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산 흘러가는 피난민들아

사관과 사회 구조 - 지배 피지배 계급 연관성의 문제

 

아니지. 계몽주의적인 속단이야. 지배 계급을 독립인수로 보니깐 그래. 한 시대의 지배 계급이란 건 항상 그 시대읲 ㅣ지배 계급과의 상관관계 속에 있잖아? 비록지배 계급의 손에 씌어진 역사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민중의 그림자가 있어.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라는 두 개의 변수가 작용하는 장의 역학 관계를 다만 어느 한쪽의 입장에서 기록했다는 것뿐이지. 그러니까 민중은 늘 새롭고 지배 계급만 몰락한다, 하는 이론은 일면적이야.

 

한 시대의 지배 계급이 망할 때 그 시대의민중도 망하는 거야. 그 시대의 장 속의 한 변수가망한다는 것은 그 장의 역학 관계가 일단 무너진다는 것,그러니까 하이픈의 다른 쪽 항도망한다는 것을 의미해.왜 소설 같은 데, 시대가 변했는데도 옛 주종 관계에서벗어나지 못하는 피지배 계급의 인간상이나오잖아? tv 같은 데 나오는 퇴락한 권문에 충성을 지키는 충복이라는 타입 말이야. 그의 주인이 망했을때 그의 노예도 망한 거야. 인제 주종의 의미가 명분에 닿지 않는데 충성을 주고받는 건 피차가 타락한 거지. 그래서 그충복의 아들은 그걸 못마땅해하고, 아들은 새 윤리에 따라 주인을 거부하지 않아. 주인이 아닌 것을 주인이 아니라고 인지한단 말이야. 아들이 주인을 거부할 때 주인만 거부하는 건가? 주인의 노예 - 즉 아버지도함께 거부하는 거야. 主-奴라는 사이클 전체를 거부하는 거지. 주만을 거부하는 게 아니야. 이때의아들은 그 奴의 생물학적 연속이 아니야. 그는 거듭 난 아들이지. 그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지. 시대의 아들, 새 가치 구조의 아들이란 말이야.

 

- 여기까지는 벚꽃동산ING-

 

그의 아버지는 생명, 하느님, 天, 理性 - 그런 것이겠지. 생물학적 외양에 혼돈돼서 奴로서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민중의 영원 무구성, 동정성 숭배가 나온단 말이야. 혁명 문학에서의민중은 생물학적 용어가 아니야. 그건 상징기호야. 이걸혼동하는 데서 민중의 우선과 책임 회피가 생겨 가짜 혁명가와 출세주의자들이 그걸 이용하지. 아첨한단 말이야. 지배 계급이망할 때 민중도 망해야 해. 옛날 부족들은 망할 때면 멸종이 되지 않았어? 그것이 진정한 망함의 형식이야. 문명한 사회에서는분업 구조상 지배 계급의 그것도 상위층만 명실공히 망하지만, 폭군을 눈감아준 민중도 그때 마음속으로라도 망해야 해.육신은비록 살았더라도. 폭군이 목이 떨어질 때 제 목덜미에도 칼날 같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돼.

 

새 시대는 폐허 위에 오는 거야. 살아 남은 사람은 어제의 자기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어제의 자기가 가졌던 기득권을 주장해서는 안되는 거야. 폐허 위에 감도는 부끄러움의 안개 속에서 새 삶읆 찾아야 하는 거지. 혁명 후의 정치가 미신적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야. 민중을 천사처럼 찬양하고 가치의 상징으로서의 민중을 풍속으로서의 민중과 바꿔치는 데서 오는 기만이란 말이야.

 

명분은 그렇더라도 정치는 현시링니깐, 혁명 후에도 민중은 재교육되고, 징계되고, 숙청돼야 하는 거야. 그걸 모두 민중의이름으로 하거든. 구십구 명의 민중을 숙청하면서도 민중의 이름으로 하거든. 민중은 한 사람만 남지. 그가 독재자야. 어디가 잘못됐나. 그의 논리가 잘못된 거야. 혁명이란 너- 나의 어떤 상황을 한 묶음으로 거부하고 다른 수준의 너-나의 상황을 선택하는 일이지, 너만을 거부하고 그 너와 연결됐던 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방법적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데서 민중의 이름으로 민중을 처단하게 되는 거지. 민중은, 내가 동의한 적이 없는데 왜 내 이름으로 내가 처단되는지 몰라 어리둥절하고나중에는 원망하게 되는 거야. 무엇이 잘못됐나. 민중이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 - 그게 독재자의 잘못이지. 민종의 동정이 깨질까봐.

