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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21 생각 나열
- 2013.01.18 최인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중
- 2012.12.26 아주 나태한 방식
- 2012.03.17 나는 왜 쓰는가
- 2012.03.17 전체주의 시대
- 2012.02.11 2주일 격 고민 코스 반 주행 -
- 2012.02.05 글쓰기 만보-안정효 중
- 2012.02.01 가라타니 고진 - 근대 문학의 종언 - 메모
- 2011.10.20 예술과 문화이론. 가상과 현실. 축
- 2011.09.14 버트란드 러셀 런던통신 1931~1935
글
생각 나열
술 한 모금 없이 주정 폭발
문학이 다른 장르 창작자들에게 별 메리트를 끌지 못한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전문화로 인한 내부로의 매몰때문일 것이다. 글쓰기가 전문화 되다보니 작가도 이미 전문가라는 높은 담벼락 위로 올라가 버리거든. 작가 자신이 이미 전문가만 즐길 수 있는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하니까, 이외의 사람은 즐길 수 없는 거다. 이건 사소설이라는 장르와는 또 다른 문제. 넵. 간단히 말해서 누가 자기 얘기만 해대는 사람 얘기를 재미있게 들어주냐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얘기를 제일 좋아합니다. 근데 이놈의 작가 놈들은 순 지들 얘기만 하지 듣는 사람 얘기는 해주질 않아요. 이러니 싸이일기, 자위소설 소리 듣지.
어떤 형식의 글이 흥하든 흥한 이유는 독자들이 그걸 자기 얘기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일거다. 어느 인문학이든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매우 중시하는 것도 그때문.(안 그럼 무의미 지적놀음의 섬 안에 갇히고 그럼 갇힌 나는 좋다 치더라도 현실과의 접점-빵이라든가-도 없겠죠ㅋㅋㅋ) (본격문학을 지향하는) 문예창작과에서도 그래서 항상 현실을 중시하신다. 조금만 환상성이 들어가도검열의 쌍심지를 활활 불태우심. 그런데 웃긴 건 이 본격문학에서 다루는 현실은 글쓰는 작가들의 현실일 뿐이란 거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작품성을 추구해도 기교가 될뿐이다.
90년대 이후 소설에 환상적 요소가 점령하기 시작했다느니, 장르의 구분이 없어지고 있다느니 하는데 듣는 입장으로서는 좀 짜증남. 당신들이 인정하는 환상은 글쟁이의 내면심리-즉 글쟁이에게는 지극한 현실- 일 뿐이거든. 뭐가 장르 통합이야 하하하^^ㅗㅗㅗㅗ 얼어죽을?ㅗㅗㅗ 물론 모든 작업은 전문화 되는 게 당연한 거고, 작가의 자의식도 갈수록 예민해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양껏 망원경 개발해서 자기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다면 대체 그 망원경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작가가 자기 내면에 틀어박히는 건 직무유기다. 우리는 저 우주 바깥을 보기 위해 계속 날아오르지 않았나? 우리가 밤하늘 바깥에서 새 별을 찾아낼 때마다 우주가 더 넓어지는 거 아니었나?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곳에서 새 세상을 만들어내 선물해주는 게 우리 일이잖아?
글
최인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중
이 강산 흘러가는 피난민들아
사관과 사회 구조 - 지배 피지배 계급 연관성의 문제
아니지. 계몽주의적인 속단이야. 지배 계급을 독립인수로 보니깐 그래. 한 시대의 지배 계급이란 건 항상 그 시대읲 ㅣ지배 계급과의 상관관계 속에 있잖아? 비록지배 계급의 손에 씌어진 역사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민중의 그림자가 있어.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라는 두 개의 변수가 작용하는 장의 역학 관계를 다만 어느 한쪽의 입장에서 기록했다는 것뿐이지. 그러니까 민중은 늘 새롭고 지배 계급만 몰락한다, 하는 이론은 일면적이야.
