다. 김득배의 죽음은 그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ㅇ벗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이성에 강렬하고도 파괴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제문은 정몽주가 이 도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비탄이 그 증거로, 그는 "이것이 내가 피눈물로써 하늘에 묻는 바"라고 말하고 있다.
정몽주의 이러한 질문들은 매우 독특한 인간의 탄생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는 홍언박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고착되어 그 안에서만 의미를 이해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현세에 있으면서도 현세 너머에서 현세의 문제를 통찰하려는 인간이었다. 그는 행위에 불변의 원칙을 가져다주고 삶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을 탐색하는 인간이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과 모든 행위는 하루살이처럼 부질없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의 비탄처럼 이러한 모색은 혼란을 가져온다. 세계는 더 이상 조화롭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이원적인 요소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이 속에서 우리는 현실 속에 가라앉거나 현실의 뿌리를 뽑는 극단적인 길을 택한다. 앞의 경우 역사의 의미는 질문되지 않으며, 뒤의 경우 역사의 의미는 살아갈 터전이 없다. 두 극단의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할 때, 그는 분열된 인간이며 그의 의식은 불행한 의식이다. 정몽주는 바로 그런 상태에 있었다. 정몽주는 그 혼란을 '명命'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그것은 알 수 없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뜻이다. 우리는 이 모든 역사의 부조리에 대해, 그리고 이 혼란에 대해 체념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이 역사를 묵묵히 견디며 살아갈 뿐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구원을 인간의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완성하려는 시도였다. 즉 인간은 그 잣니을 떠나서는 이 세계에서 구원될 수 없다. '천리'와 '수신'. '평천하'에 이러는 복잡한 설명은 그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의 실제는 그처럼 논리적으로 정합적인가? 인간은 그 자신을 스스로 구할 수 있는가? 또한 구원된 인간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가? 인간이 내적으로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성리학자들 역시 증험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나 이뉼, 만물로 확대된 자아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거기에 성리학자들의 곤경이 존재했다. 세계는 자기의 단순한 확장 이상인 것이다. 하늘은 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였찌만, 다만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남겨두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이 분열의 크레바스이다. 정몽주의 '천명'은 그 점에 대한 비통한 고백인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의 이 절규를 통해 우리는 하늘이 역사에서 이념 혹은 모적을 실헌하는 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정몽주의 제문은 바로 그 자신이 김득배의 죽음을 통해서 역사의 참다운 이념을 근본적으로 자각했음을 보여준다. 김득배의 죽음에 대한 비탄은 역사의 불합리에 댛나 의문이지만, 동시에 역사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발견이기 땜누이다. 그리하여 여말선초의 역사에서 정몽주는 이념의 서식처가 되었다. 정몽주의 의식 속에서 역사의 이념은 이미 탄생되었으나, 그것은 아직 세계 속에 실현되지 않았다. 김득배의 죽음은 그 분열을 분명히 자각시켰다. 그러나 이념의 성술은 정몽주에게 그의 삶 전부를 요구했다. 그리고 정몽주는 정치적 생애의 종국에 마침내 그와 같은 인간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제문은 정몽주 자신의 정신적 운명에 대한 예언이다. 그는 정치 속에서 그의 정신을 완성하고자 했으므로, 그것은 또한 그의 정치적 운명이기도 하다. 그 자신도 본질적으로 김득배와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정치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략의 희생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세계 속에 나타난 정신의 고통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김득배와 달리 그는 잣니의 죽음이 가진 이념적 의미를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몽주의 죽음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서 정신적 사건이 되었다. 조선의 정치적 탄생은 조선 건국자들의 공업이었지만, 정신적 탄생은 근본적으로 정몽주의 죽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글
세간을 늘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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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지대
후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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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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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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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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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여적여의 조건 _ 남성에 의해 양분되는 여성
웹툰 몇 작품 돌아보다 새삼 느낀 클리셰가 걸려서 몇 자 끄적끄적.
네이버 웹툰 <유미의 세포들>에 등장하는 서새이
유미의 애인, 구웅의 여사친 겸 직장동료다.
친구 사이임을 빌미로 구웅에게 집적거리며 유미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구웅의 옆집으로 이사하는 등 상당히 적극적으로 유미와 구웅 사이를 방해함.
해당 웹툰 댓글란에서는 주로 새이년이라고 불린다.
같은 웹툰에 등장하는 루비
유미의 직장 후배. 유미가 호감을 품었던 직장 동료 우기를 좋아한다.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짜증날만큼 무리한 애교를 구사한다.
