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안 정해진다

Swimming/etc 2013. 3. 25. 23:19

  뒤뚱뒤뚱 달리던 킬리가 앞서가던 필리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제 삼촌의 단검집을 들고 이리저리 휘둘러대던 필리는 동생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둘은 그렇게 온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식탁 다리에 부딪히고야 간신히 멈췄다. 


- 필리! 


  아이들의 머리 위로 묵직한 호령이 떨어졌다. 필리가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두 시간 전 디스가 땋아준 금발은 먼지투성이였다. 제멋대로 풀렸다 엉킨 꼴이, 길이가 충분치 않다고 타이르는 어머니를 그리 졸라댔던 게 무색할 지경이었다. 킬리의 머리꼴도 제 형 못지 않았다. 식탁 다리에 머리를 박은 채로 까르륵 웃어대는 아이의 뒤통수에는 반쯤 끊어진 끈이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었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어대는 걸까.” 드왈린이 중얼거리자 발린이 대꾸했다. “내가 보건대, 킬리는 아직 우는 법을 모르는 게야.”


  아니면 웃는 법 밖에 모르든가. 두 드워프가 맞장구를 치고 있는 사이, 아이들의 삼촌은 미간을 짚은 채 식탁 아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족이 순식간에 부랑자 신세로 전락한 후에도 한치 꺾이지 않은 드워프 왕자의 시선이었다. 필리가 킬리의 옆구리를 툭, 찼고 킬리가 두리번 거리다 삼촌을 쳐다보고는 똑바로 일어났다. 두 아이는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두린은 그리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

  “경거망동이 무슨 뜻인지부터 설명해 줘야 합니다. 소린.”


  발린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물론 그 전에 또 다른 경거망동을 하러 갈 테지만.”


  부러 익살을 부려봤지만 소린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한 전사들도 긴장하게 하는 그 기세가 조카들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아이들 상대로 지나치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린 역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두 소용돌이가 깬 후부터 온종일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집안이었다. 찰나나마 고요한 게 어딘가. 맞은 편에 앉아있던 드왈린은 대놓고 골머리 앓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저 애들을 멈추려면 소린이 하루 종일 노려 보고 있어도 모자라오. 난 가끔 소린에게 모든 일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노려보고만 있어 달라고 청하고 싶어진다고.’

  언젠가 아이들이 동네 토끼장을 다 부숴놓은 날, 드왈린이 이를 갈며 한 말이었다. ‘그야 그렇긴 하지.’ 발린은 아우의 의견에 건성으로 동의했었다. 사실 소린은 그러고 싶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는 구태여 하지 않았다.


  - 그러니 어린 왕자들이 어서 제 삼촌 낯이 좀 풀어질 만큼 자라주면 좋을 텐데. 


  디스의 아이들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깜짝 놀랄 만큼 무럭무럭 자라났다. 건강한 드워프 아이들이 다 그렇듯, 아니 그보다는 좀 더 개구지게. 에레보르에서 쫓겨난 후 처음으로 태어난 왕가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 외의 후손이 더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남편이 죽어버린 후 디스는 갈수록 몸이 약해지고 있었다. 소린은 제 가정을 꾸리기에는 너무 짊어진 게 많았다. 동생을 지켜야 했고, 조카들을 지켜야 했고, 저와 사정이 비슷한 백성들을 지켜야 했고…….


  드왈린의 말마따나 두 아이들을 멈출 수 있는 건 소린 뿐이었다. 소린의 꾸중은 그리 긴 편은 아니었다. 그는 지그시 아이들을 내려다보다가 한 두 마디 이르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은 삼촌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저대로 둔다면 아이들은 소린이 돌아설 때까지 저렇게 버틸 것이다. 

  항상 그랬다. 발린이 온갖 말로 구워삶고 드왈린이 너른 팔 안에 가둬도 기어이 빠져나가는 다람쥐 같은 녀석들이 소린이 꾸중할 때만은 용케 조용했다. 그러고 보면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 엉뚱한 데서 숙질간의 닮은 점을 찾아내는 발린이었다.

   킬리가 언제나 웃기만 한다면, 소린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죄다 ‘지켜야 한다는 다짐’과 맞바꾼다. 정이 크면 클수록 의무감도 버거워진다. 버거움에 잠을 못 이루면서도 결코 짐을 내려놓으려 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을 사랑하니까. 그들이 원래 받아야 하는 몫 전부를 합친 만큼.


  “생각해 볼 일입니다. 소린.”


  반년 전, 청색산맥 근처에 오크가 어른거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행히 곧 엉뚱한 인간 도적들의 흔적임이 밝혀졌지만 청색산맥은 아주 오랫동안 술렁거렸다. 오인이 달여준 특제 수면제를 마시고도 소린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드왈린이 대신 번을 돌겠다고 억지로 붙들어 둔 날에나 간신히 눈을 붙였을까. 아무리 잠이 얕은 소린이라도 무리였는지 낯빛이 초췌해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어둑한 촛불 아래서 그 얼굴을 마주보고 있자니 시체 꼴이 따로 없었다. 발린은 들여다보던 지도는 밀쳐두고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죽은 이들의 몫까지 아이들을 지키겠다는 겁니까. 죽은 이들 대신 아이들을 지키겠다는 겁니까.”


  소린은 피식 웃었던가. 거의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것도 웃음이라 할 수 있다면. 


  “그걸 구분한다고 해서 내가 그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달라지나?” 