한 시대의 지배 계급이 망할 때 그 시대의민중도 망하는 거야. 그 시대의 장 속의 한 변수가망한다는 것은 그 장의 역학 관계가 일단 무너진다는 것,그러니까 하이픈의 다른 쪽 항도망한다는 것을 의미해.왜 소설 같은 데, 시대가 변했는데도 옛 주종 관계에서벗어나지 못하는 피지배 계급의 인간상이나오잖아? tv 같은 데 나오는 퇴락한 권문에 충성을 지키는 충복이라는 타입 말이야. 그의 주인이 망했을때 그의 노예도 망한 거야. 인제 주종의 의미가 명분에 닿지 않는데 충성을 주고받는 건 피차가 타락한 거지. 그래서 그충복의 아들은 그걸 못마땅해하고, 아들은 새 윤리에 따라 주인을 거부하지 않아. 주인이 아닌 것을 주인이 아니라고 인지한단 말이야. 아들이 주인을 거부할 때 주인만 거부하는 건가? 주인의 노예 - 즉 아버지도함께 거부하는 거야. 主-奴라는 사이클 전체를 거부하는 거지. 주만을 거부하는 게 아니야. 이때의아들은 그 奴의 생물학적 연속이 아니야. 그는 거듭 난 아들이지. 그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지. 시대의 아들, 새 가치 구조의 아들이란 말이야.
- 여기까지는 벚꽃동산ING-
그의 아버지는 생명, 하느님, 天, 理性 - 그런 것이겠지. 생물학적 외양에 혼돈돼서 奴로서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민중의 영원 무구성, 동정성 숭배가 나온단 말이야. 혁명 문학에서의민중은 생물학적 용어가 아니야. 그건 상징기호야. 이걸혼동하는 데서 민중의 우선과 책임 회피가 생겨 가짜 혁명가와 출세주의자들이 그걸 이용하지. 아첨한단 말이야. 지배 계급이망할 때 민중도 망해야 해. 옛날 부족들은 망할 때면 멸종이 되지 않았어? 그것이 진정한 망함의 형식이야. 문명한 사회에서는분업 구조상 지배 계급의 그것도 상위층만 명실공히 망하지만, 폭군을 눈감아준 민중도 그때 마음속으로라도 망해야 해.육신은비록 살았더라도. 폭군이 목이 떨어질 때 제 목덜미에도 칼날 같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돼.
새 시대는 폐허 위에 오는 거야. 살아 남은 사람은 어제의 자기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어제의 자기가 가졌던 기득권을 주장해서는 안되는 거야. 폐허 위에 감도는 부끄러움의 안개 속에서 새 삶읆 찾아야 하는 거지. 혁명 후의 정치가 미신적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야. 민중을 천사처럼 찬양하고 가치의 상징으로서의 민중을 풍속으로서의 민중과 바꿔치는 데서 오는 기만이란 말이야.
명분은 그렇더라도 정치는 현시링니깐, 혁명 후에도 민중은 재교육되고, 징계되고, 숙청돼야 하는 거야. 그걸 모두 민중의이름으로 하거든. 구십구 명의 민중을 숙청하면서도 민중의 이름으로 하거든. 민중은 한 사람만 남지. 그가 독재자야. 어디가 잘못됐나. 그의 논리가 잘못된 거야. 혁명이란 너- 나의 어떤 상황을 한 묶음으로 거부하고 다른 수준의 너-나의 상황을 선택하는 일이지, 너만을 거부하고 그 너와 연결됐던 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방법적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데서 민중의 이름으로 민중을 처단하게 되는 거지. 민중은, 내가 동의한 적이 없는데 왜 내 이름으로 내가 처단되는지 몰라 어리둥절하고나중에는 원망하게 되는 거야. 무엇이 잘못됐나. 민중이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 - 그게 독재자의 잘못이지. 민종의 동정이 깨질까봐.
- 가만 있어. 그 이론하고는 조금 달리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자네는 노예인 우리 가운데서 주인의 곁에서 시중드는 노예, 거리를 다니는 노예, 그것만 보는 거야. 보이지 않는 우리도 있지. 자네 이론은 민중도, 비굴한 민중도 부정돼야 한다는 것인데, 감옥 속에 있는 노예는 누군가? 민중 아닌가? 자네 이론은 폭군의눈으로 본 민중을 나로 받아들인 거야. 그런 나 아닌 나가 감옥 속에 있어. (...) 이 점을 생각 안 했으니 자네 이론에서는 왕의 목을 누가 자르느냐가 분명치 않았어.
홍콩 부기우기
예술의 존재 방식에 대한 고찰 - 평등한 식구로서의 공존
활자가 끝나고, 영상이 시작하는 게 아니라, 활자와 영상이 공존하게 된다고 봐.문명의 발전은 흥망이라는 모델에서 축적, 쌓인다는 모습으로- 그러니까 각 시대마다의 문화가 소멸하지 않고 지층 모양으로 겹친다고보는 거야. 나무의 나이테처럼. 지금까지는 밑에 있는 층이나 안쪽에 있는 테는 그것으로 응고해 다만 존재할 뿐이었지. 정신분석의 공적은 이 기층부분의 존재를 확인한 것잉겠지.