우기에게서 유미를 떼어내기 위해 태연하게 얄미운 말만 골라하여 초반부 얄미움을 하드캐리.
역시 당시에는 댓글란에서 루비년으로 불렸다.
최근 우연히 만난 서새이도 우기를 좋아한다고 착각,
유미에게 끌었던 어그로를 새이에게 시전하자 댓글란 평가가 역전했다.
다음 웹툰 <살아 말아>에 등장하는 정혜 (가명: 소유)
소원 동전의 힘으로 청소년이 된 노부부, 육갑/청순과 악연으로 얽힌 인물.
첩 소생으로 육갑의 결혼 전 연인이었다.
육갑이 청순과 갑작스럽게 결혼하자 떳떳하게 살 수 없는 자신의 출신을 비관하고 사라진다.
현재 역시 소원동전의 힘으로 어려져 새 신분을 만들고 모델로 활동 중.
육갑/청순에 대해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
위 세 캐릭터는 네이버, 다음에서 연재 중인 웹툰 두 편에 나오는 여성 조연 들이다. 이들을 뭐라고 해야 할까. 막장드라마에서 온갖 범죄를 불사하는 악녀들에 비하면 소소한 수준들이니 악녀라고까지는 못하겠고... 여주인공의 적인 여성 조연이니 줄여서 여적여라고 해둘까?
이들 세 여적여들은 스타일도, 행동 방식도, 동기도 상당히 유사하다. 그렇다고 이들이 몰개성한 캐릭터라는 건 아니다. 작품에서 충분히 개성을 묘사해주기 때문에 오히려 공통점도 두드러진달까.
새이의 본심 _ 웅이에게 보이는 모습
<살아말아>의 정혜는 '평범한 여자아이'에게는 숭배의 대상이다. 남들 앞에서의 이미지 관리
청순 앞에서 드러내는 본심
여적여들을 묘사할 때 강조되는 이중성
관리 꽤 힘들 긴 머리카락, 청순하냐 귀엽냐 세련되었느냐 차이는 있으나 어쨌든 여주인공에 비해 강조되는 '여성미'. 교묘한 화술과 이중적 태도, 여주인공에게서 남자를 '빼앗거나' 내가 가지지 못한다면 '망가뜨리겠다는' 목표의식... 이들 여적여에 비해 순수하고 담백한 여주인공은 항상 이들에게 당해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녀의 순수함과 진실성이 결국은 승리한다. 여적여는 결국 여적여일뿐 남주인공을 차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실 이런 설정은 굳이 이 웹툰들을 끌어오지 않아도 충분히 익숙하고 지루한 클리셰다. 우리는 이미 아침 저녁 드라마에서, 소설에서, 영화에서, 만화에서 이런 여적여들을 무수히 많이 만났다. 여적여는 여성, 특히 여성의 연애를 다루는 작품이라면 쉽게 등장한다. 이들의 비행은 관객을 빠르게 몰입시키고 마침내 몰락하면서 작품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준다. 이들이 실패하면서 자연히 작품의 권선징악도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언급한 두 작품 모두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았고, 특히 <살아말아>의 경우 아직 정혜의 계획이 다 드러나지 않았기에 이후 진행에 대해 단언할 수 없다.)
확실히 이 여적여들은 얄밉다. 이들이 얼른, 콱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들이 정말 나쁜 년일까? 이들의 공통 특성을 곱씹다보니 좀 우스운 것이다. 여성미 넘치는 외모에 적절히 구사하는 애교, 상대를 거스르지 않는 '현명한' 화술. 이거 다 흔히 가부장제에서 강요하는 '여성의 미덕' 아냐? 얘네는 그런 미덕 기준으로 볼 때 오히려 아주 훌륭한 여성 아니냐고. 어딜 가나 남자들의 기준에 부합하는 완벽한 여성.
왜 클리셰는 이 훌륭한 여성들을 여자의 적으로 설정하는 것일까? 왜 클리셰는 이 여성들의 미덕이 가식이며 기만이라면서 끊임없이 순수한 주인공을 통해 이들을 단죄하는 것일까?
이 '여적여' 혐오가 정말 여성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저런 여성이 실제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저런 여성이 정말 '순수한 여주인공 = 나'에게 해를 끼치는가? 우리는 정말 저런 여성을 싫어하는가?
언제까지 여적여 공식으로 여성 서사를 만들어야 하는가?
