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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이론. 가상과 현실.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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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0. 08:53
T. 이글턴 <이론 이후> 3.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가는 길 중 99~101p / 도서출판 길
그렇다면 왜 문화이론이 (예술에게서) 문화적 실천의 자리를 빼앗게 되었는가? 한가지 답변은 문화적 실천이 이미 고급 모더니즘 예술의 형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미 한 번 일어난 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어떤 일이 두 번 일어나는 법은 결코 없다. 20세기 유럽의 주요 예술은 근대 서구 문명의 위기 속에서 존재했던 문화적 삶에 닥친 최초의, 외상적 충격의 결과였다 그런 충격이 한 번 발생했던 곽녜로, 그때처럼 즉각적으로 정신을 뒤흔드는 충격을 다시 느끼기란 어려웠다.
(중략)
진보란 일종의 신화이며, 인간의 이성이란 호나영이고, 우리의 실존이란 시시하기 짝이 없는 열정이라고 믿게 되면서 우리는 절대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의 불안에 점점 익숙해져갔으며, 우리를 붙들어 매줄 사슬이 없는 상황을 기꺼이 감수하기 시작했다.
(중략)
어떤 면에서 보면 리얼리즘을 향한 모더니스트들의 공격은 실패했다. 1930년대경 리얼리즘은 다시금 확고히 세력을 장악했다. 1960~70년대에는 새로운 문화이론이 리얼리즘을 제거하고자 모더니즘 예술에 도움을 청하며 또 한차례 용감히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 공격 역시 대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서구 문명이 비현실적으로 되어가기 일보직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리얼리티 자체는 비현실적인 것을 포용하게 되었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이 점차 신화와 환상, 가상적 부, 이국 정서와 과장법, 수사법, 가상 현실과 순수한 외향 등에 근거해 굴러가게 되었듯이 말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뿌리 중 하나였다. 이 세상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정보가 된 것이 문제가 되었을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본궤도에 올랐다.
(중략)
급진적인 모더니스트들은 예술과 삶의 구분을 제거하려고 애써왔다. 이제는 삶이 모더니스트들을 대신해 그 일을 완수한 듯 하다.
-> 리얼리즘은 무엇보다도 현실을 감각할 수 있는 주체가 생겨났을 때에 발전할 수 있다. 급변도 불변도 제 혼자서는 설 수 없다.문제는 고정과 변화 사이의 중간축이 얼마나 튼튼한가, 다. 이게 흔들리면 애초에 어떤 것도 고정될 수 없고, 고정된 것이 없다는 건 곧 모든 방향 전환이 의미를 잃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진보는 의미가 없다느니 변화하기 때문에 가치가 없어진다느니 하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핸들을 돌린다고 해서 핸들이 차체에서 빠져나간다는 뜻은 아니잖은가. 우리는 고정불변하거나 옛 가치를 흉내내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변화할 때만 제 값어치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문화이론이 (예술에게서) 문화적 실천의 자리를 빼앗게 되었는가? 한가지 답변은 문화적 실천이 이미 고급 모더니즘 예술의 형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미 한 번 일어난 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어떤 일이 두 번 일어나는 법은 결코 없다. 20세기 유럽의 주요 예술은 근대 서구 문명의 위기 속에서 존재했던 문화적 삶에 닥친 최초의, 외상적 충격의 결과였다 그런 충격이 한 번 발생했던 곽녜로, 그때처럼 즉각적으로 정신을 뒤흔드는 충격을 다시 느끼기란 어려웠다.
(중략)
진보란 일종의 신화이며, 인간의 이성이란 호나영이고, 우리의 실존이란 시시하기 짝이 없는 열정이라고 믿게 되면서 우리는 절대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의 불안에 점점 익숙해져갔으며, 우리를 붙들어 매줄 사슬이 없는 상황을 기꺼이 감수하기 시작했다.
(중략)
어떤 면에서 보면 리얼리즘을 향한 모더니스트들의 공격은 실패했다. 1930년대경 리얼리즘은 다시금 확고히 세력을 장악했다. 1960~70년대에는 새로운 문화이론이 리얼리즘을 제거하고자 모더니즘 예술에 도움을 청하며 또 한차례 용감히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 공격 역시 대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서구 문명이 비현실적으로 되어가기 일보직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리얼리티 자체는 비현실적인 것을 포용하게 되었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이 점차 신화와 환상, 가상적 부, 이국 정서와 과장법, 수사법, 가상 현실과 순수한 외향 등에 근거해 굴러가게 되었듯이 말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뿌리 중 하나였다. 이 세상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정보가 된 것이 문제가 되었을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본궤도에 올랐다.
(중략)
급진적인 모더니스트들은 예술과 삶의 구분을 제거하려고 애써왔다. 이제는 삶이 모더니스트들을 대신해 그 일을 완수한 듯 하다.
-> 리얼리즘은 무엇보다도 현실을 감각할 수 있는 주체가 생겨났을 때에 발전할 수 있다. 급변도 불변도 제 혼자서는 설 수 없다.문제는 고정과 변화 사이의 중간축이 얼마나 튼튼한가, 다. 이게 흔들리면 애초에 어떤 것도 고정될 수 없고, 고정된 것이 없다는 건 곧 모든 방향 전환이 의미를 잃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진보는 의미가 없다느니 변화하기 때문에 가치가 없어진다느니 하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핸들을 돌린다고 해서 핸들이 차체에서 빠져나간다는 뜻은 아니잖은가. 우리는 고정불변하거나 옛 가치를 흉내내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변화할 때만 제 값어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