확인보다 그 기층이 현재에도 기능한다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현재에 가능할 때는 이미 승화라는 다른 형태로 그렇게 한다는 게 아닌가. 진보, 진화론이지. 그러니까 기층이 존재한다는 건 그야말로 기층으로서 바위 같은 걸로, 화석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의식의 경우에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말이야.
그래서.
그러나 앞으로는 문명의 각층은 눌린 밑에 있는 것은 응고하고 윗부분이 혼자 호흡한다는 형식이 아니라 모든 층이 동시에 현재의 기능을 가지게 된다고 보는 거야.
동시에?
그렇지. 말하자면 원시 예술은 과거로서가 아니라 아니라 현재의 그 부분으로서 생활 속에 부활된단 말이지.
취미로서?
현재까진 취미라고 부르는 게 옳았지. 그러나 앞으로는 취미와 일느바 노동의 경계까 자꾸희미해진다고 해야 할 거야. 그렇게 되면 현재까지는 인간의 생활력이 모자라서 화석으로서만 있었던 부분들이 그 자체의한계 안에서 다시 분화되고발전하게 되지.
좀 어렵군.
어렵지 않아. ㅁ누학얘기로 돌아가면, 문학이 시대적 사명의 한계에도달했달 때는 문학이라는 것을 현재까지의 모습을 지닌 채 변화에 대처시키려고 하니까 그렇게 돼. 그러나 현재까지의 문학은 가능성의 일부라고 보자는 것이 내 생각이거든. 사진이 발명되었다고 해서 미술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누학도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더 분화될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영상 시대라는 것이 전달하려는 내용을 활자의 테두리 안에서 하자는, 활자 문화의 적응력을 높이는 것 그것이 진실한 뜻에서 동시성의 문명이 아닌가? 모든 매체가 동시에 작용하는 문명- 그런 포괄적 판단력, 진보라는 이름 밑에 엄청난 낭비를 하지 않는 문명, 최첨단뿐 아니라, 최하층까지도 생존이 허락돼가고 각기의 기능이 서로 불가결하다는 것이 인식되는 그런 문명.
가만 있자, 그러면 현재의 지구상의 형편이 바로 그런 상태 아닌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공존하는 상태, 그리고 지금까지도 역사는 그런 식이 아니었나말이야.
그렇기는 하지. 현재까지는 그런 차이는 문명-야만, 선진-후진, 이라는 상태로서 그렇게 도니 것이지만 앞으로는그것들이 우열의 차이로서가 아니라 개성의 차이로서 존재한단 말일세.
(...)
또 예를 들어볼까? 육상 경기에서 달리는 사람마다 칸이 나누어져 있지 앟아. 각자의 칸 속에서 속도를 겨루는 것이지. 혼자서 경주하면 트랙이한 개로 족하지만 복수가 동시에 같ㅇ느 공간에서 달리기 위해서는 그 공간은 저마다 편차를 가져야 한다 이거야. 나는 이 구성이미래 사회의 모델이라고 생각해. 문명의 역사에는 새 주자가 나올 대마다 테가 하나씩 보태지는것인데 그렇다고 기왕의주자가 퇴장하는 건 아니야.
그 이론은 전통 예술의 기능에 대한 설명으로는 좋겠군.
다만 지금까지 생각하듯이 소극적인 의미, 말하자면 현재의 더부살이로 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식구로서 과거가 현재와 동거한단 말이지.
상당히 종말론적인 이야기군?
종말론이라니?
미래의 어느 시기에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해서 한 광장에 모인다는 게 종말론 아니야? 자네 말은 그 시기가 어느 특별한 때ㅏ 아니고,보통 삶이 그렇게 된다는것으로 탈바꿈한거지. 그러니까 과거는 죽지 않는다는 이난의 영생론일세 그려.
연극론
연극은 제일 실물 크기의 예술이겠지?
그렇지, 삶의.
아무리 실물 크기라도 역시 압축이나 생략이 있어야 하는데, 압축량이 너무 많아버리면 실물이라는 효과를 낼 수 없잖은가?
무용이 돼버리든지 그렇게 되지.
동작은 무용이 되고, 대사는 음악이 되고 말이야.
그래서 아예 그런 작품을 쓰고 싶다는 말인가?
소설에서 이놈의 진짜 비슷하게 써야 한다느 소리가 신물이 날 지경인데 연극에서도 또 그 놈을 쓰자고 하니 짜증이 나더군.
(...)
추상연극을 택하지 안흔다면 갈 길이 없어지고 말아.
