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우맨

Swimming/etc 2012. 8. 20. 09:14




8월 19일 저녁 7시 공연. 두산아트센터.


  마이클을 재우고 혼자 이야기를 계속하는 장면에서 감정이입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멘탈이 바스러짐. 간만에 멘탈 바스러진 공연. 한번 더 보고 싶은데, 더 본 다음 멘탈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음. 또 뭘 연상하게 될지 좀 무서움. 



  아무튼 훌륭한 작품이다. 좋은 공연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작품의 훌륭함을 느끼게 해줄 정도이긴 했다. 다만 카투리안과 에리얼의 연기가 좀 아쉬웠다. 카투리안은 대본 속도대로 감정이 안 따라오는 거 같았다. 반대로 에리얼은 대본보다 먼저 감정이 눕는 것 같았음. (아니 왜 재등장하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한거요!) 결정적으로 인물들이 좌절하는 시점에서 대본에 / 몸을 웅크리며 오열/ 이라고 써 있는 게 보이는 듯 했다.(아하. 투폴스키와 마이클의 연기가 더 괜찮았던 건 이 캐릭터들에게는 좌절이 없어서일지도.) 분명히 대본은 쩌는데 왜 가끔 진행이 작위적으로 느껴지는지? 

그리고 대사를 왜 자꾸 되씹으세요. 말을 하다 혀가 꼬인 건지 머리 속 대사가 꼬인 건지 아마 둘 다 일테지만. 대사 양이 엄청나서 1막만 보는 데도 어지간한 공연 2막을 다 본 것 같은 기분이긴 했어.(지루했다는 게 아니다.) 그건 인정. 하지만 주인공 배우님은 뒤로 갈수록 단어들을 반복하셔서 중요한 순간에 좀 몰입이 깨졌어요. 한 두 번이면 자연스러워 보였을 것을. 

주말 낮공연을 볼 때마다 배우들이 풀파워는 쓰지 않는다는 게 느껴져서 일부러 저녁 공연으로 간 거였는데 으음... 하긴 이건 단순히 집중도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웃음의 대학,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랑 같이 삼자비교를 하면 꽤 재미있을 것 같음. 세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꾼이란 어쩔 수 없는 현실주의자이면서 꿈의 매개자다. 순응자이면서 반항아다. 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도 자기 자신이 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꿈의 전달자. 이 현실과 꿈의 간극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틀이다. 다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틀대로 이야기를 죽죽 뽑아내는 거야. 희극 작가면 희극 작가인대로, 베스트셀러는 베스트셀러대로, 미친 삼류 변태 동화 작가면 미친 삼류 변태 동화 작가인 채로.

극은 진행될 수록 이들의 이야기에 실체를 불어 넣는다. 등장인물들이 직접 이야기를 재현하고, 이야기가 과거 사건의 단서가 되고 미래의 예언이 된다. 과연 이야기대로 될 것인지,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을지 흥미진진하지. 쩔어줘.

그리고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깔리는 대전제 1. 어째서 작가는 계속 이야기 하는가 - 이야기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필로우맨에서 내내 반복하는 대로 '우리가 아는 건 a가 b를 했다는 게 아니라 a가 b를 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게 전부다. 작은 틈새, 혹은 원초적인 거짓말. 이야기에게 실재란 요람이면서 쇠고랑이다. 실재는 과거와 현재, 미래 삼면에서 끝없이 이야기를 압박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어지는 건 바로 그 깜깜절벽 사이에서다. 

동화같고 악몽같고 그림같고 영화같은 수많은 이야기들. 눈 녹듯 사라져 버리면서도 우리가 부를 때마다 돌아오는 작은 천사들. 다 거짓인가? 다 진실인가? 어느 쪽에 갖다 붙여도 이야기는 허무맹랑해진다. 결국 이야기는 이야기인 채로 남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계속 이야기를 쓰고 나누고 남기는가. 


예전에 누군가 '글을 쓰니까 말솜씨도 어느 정도 있지 않느냐' 라고 물은 적이 있다. 아니 천만의 말씀이다. 글을 쓰는 건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로는 도저히 뱉을 수 없고 형태를 만들 수 없으니까 글로 쓴다. 이야기꾼의 첫번째, 유일한 의무가 이야기인 건 그가 예술가여서가 아니다. 이야기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로 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세 작품이 모두 끔찍하고 절박한 상황을 담는 건 이런 이야기가 들어가기 때문이지. 왜 우리는 비참하고 좆같고 비겁해지면서까지, 계속 쓰는가. 인간에게 이야기를 만든다는 건, 이야기에 자기를 실는다는 건 무엇인가. 이건 작가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 이야기에 흥을 싣고 울고 웃고 자기 아이들에게 다시 그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건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이잖아. 작가가 하는 건 거기에 실오라기 하나, 모래 한 줌 정도 보태는 거 밖에 안돼. 모두가 이야기꾼이 아니라면 작가란 존재가 아예 있을 수도 없지 뭐. 


그런데 음 필로우맨 마지막 부분에서 배우가 이걸 확 전달한 건지 모르겠음. 보기에 따라서는 애 셋이 죽었는데도 이야기만 아는 이야기미친놈으로 그냥 끝으로 보일 것도 같음. 아니 그렇게 봐도 상관없지. 그게 원래 모습인데. 십중팔구 시체도 못 찾을 강제징용을 당하면서도 함께 극을 올리자고 약속하고, 친구를 (아마도 제 탓으로) 영영 잃었으면서도 또다시 친구의 이야기를 불러오고, 두건 속 마지막 7.4초 동안에도 이야기를 만드는 그들. 정말 지독한 이야기미친놈들이지 뭐야.

설정

트랙백

댓글

놓친 작은 틈새

Swimming/etc 2012. 5. 14. 10:37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갑자기 닥쳐온 상실로부터 시작해서 그 상실을 관통해 나가는 이야기다.

토마스와 엘빈, 두 사람의 이야기의 시발점은 엘빈어머니의 죽음이다. 아직 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은 여섯살 아이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어처구니없는 재앙이다. 

이후 그들을 만나게 해준 선생님의 죽음, 오랜 시간이 흘러 마법의 책방을 운영하던 앨빈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앨빈의 죽음까지. 이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이별은 모두 이 죽음이라는 큰 계곡 사이를 흘러가는 시냇물인 셈이다. 토마스는 내내 앨빈과 자신의 이야기에서 놓친 게 무엇일까 고민하지만. 글쎄. 앨빈 말대로 그가 놓쳐버린 그 순간은 도저히 찾을 수 없고, 찾는 다 해도 토마스가 책임질 수도 없다. 틈새는 그들이 스쳐 지나간 죽음 그 모두니까. 앨빈은 그 계곡 틈새에 남았고 토마스는 바다로 갔다. 


친구의 인생이 바뀐 순간을 놓친 게 토마스의 죄는 아니다. 죄라 해도 토마스만의 죄는 아니다. 그뿐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 짧은 순간을 붙잡지 못한다. 산다는 건 죽음과 마주하는 것을 계속 미루는 것이다.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살아남아서, 살아남아 있는 동안 송덕문을 쓰는 것뿐이다. 언젠가 자신의 꽉 막힌 인생이 끝나는 때에는 또 뒤에 남은 누군가가 그의 빈 책장을 송덕문으로 채워주기를. 톰과 조지. 영원히 함께. 수천 쌍의 천사들과. 


한 번 만들어진 이야기는 절대 사라지지 않아.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