 

- 가만 있어. 그 이론하고는 조금 달리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자네는 노예인 우리 가운데서 주인의 곁에서 시중드는 노예, 거리를 다니는 노예, 그것만 보는 거야. 보이지 않는 우리도 있지. 자네 이론은 민중도, 비굴한 민중도 부정돼야 한다는 것인데, 감옥 속에 있는 노예는 누군가? 민중 아닌가? 자네 이론은 폭군의눈으로 본 민중을 나로 받아들인 거야. 그런 나 아닌 나가 감옥 속에 있어. (...) 이 점을 생각 안 했으니 자네 이론에서는 왕의 목을 누가 자르느냐가 분명치 않았어.

 

 

 

 

홍콩 부기우기

예술의 존재 방식에 대한 고찰 - 평등한 식구로서의 공존


활자가 끝나고, 영상이 시작하는 게 아니라, 활자와 영상이 공존하게 된다고 봐.문명의 발전은 흥망이라는 모델에서 축적, 쌓인다는 모습으로- 그러니까 각 시대마다의 문화가 소멸하지 않고 지층 모양으로 겹친다고보는 거야. 나무의 나이테처럼. 지금까지는 밑에 있는 층이나 안쪽에 있는 테는 그것으로 응고해 다만 존재할 뿐이었지. 정신분석의 공적은 이 기층부분의 존재를 확인한 것잉겠지.
확인보다 그 기층이 현재에도 기능한다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현재에 가능할 때는 이미 승화라는 다른 형태로 그렇게 한다는 게 아닌가. 진보, 진화론이지. 그러니까 기층이 존재한다는 건 그야말로 기층으로서 바위 같은 걸로, 화석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의식의 경우에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말이야.
그래서.
그러나 앞으로는 문명의 각층은 눌린 밑에 있는 것은 응고하고 윗부분이 혼자 호흡한다는 형식이 아니라 모든 층이 동시에 현재의 기능을 가지게 된다고 보는 거야.
동시에?
그렇지. 말하자면 원시 예술은 과거로서가 아니라 아니라 현재의 그 부분으로서 생활 속에 부활된단 말이지.
취미로서?
현재까진 취미라고 부르는 게 옳았지. 그러나 앞으로는 취미와 일느바 노동의 경계까 자꾸희미해진다고 해야 할 거야. 그렇게 되면 현재까지는 인간의 생활력이 모자라서 화석으로서만 있었던 부분들이 그 자체의한계 안에서 다시 분화되고발전하게 되지.
좀 어렵군.
어렵지 않아. ㅁ누학얘기로 돌아가면, 문학이 시대적 사명의 한계에도달했달 때는 문학이라는 것을 현재까지의 모습을 지닌 채 변화에 대처시키려고 하니까 그렇게 돼. 그러나 현재까지의 문학은 가능성의 일부라고 보자는 것이 내 생각이거든. 사진이 발명되었다고 해서 미술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누학도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더 분화될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영상 시대라는 것이 전달하려는 내용을 활자의 테두리 안에서 하자는, 활자 문화의 적응력을 높이는 것 그것이 진실한 뜻에서 동시성의 문명이 아닌가? 모든 매체가 동시에 작용하는 문명- 그런 포괄적 판단력, 진보라는 이름 밑에 엄청난 낭비를 하지 않는 문명, 최첨단뿐 아니라, 최하층까지도 생존이 허락돼가고 각기의 기능이 서로 불가결하다는 것이 인식되는 그런 문명.
가만 있자, 그러면 현재의 지구상의 형편이 바로 그런 상태 아닌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공존하는 상태, 그리고 지금까지도 역사는 그런 식이 아니었나말이야.
그렇기는 하지. 현재까지는 그런 차이는 문명-야만, 선진-후진, 이라는 상태로서 그렇게 도니 것이지만 앞으로는그것들이 우열의 차이로서가 아니라 개성의 차이로서 존재한단 말일세.
(...)
또 예를 들어볼까? 육상 경기에서 달리는 사람마다 칸이 나누어져 있지 앟아. 각자의 칸 속에서 속도를 겨루는 것이지. 혼자서 경주하면 트랙이한 개로 족하지만 복수가 동시에 같ㅇ느 공간에서 달리기 위해서는 그 공간은 저마다 편차를 가져야 한다 이거야. 나는 이 구성이미래 사회의 모델이라고 생각해. 문명의 역사에는 새 주자가 나올 대마다 테가 하나씩 보태지는것인데 그렇다고 기왕의주자가 퇴장하는 건 아니야.
그 이론은 전통 예술의 기능에 대한 설명으로는 좋겠군.
다만 지금까지 생각하듯이 소극적인 의미, 말하자면 현재의 더부살이로 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식구로서 과거가 현재와 동거한단 말이지.
상당히 종말론적인 이야기군?
종말론이라니?
미래의 어느 시기에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해서 한 광장에 모인다는 게 종말론 아니야? 자네 말은 그 시기가 어느 특별한 때ㅏ 아니고,보통 삶이 그렇게 된다는것으로 탈바꿈한거지. 그러니까 과거는 죽지 않는다는 이난의 영생론일세 그려.

