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 - 근대 문학의 종언 - 메모

Growing 2012. 2. 1. 21:20

1부. 근대 문학의 종언

 -  그러나 내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정말 실감한 것은 한국에서 문학이 급격히 영향력을 잃어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1990년대에 나는 한일작가회의에 참가하거나 한국 문학자와 사귈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이렇게 될지라도 한국만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2000년에도 나는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 당시 일본문학은 죽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품으로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작품을 생산하고 있지만, 일본사회에서 문학이 일찍이 가지고 있었던 역할이나 의미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중략)
  그 시점에서 한국 문학은 어떻게 될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한국에서는 문하그이 역할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치운동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학생운동은 쇠퇴했습니다만, 노동운동은 매우 왕성했습니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그것이 노동운동이 불가능한 시대, 일반적으로 정치운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대리적 표현이었기 땜누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정치운동이나 노동운동이 가능하게 되면, 학생운동은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문학도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실제 한국에서 문학은 학생운동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이 모든 것을 떠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 말경부터 문학의 쇠퇴가 급속하게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김종철이라는 고명한 문학비평가는 문학을 그만두고 생태운동을 시작하며, <녹색평론>이라는 ㅈ바지를 내고 있습니다. -- 나는 왜 문학을 그만 두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젠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근대문학=소설이 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근대이전에도 문학은 있었고,ㅁ 누학에 관한 이론도 있었습니다.(시학) 소설은 이미 있었으며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있었지만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18 세기에 미학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중요합니다. aesthetics는 본래 감성론이라는 의미 -  상상력은 그때까지만 해도 환상을 초래하는 것으로 부정적으로만 여겨졌는데 이 시기부터는 오히려 창조적인 능력으로서 평가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문학 중요시는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 독일 낭만파의 미학 찬양 / 18세기 후반 모토오리 노리나가 <겐지 이야기>격 상승 / 감성이나 감정 긍정하는 상공업 시민계급의 우위 / 
  단순한 읽을거리에서 철학이나 종교와는 다르지만 보다 인식적이고 실로 도덕적인 가능성이 발견됨 = 소설의 지위 상승 
  문학이 지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넘어선다는 것은 역으로 끊임없이 지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하는 짐을 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종교 - 도덕에 대하여 시의 옹호가 이루어졌습니다. (중략) 일찍이 종교와 문학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문학을 옹호하는 논의는, 언뜻 보면 반종교적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종교보다 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또 문학은 허구이지만 진실보다 더 진실하기도 함. 
  마찬가지로 정치와 문학이라는 논의에서도 문학의 옹호는 대개 문학은 무력하고 무위이고 반정치적으로 보이지만, 제도화된 혁명정치보다 더 혁명적인 것을 가리킨다. 또 그것은 허구지만 통상의 인식을 넘어서는 인식을 보여준다. <- 본질적으로 소설가인 사르트르가 옹호한 문학/ 

  그러나 오늘날에는 문학에 그런 의미부여가 불가능합니. 누구도 문학을 비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는 가까스로 체면은 세 워주고 있지만, 실은 아이들 장난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전혀 그런 논의를 하지 ㅇ낳지만, 30년 정도 전까지는 정치와 문학이라는 논의, 예를 들어 문학은 정치로부터 자립해야 한다는 식의 논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정치=공산당에 대해 문학가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공산당의 권위가 없어진다면, 정치와 문학이라는 문제는 사라져 버립니다. 작가는 무엇을 써도 상관없지 않을까? 정치 같은 케케묵은 촌스러운 것을 말하지 말라는 분위기가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문학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짊어지는 것은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면 문학은 그저 오락거리이빈다. 그래도 좋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 - 
  
  근대문학을 만든 소설이라는 형식은 역사적인 것이어서, 이미 그 역할은 완전히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 근대 소설은 말하자면 음성이나 삽화에서 독립한 것인데, 그것은 글쓴이에게도 독자에게도 커달나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청각 미디어가 나오게 되자 그럴 필요가없어졌습니다. - 사진이 나왔을 때 회화에서 일어난 거소가 비슷한 상황 - 
-  근대 소설의 특징은 누가 뭐래도 리얼리즘 
- 근대소설이 네이션 형성의 기반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국가 - 민족 - 언어의 문제. 세계적 언어와 지방어의 발달) 그런데 20세기 후반이 되면 문학이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된 예는 오히려 적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점점 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아니다. 지금도 문학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립을 각오하고 해나가고 있는 소수의 작가라면 좋습니다. 실제 나는 그런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써왔으며, 이후로도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은 건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ㅇ느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 존재가 문학이 죽었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에 불과한 무리들이 그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에는 아직 문예잡지가 있고, 맹리 신문에 커다란 광고가 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팔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설이 팔릴 때는 문학과는 상관없는 화제에 의한 것인데, 이러쿵저러쿵 문학은 아직 번영하고 있다는 허위현실을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작가에게 문학을 되찾으라고 말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또 작가가 오락작품을 쓰는 것을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근대소설이 끝났따면, 일본의 역사적 문맥으로 보았을 때 요미혼이나 닌죠본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열심히 잘 써서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만화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한편,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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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국가와 역사 

- 기술혁신에 의해 시간적으로 가치체계를 바꾸어버리고, 그 사이에 생긴 교환 차액에서 잉여가치를 얻는 것. 자본주의는 그 땜누에 기술혁신에 의한 차이화를 운명으로 지니고 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자본은 종말.
  그러나 자본주의를 지양한다는 과제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한계에 이른다는 것과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우노 고조고 강조한 것 중에 중요한 것은 '노동력의 상품화' 바꿔 말하면 '임금노동'이 있는 한 자본주의는 존속한다는 것이다. 소련처럼 국유화되고 노동자가 국가공무원과 같은 형태가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녿오력상품을 지양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란>에서 파리코뮌을 칭찬하고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야말로 가능한 코뮤니즘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소시에이션은 생산협동조합을 말한다. 그 후 <고타강령 비판>에서도 기조 유지. 국가에 의해 협동조합 보호 양산하자는 주장 비판. 생산협동조합의 어소시에이션이야말로 국가를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함. 임금노동이 사라지는 것도 거기에서부터다. 왜냐하면 협동 조합에서는 노동자도 경영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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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텍스트의 미래로

  오카자키: 특히 최근 미술관이나 회랑에서 전시되는 작품은 전부 아이러니가 되어버렸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위험해 보이지만 전부 난쨧떼(구라, 뻥?)입니다. 최후의 난쨧떼가 미리 미술관 전체에 씌어있는 것 같습니다.

  오사와: 옛날은 난쨧떼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래디컬 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난쨧떼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제 래디컬이고 뭐고 없습니다.(중략) 놀라운 것은 궁극의 무감동과 열정적 몰입이 표리일체라는 것입니다. 즉 특별히 바보 같은 자가 원리주의자가 되고 현명한 자가 구성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그 양 쪽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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