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꺼내다가 발견한 것

Walking 2011. 9. 20. 18:23



도시와 인간의 1.5배 쯤 될 법한 위엄있는 크기..
우리 집에 미미하게 흐르는 기운을 좌빨의 번데기라고 할 수 있다면, 그건 역시 아빠한테서 온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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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윗에서 깨작거리다 어째 도배하는 꼴이 되길래 블로그로.

전에도 비슷한 얘기를 여러번 했던 것 같고, 생각은 확실히 여러번 했지만. 아빠에 대해 조각조각 떨어지는  정보들을 곱씹으면 참 미묘하다. 아빠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아빠도 우리에게 큰 관심이 없고, 그냥 무턱대고 살 뿐인데 가끔 가끔 돌아보면 내가 이 아저씨한테 의외로 결정적인 것들을 물려 받은 것 같아서. 아빠에 대해서는 언제봐도 되게 낯설고, 그걸 내가 낯설게 느낀다는 게 더 놀랍다. 생각해보면 닮은 게 당연하잖아. 아빠인데. 

그냥 나한테는 아빠한테도 젊은 시절이 있었고 꿈이 있었고 자기 시각과 의지가 있다는 게 신기한 것 같기도 하다. 아. 참. 이렇게 써놓으니 어떤 불효보다 더 미안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도대체 뭐, 알 수가 있어야지. 

나는 아빠에게서 직접적으로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았다. 아빠는 자식들에게 꿈이나 희망같은 건 아무것도 투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아빠가 노조지부장 선거에 나간다고 연설문 타이핑을 부탁했을 때에도 난 그게 대체 뭘 하는 건지, 왜 해야 하는 건지 어떤 설명도 들은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이 한다고 하면 오히려 더 관심이 갔을 텐데, 아빠가 한다니까 외려 시큰둥했던 것 같다. 하면 하는 갑다 말면 마는 갑다. 있으면 있는 갑다 없으면 없는 갑다. 아빠에 대한 내 감상은 딱 그 정도고 앞으로도 별반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이 양반은 도대체 가정이란 걸 왜 꾸렸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가. 가정에 아무것도 안 바라면서 아빠 자리는 묵묵히 지키고 있으니 더 그래.

그래서 집에 오래 묵어있는 7, 80년대 문예지들과 커다란 옥편이며 영어사전. 시집들. 신영복과 월러스틴의 책들. 그리고 저런 책들을 보면 되게 기분이 이상해진다. 저런 책을 읽는 아빠 모습이나 아빠 머릿 속을 상상하면 한없이 낯설고, 지금의 아빠가날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저히 상상이 안간다. 왜 아빠는 지금의 나한테 저런 얘기를 하나도 안할까? 나도 이러다 한 2~3년 더 지나면 또 저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게 되는 걸까? 지금 어설프게 영글기 시작한 고민들이 꼭 저런 식으로 책장 깊은 곳에 꽂힌 채 그대로 케케 묵게 될까? '이미 늦었음'과 '내 모자람'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 채 그냥 그렇게 살게 될까?

그러고보면 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막연하게 아빠처럼 되는 것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더랬다. 변화도 없고 결실도 없고, 언제까지나 외부인인 채로 그대로 굳어 버리는 거. 가장 짜증나는 건 '아빠처럼 되기 싫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이미 '난 결국 저렇게 될거야. 난 그 정도 인간이니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다. 어렸을 때부터 나한텐 특히 잘난 부분이나 크게 될 재능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 왔고, 무리 속에서 자연스레 빛나는 똑똑한 아이들을 보면 속이 언짢고 목이 메었다. 난 허풍으로라도 절대 저렇게 주목을 받을만한 부분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뭘 하든 똑부러지고 그럴듯하게 해내는 아이들에 대면 난 언제나 어딘가 딸리는 애였다. 언제나 어질러져 있고, 엉성하고, 뭘 해도 그저 그렇고, 끝을 맺질 못하고. 종이접기를 하면 언제나 종이귀가 딱 맞질 않는다. 리본을 묶으면 양쪽 귀 길이가 항상 다르다. 철봉에는 어렸을 때부터 반 초도 매달려 있질 못했다. 달리기도 느리고, 애들하고 하는 얼음땡이나  숨바꼭질도 요령이 없어서 맨날 헤매고, 공기나 고무줄은 아예 해보려고 시도조차 안했고, 남들이 괴롭히거나 부당하게 대해도 나서서 말도 못하고. 그냥 한없이 책 읽는 것만 좋아했다. 그리고 뭐로든 이야기 만들기도 좋아했고...
 


(... 어 잠깐만... 써내려가다보니 그렇네. 아 뭐야. 나 아빠한테 영향 엄청 많이 받았구나. 뭐야. 지 자신에 대한 가치 평가가 아빠에 대한 평가와 동일시되어 있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기는 건 아빠에 대한 가치 평가의 적어도 8할 이상은 엄마의 시각을 통해 만들어져 있다는 건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뭐야 존나 복잡해 이런 니미럴 썅썅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래서 상담가 선생이 그렇게 아빠 아빠 거렸던 거군 이런 젠장할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그래. 다시 얘기로 돌아가보자면. 정말 할 줄 아는 게 책 읽는 거랑 얘기 만들기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못 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은 게' 그 둘이라는 편이 맞겠다. 내가 잘 하든 못 하든, 아무도 타박하거나 재촉하지 않는 게 그 둘이었던 거다. 집에 알파벳, 숫자, 한글 자모음이 쓰여있는 색색깔 블록이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만들며 놀았던 게 기억난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였는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색과 문자 종류별로 패를 나눠서 싸우기도 하고 마을도 만들고 아무튼 뭔가 .. 뭐로든 이야기를 만들고 놀았다. 아니면 다시 책 읽고.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친구는 아오안하고 책만 봐서 친구들이 참 싫어했다. 뭐 초딩도 되기 전이라 지금은 기억 못할테지만. 유딩 때 친구들아 미안...... 심지어 친구가 책 보는 날 엎어놓고 의사놀이 한다고 막 찌르고 꼬집어도 냅두고 책 봤었지....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친구는 놀러와서는 책만 보는 내가 얄미워서 일부러 세게 꼬집어댄 것 같아.... 이모들도 미안... 책 보고 안 꽂아놓고 가서...아놔

아 그러고보니 그렇구나. 내가 일찌감치 작가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한 건 내가 만들어놓은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나보고 잘했다 못했다는 소리를 할 수 없어서라고 생각해서였군. 쟤보다 못한다, 몇등이다, 이런 소릴 안 들어서였던 거였어.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분야라서 거기 안주하려고 했던 거였구먼... 으으음 어허허.....................


그리고 여기서 새삼 깨닫는데 나 엄청 열등감에 찌들어 있었던 거구나. 그러게. 그 속이 부글부글 끓고 목이 빳빳하게 굳으면서 메이는 기분이 열등감이었던 거구만? 아니. 아빠가 자신의 일생을 패배감으로 점철시켰는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야. 문제는 엄마가 그렇게 보고 있었단 거고 내가 그걸 충실하게 이어 받았다는 거지. 그리고 그러는 한편 나는 엄마의 기대를 채워줘야 한다는 강박에 오링하게 되고. 그럴수록 열등감은 커지고. 난 안될거야 아마가 강화되고...으, 으?... 그리고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동생들에게도 투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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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한없이 길어진다. 뭐 그냥 어느 쪽으로 가든 냅두지 뭐. 어차피 내 블로그인데 아무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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