구상연극은 우리 경우에는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어. 그리고 우리 단계에는 그런 기초 위에서 추상연극이 공존하는 단계를 맞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게 내 의견이야.
그런 경우에는, 특히 연극인 경우에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한 것 같아.
조건이야 많지.
그 나라의 토착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살아서, 풍속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지.
이데올로기라니?
유럽 사회에서의 기독교 같은 것이지.
(...)
연극은 인생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에서는 소설이나 같겠지만, 사실주의 연극의 경우에는 무대에 나온 인물이 현실 속에서도 곧 연상이 될 수 있어야 해. 그런데 현재 우리 국민 생활에는 종교의 얼굴은 사라지고 말았고, 정치적 이슈는 금지되고 있지 않아? 적어도 연극적일 만한 이슈는 말이야. 연극이 연극답자면, 진실로 연극이 융성하려면 연구나 기술 같은 건 뒷전에 와도 돼. 자유, 정치적 자유만 있다면 연극은 오늘날에도 대번에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국민적 기 반을 가진 정치 세력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회라면, 그런 세력의 정신적 활력을 대변하는 매체로서 연극은 가능하지. 자존심도 없고 교양도 없는 지배 계급 아래에서는 연극은 불가능해. 기껏 연극보다 공개성과 직접성이 덜한 예술 - 그러니까 오락적일수록 좋지 - 그런 예술은 연명하겠지.
그렇다는 전제하에서 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전제를 승인한다는 건 아니어야지. 그 전제를 어떻게 바꾸는가, 바꿀 수 있겠는가를 질문하는 과정이 예술이어야 하지 않겠나?
전제가 없는 곳이 어디 있나?
없지. 그러나 전제라는 게 잠정적인 약속이 아니라, 어기면 곧 역적이 되는 하늘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거지.
알았어.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점심 사지.
구보씨는 문득 자기가 문화깡패 같은, 문화상이군인 같은, 문화문둥이 같다고 생각했다.여염집 여자에게 겁을 주는화류계 여자 같다고 생각했다. 제 몸에 상처를 내고 성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려워서 물러서는 그런 입장에 서는 것을 구보씨는 원치 않았다. 구보씨는 글 속에서는 그러한 무법자로 살되 실지 살림에서는 모가 나지 않는다기보다 당대의 가장 보수적인 생활자의 본보기 같은 삶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구보씨의 이런 마음가짐은 어찌 보면, 아니 어찌 보지 않아도 너무나 공상적이었다. 그러나 구보씨에게 물어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을 뿐더러 생각한 끝에 이르게 된 제일 땅을 디딘 사상이었다.
- 40년이 지났지만 70년대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는 않은 질문들. 과연 40년이 지난 후 우리가 쥐고 있는 문제는 그때와 얼마만큼 다른가? 얼마간 같다면, 어떻게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단 말인가?
글
아주 나태한 방식
생물이 가진 복잡성을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은 틀림없다.일단 어떤 복잡한 것을 전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즉 그 복잡한 DNA. 단백질 복제 기구를 전제한다면 그것이 더 복잡한 생물을 만드는 과정을 상상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DNA. 단백질 복제 기구와 같은 복잡한 것을 설계할 수 있는 창조주가 있다면 그 창조주도 최소한 그 복제 기구만큼이나 복잡할 것이다. 하물며 그가 기도를 들어주고 죄를 벌하는 따위의 고도의기능까지 추가로 가진다면 그는 훨씬 더 복잡한 존재일 것이다. 초자연적인 설계자로 DNA. 단백질 복제 기구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은 엄밀히 밝히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설계자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하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은 원래부터 있었다.' 따위의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런 나태한 방식을 버리고자 한다면 단지 'DNA가 원래부터 있었다.' 또는 '생명은 원래부터 있었다.'라고 말하면 된다.
기적. 우연의 일치. 불가능성. 엄청난 행운 따위에서 멀어질수록 그리고 그 엄청난 행운을 작은 행운의 연속으로잘게 쪼갤수록 설명은 더 합리적이고 만족스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장에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한 번의 사건이 얼마나 일어나기 힘든가. 얼마나 기적 같은가 하는것이다. 이론의 합리성을 유지하면서 생명의 기원에 관한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있는, 그리고 수전히 우연의일치로 발생하는, 오나전히기적에 가까운 가장 큰 단일 사건은 무엇인가? 원숭이가 우연히 'Methinks it is like weasel'을 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행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측정할 수 있는 양이다. 우리는 그 가능성이 대략 1040 분의 1이라고 계산했다. 아무도 그런 엄청난 숫자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그 정도의 가능성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비록 그 정도의 가능성을 마음속으로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여 도망쳐서는 안 된다. 1040이라는 숫자는 매우 큰 숫자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숫자를 종이 위에 적고 있다. 그리고 계산에 사용하고 있다. 사실 그보다 큰 숫자도 있지 않은가?
