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나츠메 소세키

Swimming/BOOKS 2011. 9. 28. 14:33

일본 소설 싫어 싫어 노래를 부르지만, 아니 노래를 부르기에 더욱 더 일본에 대해 무지하다. 바로 옆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되도록 관심을 두고 싶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골치 썩이고 싶지 않은 거지. 일본의 제국주의는 나빠. 일본의 몰염치한 역사관은 나빠. 국가로서의 일본과 일본에 사는 사람 하나 하나를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 죽이네 살리네하는 사람들도 한심해.(어째서 일본 혐한이랑 노는 방식이 똑같냐? 그래. 걔네랑 파이트떠서 이기면 그게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냐?) 그렇다고 아무 생각없이 재미있으면 장땡이라는 애들도 웃기고.(특히 역사적으로 무개념한 작품을 아무 생각없이 핥는 애들 보면 딱하고 안쓰럽지) 사실 혐일이나 일본숭배자나 둘 다 역사적으로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잖아.

게다가 소설이 하도 대세라길래 몇개 집어 읽어보긴 했는데 딱 '그래서 어쩌라고' 이상 할 말이 없네. 번역체는 마음에 들지 않고 더욱이 일본 소설 저변에 깔려 있는 분위기를 납득하지 못하겠고. 아. 이 나라, 아니 이 집단 이상해. 

 그렇다고 이렇게 말하는 내 자신이 편견에서 자유로운가 하면 그럴 리가 있냐. 그래서 난 공평해지기 위해 가장 불공평한 자세를 취한다. 이 반찬은 너무 쓰네 짜네 다네 따지기 귀찮으니 아예 밥상에 올리지 않는, 이런걸 간단히 두 글자로 말하면 '편견'이라고 한다. 그 편견을 수 년간 유지한다. 



그러다 스터디에서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읽기로 한 김에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들었다가 아주 제대로 낚였다. 일단 너무 재밌다. 100년 전 글이라 템포가 가끔 아니 대체 왜 이래 싶게 느려질 때가 있는데 (가뜩이나 만담 늘어놓는 글이라) 그런데도 재미있다. 요즘 작가들의 어지간한 의뭉은 명함도 못 내밀겠다. 우왕.ㅇ<-< 게다가 지금까지 접했던 일본 작품들처럼 이게 일본발이란 걸 스루할 수 있거나 일본발의 한계라며 거식할 것 없이, 100년 전 일본이라는 걸 그냥 쭉 읽어나갈 수 있었다는 게 나한텐 꽤 충격이었음. 

제국주의고 러일전쟁이고 중일전쟁이고 한일합방이고 간에, 아무튼 거기에도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거다. 그것도 도저히 우리나라의 근대와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형태로. 뭐. 식민지가 되었으니 당연한 거지만, 문학사를 읽으며 그래 문예사조고 철학용어고 할 거 없이 받았더랬지 애초에 일본어로 번역된 걸 중역해서 들여오니까, 당장 이상만 해도 일본 누구 누구 영향 엄청 받았더랬고... 딱 거기까지가 내 세계관 속 근대 일본의 전부였다. 그 이상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이게 구첩 반상에 나물 반찬 하나 정도 비중이 아니었던 거지.

어차피 요새는 1900년대 초중부를 훑고 있으니 좀 더 각잡고 읽어보자고 마음 먹게 되었음. 그래도 여전히 일본 최근 소설은 마음에 안 들지만...

19세기, 20세기 초 인사들 글을 읽으며 그들의 입담이 지금 현재에도 유효, 아니 오히려 현재에 더 절실하다고 느낄 때마다 참 아득해진다. 그런 한편 어쩐지 안심이 되기도 하고. 요즘 세상이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붕 뜬 존재는 아니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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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싸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딱 무시하는 것이 안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무릇 대책이 없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법이다. 세상을 돌아봐도 그렇다. 어제 시집온 신부가 오늘 죽지 말란 보장이 전혀 없는데, 신랑은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행복하게 살자는 둥 좋은 말만 늘어놓을 뿐 걱정하는 기색이 없다. 걱정하지 않는 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걱정해 봐야 아무런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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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요즘 사람들은 자기와 타인의 이해관계에 깊은 골이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말일세. 그런 자각심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하루하루 예민해지기 때문에 결국은 일거수일투족조차 자연스럽게, 마음대로 할 수 없어졌다는 걸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라는 사람이 스티븐슨을 평하기를, 그는 방에서 거울 앞을 지날 때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정도로 한시도 자신을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추세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지. 눈을 감아도 나, 눈을 떠도 나, 이 나란 것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도처에 따라다니니까 인간의 행동거지가 인위적이고 좀스러워진 거야. 스스로도 답답하고, 세상도 숨이 턱 막히고 아침부터 밤까지 맞선을 보는 남녀 같은 심정으로 지내야 하는 거야. 유유자적이니 느긋함이니 하는 말은 글자는 있어도 의미는 없는 말이 되고 말았지. 그런 점에서 요즘 사람들이 탐정 같고 도둑놈 같다는 걸세. 탐정이란 직업은 남의 눈을 속이는 한이 있어도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장사니까, 특히 자각심이 강하지 않으면 안 되지. 요즘 사람들은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자기에게 이득이 되고 어떻게 하면 손해가 되는지를 생각하니까. 탐정과 마찬가지로 자각심이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지.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두리번두리번, 우왕좌왕,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한시도 안심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사람의 마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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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이라! 예술 역시 부부와 같은 운명으로 귀결될 것이야. 개성의 발전이란 개성의 자유를 뜻하지 않는가. 개성의 자유는 즉 나는 나, 너는 너라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 예술이 존재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예술이 번창하려면 예술가와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 사이에 개성의 일치가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자네가 아무리 신체시를 짓는 시인이라고 목청 돋우어 봐야 자네 시를 읽고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딱한 일이지만 자네 시의 독자는 자네밖에 없는 셈이지 않은가. ...

  사람들이 저마다 특별한 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타인이 지은 시 따위는 재미있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실제로 지금도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네. 작금의 영국 소설가가 가운데 작품에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메리디스를 보게나. 제임스를 보게나. 읽는 이들이 지극히 적지 않은가. 적을 수밖에. 그런 작품은 그런 개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는 읽어도 재미있찌 않으니 어쩔 수 없지...

  그렇지 않은가. 자네가 쓴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쓴 것은 자네가 이해하지 못하는데, 자네와 나 사이에 예술이고 뭐고 있을 수 없지 않은가. ...

  아무튼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개성을 허용하면 그만큼 인간관계가 답답해진다는 것은 틀림없네. 니체가 초인을 내세운 것도 그 답답함을 해소할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런 철학으로 변형시켰기 때문이지. 자칫 그 사상이 니체의 이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이상이 아니라 불평이야.... 그 목소리는 용맹하게 정진하는 목소리가 아니야. 원한에 차 통분하는 목소리지. 

.. 옛날에는 공자가 딱 한 명 뿐이었으니까 공자 혼자서 활개를 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공자가 여럿이야. 아니 어쩌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공자인지도 모르지. 그러니 나는 공자요, 하고 거들먹거려 봐야 먹히질 않아. 먹히지 않으니 불만이 생기고, 불만이 불거지니까 책 속에다 초인 따위를 휘두르게 된 거야. 우리는 자유를 원했고, 그리고 자유를 얻었어. 그런데 자유를 얻고 보니까 상대적으로 부자유를 의식하게 되엇으니, 난감한 일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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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죽는다. 죽어 이 평온함을 얻는다. 
평온함은 죽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기쁘고 기쁜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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