 

 

연극론

 

연극은 제일 실물 크기의 예술이겠지?
그렇지, 삶의.
아무리 실물 크기라도 역시 압축이나 생략이 있어야 하는데, 압축량이 너무 많아버리면 실물이라는 효과를 낼 수 없잖은가?
무용이 돼버리든지 그렇게 되지.
동작은 무용이 되고, 대사는 음악이 되고 말이야.
그래서 아예 그런 작품을 쓰고 싶다는 말인가?
소설에서 이놈의 진짜 비슷하게 써야 한다느 소리가 신물이 날 지경인데 연극에서도 또 그 놈을 쓰자고 하니 짜증이 나더군.

(...)

추상연극을 택하지 안흔다면 갈 길이 없어지고 말아.
구상연극은 우리 경우에는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어. 그리고 우리 단계에는 그런 기초 위에서 추상연극이 공존하는 단계를 맞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게 내 의견이야.
그런 경우에는, 특히 연극인 경우에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한 것 같아.
조건이야 많지.
그 나라의 토착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살아서, 풍속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지.
이데올로기라니?
유럽 사회에서의 기독교 같은 것이지.

(...)


연극은 인생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에서는 소설이나 같겠지만, 사실주의 연극의 경우에는 무대에 나온 인물이 현실  속에서도 곧 연상이 될 수 있어야 해. 그런데 현재 우리 국민 생활에는 종교의 얼굴은 사라지고 말았고, 정치적 이슈는 금지되고 있지 않아? 적어도 연극적일 만한 이슈는 말이야. 연극이 연극답자면, 진실로 연극이 융성하려면 연구나 기술 같은 건 뒷전에 와도 돼. 자유, 정치적 자유만 있다면 연극은 오늘날에도 대번에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국민적 기 반을 가진 정치 세력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회라면, 그런 세력의 정신적 활력을 대변하는 매체로서 연극은 가능하지. 자존심도 없고 교양도 없는 지배 계급 아래에서는 연극은 불가능해. 기껏 연극보다 공개성과 직접성이 덜한 예술 - 그러니까 오락적일수록 좋지 - 그런 예술은 연명하겠지.
그렇다는 전제하에서 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전제를 승인한다는 건 아니어야지. 그 전제를 어떻게 바꾸는가, 바꿀 수 있겠는가를 질문하는 과정이 예술이어야 하지 않겠나?
전제가 없는 곳이 어디 있나?
없지. 그러나 전제라는 게 잠정적인 약속이 아니라, 어기면 곧 역적이 되는 하늘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거지.
알았어.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점심 사지.

구보씨는 문득 자기가 문화깡패 같은, 문화상이군인 같은, 문화문둥이 같다고 생각했다.여염집 여자에게 겁을 주는화류계 여자 같다고 생각했다. 제 몸에 상처를 내고 성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려워서 물러서는 그런 입장에 서는 것을 구보씨는 원치 않았다. 구보씨는 글 속에서는 그러한 무법자로 살되 실지 살림에서는 모가 나지 않는다기보다 당대의 가장 보수적인 생활자의 본보기 같은 삶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구보씨의 이런 마음가짐은 어찌 보면, 아니 어찌 보지 않아도 너무나 공상적이었다. 그러나 구보씨에게 물어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을 뿐더러 생각한 끝에 이르게 된 제일 땅을 디딘 사상이었다.

 

 

 

- 40년이 지났지만 70년대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는 않은 질문들. 과연 40년이 지난 후 우리가 쥐고 있는 문제는 그때와 얼마만큼 다른가? 얼마간 같다면, 어떻게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단 말인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