눈먼 시계공 리처드 도킨스
글
글
전체주의 시대
전체주의라는 말이 나오면 즉시 독일,러시아,이탈리아가 생각나지만,우리는 이런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퍼질 수 있다는 위험을 직시해야 한다. 자유 자본주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으며, 국가들은 그것을 편의대로 사회주의라고 부르든지 혹은 국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든지 차례대로 중앙집중적인 경제체제를 채택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개인의 경제적 자유와 더불어 개인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고, 자신의 일을 선택하고, 지구 어디라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자유는 이제 막을 내릴 것이다. 최근에 이런 현상들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경제적 자유가 사라지면 지적 자유에 대해서도 그만큼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항상 일종의 도덕화된 자유주의로 간주될 수 있다. -중략-예술은 자유 자본주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융성할 수 있을 것이며, 어쩌면 더 융성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예술가들은 더는 경제적 억압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관련 증거들이 불거져 나오고 있는 오늘 날, 이러한 생각은 극히 잘못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전체주의는 이전의 어떠한 시대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사고의 자유를 말살시키고 있다. 그런데 전체주의가 행하는 사고의 통제는 금지하는 측면뿐 아니라 강요하는 측면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고를 표현하는 것을 금지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를 지도하고,우리에게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행위 규범을 설정해 우리의 감정까지도 지배하려 한다. 전체주의는가능한 우리를 외부 세계로부터 차단시키며,어떤 비교 기준도 없는 인위적인 우주 속으로 우리를 가두어버린다. 어쨌든 전체주의국가는 국민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과 똑같이 그들의 사고와 감정까지도 완벽히 지배하려고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문학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해, 나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조지 오웰, 문학과 전체주의
193, 40년대나 2010년대나. 판도가 변하지 않는 한 위협도 변하지 않는다. 초반이냐 심화 단계냐, 예상이냐 현상이냐의 차이 뿐이지. 그때나 지금이나 당면 과제는 같다.
모든 거대한 억압에 대한 개인의 자유.
하지만 이 개인이란 게 뭔가. 개인이라는 틀 자체가 만들어내는 한계. 용인하는, 결국 '개인'이 아닌 인간에게서 '개인'만을 강조한 결과 만들어진 불균형. 방치했다기 보다는 조장했다고 볼 수 있음. 전체주의는 개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인가? 결과적으로는 나를 구하기 위해 모두를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으...으?'ㅠ'
아무튼 중요한 건 마르크스가, 프로이트와 오웰과 사르트르와 루카치가 말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우리는 모든 예견이 거의 굳건한 현실이 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종말은 예언의 끝에 온다. ㅇㅇ
글
2주일 격 고민 코스 반 주행 -
자유예술캠프에서 하는 [문학과 비판적 인문주의 Ⅲ : 전환의 시대, 인문정치의 모색] 강의를 듣고 있다. 강사는 이명원 교수님. 수강생은 스무명 정도. 주 3일 2주 진행 코스다. 이번 주 테마는 세대 담론과 가능성-세대 연합, 근대적 자기본위적 주체에서 사이 주체로 - 주체 인식 변화 시키기, 문화 예술의 역할 기능 변화와 제시 예술의 양식.
특히 오늘(아니 어제) 주제였던 문화 예술의 역할 변화는 강사님에게도 다른 주제보다 좀 더 전공 분야고, 나 역시 박터지게 고민하는 분야라 이전 두 강의보다 좀 더 빡세게 머리를 굴리며 들었다. 쿠릉 쿠릉. 두뇌 가속 업 업
오늘 다룬 테마는 representation에서 presentation으로의 변화. 개인의 존재 찾기에서 교수님 표현 '사회미학'으로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예술의 주제는 기본적으로 '개인 존재 탐구'이고 그 표현 도구는 매개체(작가, 미디어)를 통한 재현이다. 그리고 이제는 새삼스럽기까지 한 곳곳에서의 종언 선언. 더 이상 '개인'은 우리가 처한 문제를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표현 기회의 증가로 이어지며,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대표해줄 대행자를 찾지 않는다. '전문 예술가'는 이제 더 이상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근대 예술가들은 근대 시장 출신이기에, 이전의 방식으로는 잘 해봤자 이전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예술이 침체에 빠진다.