이들 여적여들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 세계관에 들어맞는 캐릭터인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이들이 저런 여우짓을 하는 이유, 이들의 성격이 비비 꼬인 이유가 뭘까? 가난해서? 재능이 부족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친구에게 배신 당해서?
아니다. 작중 묘사상 이들의 성격이 꼬인 건 '남자와의 사랑에 실패' 했기 때문이다.
<유미의 세포들> 22화
과거 순수했던 루비는 애인에게 버림 받으면서 '여배우 세포'를 만들고 빙그레썅년으로 거듭난다.
서새이의 심리 상태에 대한 묘사는 더욱 난감하다.
<유미의 세포들> 76화
분명 서새이의 사랑세포는 일을 사랑한다. 그런데도 그녀가 미련은 남았을 망정 오랜 친구 사이인 구웅의 연애를 방해하는 이유는 단 하나, 원하는 건 모두 갖겠다는 감성 세포의 폭주 때문이다.
감성세포가 왜 저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도 없다. 구웅에게 내심 기대며 제 것이라 여기고있었는데 구웅이 애인을 사귀게 되니 외로움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는 것 정도? 다른 인물의 감정 세포가 모두 저렇지는 않다는 것도 포인트. 작중 설정 감성세포는 다 저런 성격이라는 설명도 불가능 하다.
<살아말아> 18화
<살아말아>의 정혜는 <유미의 세포들>의 여적여들보다는 훨씬 복잡한 존재다. 그녀는 남자의 노리개가 되어 창창하던 인생을 망치고 하나 있는 딸에게 푸념을 퍼붇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리고 그런 자신 안에 어머니의 삶의 방식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다. 정혜가 저항해도 세상은 정혜 어머니가 사는 방식 이외는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절망이 정혜를 누르고 있다.
또한 정혜는 육갑과 맺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육갑이 할아버지(가부장)의 갑작스러운 명령' 때문이며 '첩의 딸인 자신은 절대로 손자 며느리 감이 못 된다는 걸' 매우 뚜렷이 인식하고 있다. 정혜의 비뚤어짐은 갑작스러운 실연과 절망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아무리 순수한 마음을 품고 있어도 그녀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 청순이 가부장제의 며느리로 60년간 희생 당했다면 정혜는 그 며느리조차 되지 못하는 여자로 배척당해왔다.
정혜는 입장 자각과 객관화 면에서 여주인공 청순보다 훨씬 뛰어난 캐릭터다. 개인적으로 로맨스 코미디라는 장르 한계에서 정혜의 자각과 복수를 얼만큼 표현해줄지 기대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들 여적여들이 비뚤어지는 결정적 이유가 남성들 (가부장제, 이성애 연애관 상)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격 변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남자라니. 로맨스 장르라는 점을 감안해도 다분히 남성 중심적 설명방식 아닌가? 여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중심에는 남성이 있다.
얼마 전 지인에게 순정 만화의 핵심은 이성애 로맨스가 아니라 여성 성장 서사가 아닐까 이야기 했다. 로맨스는 다양한 여성 성장 서사의 한 방식일 뿐인데, 다만 여성에게 허락된 서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로맨스가 메인인 걸로 보이는 것 뿐인 것 같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여성에게 로맨스가 허락되는 건 여성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키는 남주인공이 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성의 이야기임에도 이미 가부장 남성 세계의 법칙을 받아들이기에 여주인공의 적에게도 그대로 남성의 시각이 투영되는 게 아닐까. 1.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여자들이 질투할 것이라는 전제. 2. 남성에게 거짓을 꾸미거나 남성을 위협하는 여성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남성을 사랑하는 여성이 선택받을 거라는 약속.
이런 법칙을 받아들이고 서사를 만든다면 확실히 여적여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다. 여성은 끊임없이 '아름다운 여자'가 되기를 강요 당하면서 동시에 그런 여자를 경계 하도록 가르침 받는다. 지금도 여적여 클리셰는 수없이 재생산되고 변주된다. 사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풀려면 웹툰을 가져올 게 아니라 드라마 세계로 들어가는 게 훨씬 나을 거다. 지상파 3사 아침드라마 비교라거나... 아마 관련해서 이미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고...
어쨌든 이미 있는 클리셰를 쓸 거라면 좀 더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클리셰를 이용하기를 바란다. 다양한 여적여가 아니라, 여적여를 쓰는 이유가 다양해지기를 바란다. 클리셰를 이용해 클리셰를 만든 법칙을 공격하는 이야기가 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는 여성 서사에서 여적여보다 훨씬 재미있고, 다양하고, 효과적인 도구가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여성 캐릭터를 여주인공과 악녀로 양분하는 낙인이 사라진다면, 한 여자를 여자와 _ 그 여자의 적으로 나누는 짓을 멈춘다면. 온전히 한 몸으로 표현되는 여성 개개인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진행될지 나는 너무 기대되는데.