최근 중요해진 건 제시의 기능이고, 가장 첨단적이고 진보적인 예술은 기존의 예술 틀 이외의 공간에서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환기 시키는 것은 르포르타 문학, 그리고 문제 현장에 직접 나가 몸으로 부딪히며 작업하는 사람들의 예술 작품. 이제 '무대'는 바로 현실에 맞닿아 있다. 커다란 줄기는 리프리젠테이션에서 프리젠테이션으로, 구분에서 통합으로, 개인에서 우리로.
구체적인 실천의 방식은 각자 다를 거다. 요는 옛 틀에 연연하지 말 것. 장르 바깥으로 나갈 것. 시대시점이 바뀌고 있다, 사회 문제점이 무엇인지 전체를 통찰하는 눈을 가지라는 것. 언뜻 뻔한 소리 같만 역시 이 답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관련 사항들을 세밀하게 쫓아가며 나온 답은 다르다. 누구나 '요즘 세상 문제'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무엇이 왜 어떻게 문제가 되고 있는지 맥락을 갖춰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부족한 탓에 완전히 흡수하지도 못했고, 아무튼 납득이 가는 설명을 듣고 나침반 보는 법을 다시 익혔다. 맥락도 닿지 않는 질문거리들이 자꾸 올라오지만, 원래 배우는 건 답이 아니라 질문을 얻으려고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이야.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느끼고 뿌듯해졌어. 그게 제일 기뻐.
결국 내가 제일 앞이야. 내가 선두야. 내가 뭔가 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난 나를 던져서 답을 만드는 사람이야.
답을 찾는 건 나고, 내가 찾는 게 답이다. 음. 이 고민은 내가 주인공인 고민이다. 그래서 훨씬 무겁게 느껴지지만, 요는 내가 문제를 내고, 답을 해주는 건 나만이 아니라는 거. 같은 문제를 공유하는 사람이 많다는 거.
글
글쓰기 만보-안정효 중
작가 지망생들은 성공한 소설가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작품을 읽어보고 ‘조언’이나 ‘비평’을 해달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좋지 않은 습성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전문적인 평가를 받고 싶어하는 경우도, 원고를 들고 돌아다니는 대신,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평가하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편집자의 기능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스스로 써놓은 작품에 대해서 아직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기성작가의 인정을 받으면 잣니의 약점이 사라진다고 착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낄 때는 아예 남에게 보여줄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오웬(진 오웬)은 어떤 특정한 대상을 목적으로 그들 집단의 성향과 기호 따위를 연구해 가며 거기에 맞춰 글을 쓰는 행위도 옳지 안핟고 충고한다. 타인의 성향에 맞춘 글은 나의 글이 아니다. 눈치 보기는 창조적인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방송국 제작자들이 시청자의 눈치를 보고, 극작가들이 방송국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우리나라 연속극은 예술의 경지를 꿈꾸지 못하고 야합의 산물로 끝난다. 남의 말을 듣고 민주적으로 소비자와 함께 집단저으로 하는 창작은 문학이 아니다.
오웬은 문학소녀 시절에 윌라 캐더를 만나 그녀에게서 들었다는 비결도 소개했다.
"작가로서 활동하다 보면 언젠가 쓰고 싶은 위대한 작품을 위해 무엇인가 남겨두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타자기 앞에 앉을 때마다 자신이 지닌 최선의 능력을 발휘하여, 모든 노력과 생각을 아낌없이 소진해야 한다."
인간의 상상력은 샘과 같다. 물을 퍼내면 퍼낼수록 훨씬 새롭고 맑은 물이 다시 나와 우물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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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내 천성에 맞는 직업이구나. 이렇게나 혼자서 마음껏 가야 하는 길이라니.
아 이제야 살 것 같다. 안정효씨 고마워요.
글
가라타니 고진 - 근대 문학의 종언 - 메모
1부. 근대 문학의 종언
- 그러나 내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정말 실감한 것은 한국에서 문학이 급격히 영향력을 잃어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1990년대에 나는 한일작가회의에 참가하거나 한국 문학자와 사귈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이렇게 될지라도 한국만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2000년에도 나는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 당시 일본문학은 죽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품으로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작품을 생산하고 있지만, 일본사회에서 문학이 일찍이 가지고 있었던 역할이나 의미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중략)
그 시점에서 한국 문학은 어떻게 될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한국에서는 문하그이 역할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치운동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학생운동은 쇠퇴했습니다만, 노동운동은 매우 왕성했습니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그것이 노동운동이 불가능한 시대, 일반적으로 정치운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대리적 표현이었기 땜누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정치운동이나 노동운동이 가능하게 되면, 학생운동은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문학도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실제 한국에서 문학은 학생운동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이 모든 것을 떠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 말경부터 문학의 쇠퇴가 급속하게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김종철이라는 고명한 문학비평가는 문학을 그만두고 생태운동을 시작하며, <녹색평론>이라는 ㅈ바지를 내고 있습니다. -- 나는 왜 문학을 그만 두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젠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근대문학=소설이 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근대이전에도 문학은 있었고,ㅁ 누학에 관한 이론도 있었습니다.(시학) 소설은 이미 있었으며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있었지만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18 세기에 미학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중요합니다. aesthetics는 본래 감성론이라는 의미 - 상상력은 그때까지만 해도 환상을 초래하는 것으로 부정적으로만 여겨졌는데 이 시기부터는 오히려 창조적인 능력으로서 평가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문학 중요시는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 독일 낭만파의 미학 찬양 / 18세기 후반 모토오리 노리나가 <겐지 이야기>격 상승 / 감성이나 감정 긍정하는 상공업 시민계급의 우위 /
단순한 읽을거리에서 철학이나 종교와는 다르지만 보다 인식적이고 실로 도덕적인 가능성이 발견됨 = 소설의 지위 상승
문학이 지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넘어선다는 것은 역으로 끊임없이 지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하는 짐을 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종교 - 도덕에 대하여 시의 옹호가 이루어졌습니다. (중략) 일찍이 종교와 문학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문학을 옹호하는 논의는, 언뜻 보면 반종교적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종교보다 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또 문학은 허구이지만 진실보다 더 진실하기도 함.
마찬가지로 정치와 문학이라는 논의에서도 문학의 옹호는 대개 문학은 무력하고 무위이고 반정치적으로 보이지만, 제도화된 혁명정치보다 더 혁명적인 것을 가리킨다. 또 그것은 허구지만 통상의 인식을 넘어서는 인식을 보여준다. <- 본질적으로 소설가인 사르트르가 옹호한 문학/
그러나 오늘날에는 문학에 그런 의미부여가 불가능합니. 누구도 문학을 비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는 가까스로 체면은 세 워주고 있지만, 실은 아이들 장난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전혀 그런 논의를 하지 ㅇ낳지만, 30년 정도 전까지는 정치와 문학이라는 논의, 예를 들어 문학은 정치로부터 자립해야 한다는 식의 논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정치=공산당에 대해 문학가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공산당의 권위가 없어진다면, 정치와 문학이라는 문제는 사라져 버립니다. 작가는 무엇을 써도 상관없지 않을까? 정치 같은 케케묵은 촌스러운 것을 말하지 말라는 분위기가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문학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짊어지는 것은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면 문학은 그저 오락거리이빈다. 그래도 좋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 -
근대문학을 만든 소설이라는 형식은 역사적인 것이어서, 이미 그 역할은 완전히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 근대 소설은 말하자면 음성이나 삽화에서 독립한 것인데, 그것은 글쓴이에게도 독자에게도 커달나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청각 미디어가 나오게 되자 그럴 필요가없어졌습니다. - 사진이 나왔을 때 회화에서 일어난 거소가 비슷한 상황 -
- 근대 소설의 특징은 누가 뭐래도 리얼리즘
- 근대소설이 네이션 형성의 기반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국가 - 민족 - 언어의 문제. 세계적 언어와 지방어의 발달) 그런데 20세기 후반이 되면 문학이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된 예는 오히려 적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점점 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아니다. 지금도 문학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립을 각오하고 해나가고 있는 소수의 작가라면 좋습니다. 실제 나는 그런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써왔으며, 이후로도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은 건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ㅇ느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 존재가 문학이 죽었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에 불과한 무리들이 그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에는 아직 문예잡지가 있고, 맹리 신문에 커다란 광고가 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팔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설이 팔릴 때는 문학과는 상관없는 화제에 의한 것인데, 이러쿵저러쿵 문학은 아직 번영하고 있다는 허위현실을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작가에게 문학을 되찾으라고 말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또 작가가 오락작품을 쓰는 것을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근대소설이 끝났따면, 일본의 역사적 문맥으로 보았을 때 요미혼이나 닌죠본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열심히 잘 써서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만화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한편,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 됩니다.