글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ㄹ님이 기교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살아있는 글이란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등을 물어왔는데 답 다운 답을 못 했다. 지금 내 수준에서 답하려면 한없이 자잘해지거나 한없이 커져서 무의미한 답만 나올 것 같았음. 무의미한 답만 나올 거 같아서 무의미한 답을 함. 그리고 자갈자갈하게 부끄러워졌다.
대학원 내내 공부 제대로 안했고, 전공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그리 크지 않으며, 논문 끝낸 후 한 번도 관련 책을 안 읽어서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난다는 건 조금 부끄럽고 말 일이지만, (내가 내 돈 주고 대충 살았는데 뭐 어쩔텐가.) 나는 이렇게 쓴다 라고 말하지 못한 건 답답했다. 왜 아직도 모르는 거야? 왜 아직도 모르는 채로 있는 거야? 왜 알려고 이런 저런 걸 진작 해보지 않은 거야? 왜 지금 바로안 하는 거야? 이게 안 중요한 일인가?
나한테 중요한 일이 뭘까? 하고 싶은 게 뭘까? 솔직히 요즘은 글에도 별 생각이 없다. 난 애초에 글을 쓰고 싶긴 했던 걸까 싶다. 하면 즐거워서 좋아하지만, 그냥 즐거워서 좋았을 뿐이다. 그게 다다. 요즘처럼 뭔가를 즐기기 힘들 때, 점점 즐기기 힘들어져 가는 세상에서 무슨 동기며 동력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즐거움' 그 자체만을 즐기기에는 겁도 많고 욕심도 많다. 일 하는 중이나 마친 후에는 재미있었다는 것만으로 너무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착수할 때는 그 이상을 원한다. 그냥 재미있었다는 것만으로는 안돼.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해. 더 얻는 게 있어야 해.
뭐 떠나서, 글을 안 쓰고 있으니 글을 쓰고 싶긴 했던 걸까 헷갈리는 거다. 다른 거창한 이유 필요 없고, 글을 너무 오래 안 써서 글 쓸 마음이 안나는 것이다. 안 쓰는데 어떻게 동기를 얻어. 안 쓰는데 어떻게 글에 대해 알 수 있겠어. 안 쓰는 데 누가 날 글 쓰는 사람으로 기억해. 다 그런 거지.
그러니까 다음 글이나 쓰자. 일단 저번 글보다 덜 딱딱하고 좀 더 알아먹기 쉽게 쓰는 것으로. ㅇㅇ.
글
허균 <노객부원>
노객부원(老客婦怨)-허균(許筠)
늙은 떠돌이 아낙의 원망-허균(許筠)
東州城西寒日曛(동주성서한일훈) : 동주 성 서쪽, 싸늘한 해도 저무는데
寶蓋山高帶夕雲(보개산고대석운) : 우뚝한 보개산에 저녁 구름 걸려있구나
皤然老嫗衣藍縷(파연로구의남루) : 흰 머리의 늙은 할미가 다 떨어진 옷을 입고서
迎客出屋開柴戶(영객출옥개시호) : 사립문 열고 나와 나그네를 맞아주네.
自言京城老客婦(자언경성로객부) : 스스로 말하길, 서울에서 여지껏 살다가
流離破産依客土(류리파산의객토) : 가족들 다 흩어지고 타향땅에 묻혀 산다오.
頃者倭奴陷洛陽(경자왜노함락양) : 지난번 왜놈들이 한양성을 무너뜨릴 때
提携一子隨姑郞(제휴일자수고랑) : 외아들 손에 잡고 시어머니와 남편 따라
重跡百舍竄窮谷(중적백사찬궁곡) : 먼 길 오며 부르튼 발로 깊은 골짜기에 숨어
夜出求食晝潛伏(야출구식주잠복) : 밤에 나와 밥을 빌고 낮에는 엎드려 있었소.
姑老得病郞負行(고로득병랑부행) : 시모 늙어 병을 얻어 낭군이 업어서 걷고
蹠穿崢山不遑息(척천쟁산불황식) : 험한 산에 접어들면 쉴 겨를이 없었지요
是時天雨夜深黑(시시천우야심흑) : 하늘에선 비까지 내리고 밤은 더욱 캄캄하니
坑滑足酸顚不測(갱활족산전불측) : 웅덩이는 미끄럽고 다리지쳐 발 옮길 곳도 없었소.