48~64
2부. 국가와 역사
- 기술혁신에 의해 시간적으로 가치체계를 바꾸어버리고, 그 사이에 생긴 교환 차액에서 잉여가치를 얻는 것. 자본주의는 그 땜누에 기술혁신에 의한 차이화를 운명으로 지니고 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자본은 종말.
그러나 자본주의를 지양한다는 과제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한계에 이른다는 것과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우노 고조고 강조한 것 중에 중요한 것은 '노동력의 상품화' 바꿔 말하면 '임금노동'이 있는 한 자본주의는 존속한다는 것이다. 소련처럼 국유화되고 노동자가 국가공무원과 같은 형태가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녿오력상품을 지양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란>에서 파리코뮌을 칭찬하고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야말로 가능한 코뮤니즘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소시에이션은 생산협동조합을 말한다. 그 후 <고타강령 비판>에서도 기조 유지. 국가에 의해 협동조합 보호 양산하자는 주장 비판. 생산협동조합의 어소시에이션이야말로 국가를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함. 임금노동이 사라지는 것도 거기에서부터다. 왜냐하면 협동 조합에서는 노동자도 경영자이기 때문이다.
128~129
3부. 텍스트의 미래로
오카자키: 특히 최근 미술관이나 회랑에서 전시되는 작품은 전부 아이러니가 되어버렸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위험해 보이지만 전부 난쨧떼(구라, 뻥?)입니다. 최후의 난쨧떼가 미리 미술관 전체에 씌어있는 것 같습니다.
오사와: 옛날은 난쨧떼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래디컬 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난쨧떼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제 래디컬이고 뭐고 없습니다.(중략) 놀라운 것은 궁극의 무감동과 열정적 몰입이 표리일체라는 것입니다. 즉 특별히 바보 같은 자가 원리주의자가 되고 현명한 자가 구성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그 양 쪽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94~295
글
예술과 문화이론. 가상과 현실. 축
그렇다면 왜 문화이론이 (예술에게서) 문화적 실천의 자리를 빼앗게 되었는가? 한가지 답변은 문화적 실천이 이미 고급 모더니즘 예술의 형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미 한 번 일어난 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어떤 일이 두 번 일어나는 법은 결코 없다. 20세기 유럽의 주요 예술은 근대 서구 문명의 위기 속에서 존재했던 문화적 삶에 닥친 최초의, 외상적 충격의 결과였다 그런 충격이 한 번 발생했던 곽녜로, 그때처럼 즉각적으로 정신을 뒤흔드는 충격을 다시 느끼기란 어려웠다.
(중략)
진보란 일종의 신화이며, 인간의 이성이란 호나영이고, 우리의 실존이란 시시하기 짝이 없는 열정이라고 믿게 되면서 우리는 절대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의 불안에 점점 익숙해져갔으며, 우리를 붙들어 매줄 사슬이 없는 상황을 기꺼이 감수하기 시작했다.
(중략)
어떤 면에서 보면 리얼리즘을 향한 모더니스트들의 공격은 실패했다. 1930년대경 리얼리즘은 다시금 확고히 세력을 장악했다. 1960~70년대에는 새로운 문화이론이 리얼리즘을 제거하고자 모더니즘 예술에 도움을 청하며 또 한차례 용감히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 공격 역시 대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서구 문명이 비현실적으로 되어가기 일보직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리얼리티 자체는 비현실적인 것을 포용하게 되었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이 점차 신화와 환상, 가상적 부, 이국 정서와 과장법, 수사법, 가상 현실과 순수한 외향 등에 근거해 굴러가게 되었듯이 말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뿌리 중 하나였다. 이 세상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정보가 된 것이 문제가 되었을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본궤도에 올랐다.
(중략)
급진적인 모더니스트들은 예술과 삶의 구분을 제거하려고 애써왔다. 이제는 삶이 모더니스트들을 대신해 그 일을 완수한 듯 하다.
-> 리얼리즘은 무엇보다도 현실을 감각할 수 있는 주체가 생겨났을 때에 발전할 수 있다. 급변도 불변도 제 혼자서는 설 수 없다.문제는 고정과 변화 사이의 중간축이 얼마나 튼튼한가, 다. 이게 흔들리면 애초에 어떤 것도 고정될 수 없고, 고정된 것이 없다는 건 곧 모든 방향 전환이 의미를 잃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진보는 의미가 없다느니 변화하기 때문에 가치가 없어진다느니 하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핸들을 돌린다고 해서 핸들이 차체에서 빠져나간다는 뜻은 아니잖은가. 우리는 고정불변하거나 옛 가치를 흉내내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변화할 때만 제 값어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