揮刀二賊從何來(휘도이적종하래) : 칼 휘두르는 두 왜적은 어디서 왔는지
闖暗躡蹤如相猜(틈암섭종여상시) : 어둠 속에 머리 내밀며 서로 다투어 뒤를 밟아
怒刃劈脰脰四裂(노인벽두두사렬) : 성난 칼날 목을 갈라서 네 조각을 내버리니
子母倂命流冤血(자모병명류원혈) : 어미와 아들 함께 죽어 원통한 피를 흘렸다오.
我挈幼兒伏林藪(아설유아복림수) : 나는 어린 아들을 이끌고서 숲속에 숨었는데
兒啼賊覺驅將去(아제적각구장거) : 아이 울음에 들켜 잡혀가고 말았으니
只餘一身脫虎口(지여일신탈호구) : 내 한 몸 겨우 남아 호랑이 아가리 벗어났지만
蒼黃不敢高聲語(창황불감고성어) : 허둥지둥 경황없어 소리 높여 말도 할 수 없었소.
明朝來視二骸遺(명조래시이해유) : 날이 밝아서야 가보니 두 시체 남아 있는데
不辨姑屍與郞屍(불변고시여랑시) : 시모의 시신인지 남편의 시신인지 가려낼 수 없었다오
烏鳶啄腸狗嚙骼(오연탁장구교격) : 까마귀와 솔개가 창자 쪼고, 개들이 뼈를 씹는데
虆梩欲掩憑伊誰(라리욕엄빙이수) : 들것과 가래로 덮으려고 했지만 부탁할 사람 누가 있을까
辛勤掘得三尺窞(신근굴득삼척담) : 애 써서 간신히 석 자 깊이 구덩이를 파고
手拾殘骨閉幽坎(수습잔골폐유감) : 남은 뼈 손수 거두어 봉토하고 나니
煢煢隻影終何歸(경경척영종하귀) : 의지 할 곳 없는 외그림자 끝내는 어디로 돌아갈까
隣婦哀憐許相依(린부애련허상의) : 이웃 아낙 가여워하여 서로 의지하자 하더군요
遂從店裏躬井臼(수종점리궁정구) : 주막에 얹혀 살며 물 긷기와 절구질
餽以殘飯衣弊衣(궤이잔반의폐의) : 남은 밥찌질 먹고 다 떨어진 옷 입었다오.
勞筋煎慮十二年(로근전려십이년) : 고단한 생활로 속태우기 십이년
面黧髮禿腰脚頑(면려발독요각완) : 얼굴은 검어지고, 머리는 듬성, 허리도 다리도 뻐근한데
近者京城消息傳(근자경성소식전) : 근자에 서울 소식 드문드문 들으니
孤兒賊中幸生還(고아적중행생환) : 부모 잃었던 아들놈이 적중에서 요행히 살아왔다더군요.
投入宮家作蒼頭(투입궁가작창두) : 대궐에 투숙하여 창두가 되었다 하오.
餘帛在笥囷倉稠(여백재사균창조) : 옷장에는 비단이 남아돌고 창고에는 곡식 가득하니
娶婦作舍生計足(취부작사생계족) : 장가들고 집 마련하여 생계가 풍족하다 하나
不念阿孃客他州(불념아양객타주) : 타향에서 떠돌이하는 제 어미쯤은 잊은 게지요.
生兒成長不得力(생아성장불득력) : 아들을 낳아 성장했으나 그 덕을 보지는 못하오.
念之中宵涕橫臆(념지중소체횡억) : 한밤중에도 생각할수록 뺨에 눈물이 흘러내린다오.
我形已瘁兒已壯(아형이췌아이장) : 내 꼴은 벌써 시들었고 아들은 이미 장년이 되었으니
縱使相逢詎相識(종사상봉거상식) : 비록 만나더라도 알아볼 리 있을까.
老身溝壑不足言(로신구학불족언) : 늙은 내 몸 구렁에 버려지는 건 더 말할 나위 없거니
安得汝酒澆父墳(안득여주요부분) : 어찌하면 네 술이라도 얻어 아비 묘에 부어볼 수 있을까.
嗚呼何代無亂離(오호하대무란리) : 아 슬프구나, 어느 시대인들 난리야 없었으랴만,
未若妾身之抱冤(미약첩신지포원) : 이 못난 여편네처럼 원통하기는 처음일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