  “아니요. 그 둘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건……"

  “그 아이들이 나 외의 다른 누구의 보호도 받을 수 없다는 건 변하지 않아.”

  “당신이 지키지 못한 게 아니에요. 아이들도 지켜낼 거고요.”


  발린은 여러 번 표현을 바꾸어 소린을 설득했다. 소린은 식탁 구석으로 밀려난 지도를 끌어 왔다. 그것으로 답은 끝난 것이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적어도 아이들이 다 자랄 때까지는 그럴 것이다. 


  

  “자, 어머니에게 가서 다시 머리 정돈이나 해라. 그리고 이번엔 제발 멀쩡한 꼴로 방앗간에 다녀오는 거다.”


  드왈린이 아이들의 어깨를 툭 떠밀었다. 아이들이 식탁 쪽으로 넙죽 절을 하고 뛰어나갔다. 팔랑팔랑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빛났다. 열 발자국도 지나지 않아 다시 까르륵!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저대로 또 개울에나 뛰어들테지. 드왈린은 바깥을 내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발린이 소린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그제야 미간에서 손을 뗀 소린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누굴 닮은 건지.”

  “그야 당연히 제 어머니 아닙니까?”


  드왈린이 뭔가 떠오른 듯 씩 웃었다. 


  “프레린도 빼놓을 수 없지요.”

  “아, 프레린. 그렇군.”

  “프레린이 처음 조랑말을 받은 날이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 중 하나였죠. 이제 말 노릇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날은 정말 전사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지.”


  세 드워프는 ‘프레린의 전설’을 한참 들쑤셨다. 에레보르의 황금에도 밀리지 않을, 조상님들은 상상도 못해봤을 그 사건 사고들. 드워프들에게서만 전해오는 수많은 전설 중에서도, 그들 셋만이 알고 있는 그 빛나는 이야기들. 


  “그러고 보면 프레린과 가장 잘 어울려준 건 소린이었는데.”

  “아우를 돌보는 건 형의 당여한 의무야.”

  “아니, 소린은 분명 프레린에게 물렀어요.”

  “무르기만 한 게 아냐. 분명히 즐겼다고. 프레린이 도끼로 내 머리카락 반을 날려 버렸을 때 어찌나 피식거리던지. 소린. 아니라고 할 겁니까?”

  “……그건 자네가 하루 종일 비통한 얼굴을 하고 다녀서지!”


  소린은 일일이 맞받아쳤지만 몰리기 시작한 형국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발린과 드왈린 형제는 두린 왕가 남매들의 일화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만약 디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 드왈린의 입을 땜해버리겠다고 팔을 걷어붙였을 것이다. 둘의 입을 덥석 틀어막고 이렇게 외쳤겠지. ‘내 아이들에게도 그 이야기를 다 해줄 참이야?!’


  “마치 자네들은 그런 일 전혀 없다는 듯 말하는군.”


  결국 벼랑 끝에 몰린 소린이 최후의 반항을 시도했다.


  “우린 안 그랬습니다.”


  눈까지 동시에 꿈벅이며 받아치는 형제였다. 


  “그럴리가?”

  “드왈린은 어렸을 때부터 정말 재미없는 녀석이었죠. 농담이라는 걸 몰랐어요.”

  “그러는 형님이야말로 쓸데없이 책이나 붙들고 있으면서 내 상대는 해주지도 않았잖소. 힘만 세다고 은근히 무시했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소?”

  ”뭐? 너한테 그 정도 눈치가 있었단 말이냐?”

  ”흥, 발린 건방진 거 모르던 드워프가 있었을까봐? 아버님이 지금 형님을 본다면 정말 놀랄게요. 그 똥똥하고 짤막한 발린이 제법 참모 노릇까지 하니 말이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늙은 형제의 설전이 벌어졌다. 형님은 턱을 한껏 젖히고, 아우는 부러 어깨를 구부정하니 구부린 채였다. 아우는 팔을 걷어붙였고 형님은 고개를 모로 꼬며 비웃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식탁을 밟고 올라서든가 아니면 아예 식탁을 걷어차버릴지도 모를 상황이 되었을 때 –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듣고 형제는 고개를 돌렸다. 소린은 입을 가리고 있었으나 웃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혈기가 왕성한 걸 보니 보기 좋군. 드워프들의 돈독한 형제애는 역시 다른 종족들과는 비할 바가 못돼.”

  “아니, 소린. 이건 어디까지나 드왈린이…….”

  “그래. 자네들을 보니 조카들에 대해서도 한결 마음이 놓여.”


  소린은 가뿐하게 일어나더니 집밖으로 향했다. ‘그럼 아침도 다 먹었으니 이만 나가 볼까.’ 확실히, 근래 어느 때보다도 가벼워 뵈는 발걸음이었다. 발린은 개울가로 내려가는 소린의 뒷모습을 보다 그만 푹 웃어 버렸다. 그래. 어쨌든 지금 소린의 아침 첫번째 용무는 어린 조카들을 개울가나 바위 틈에서 건져내는 것이니까. 아이들은 지켜내야 했다. 아이들은 정말 소중했다. 과거를 웃으며 얘기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그들 전부보다 더 귀했다. 

  끝내 항복하지 않은 드왈린이 집 밖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아무튼, 우리는 안 그랬단 말입니다!”



- End? - 



------------------


...어쩐지 제목이 안 정해진다 했더니. 또 엄청 이것저것 잡탕으로 섞였어. 구성은 어디 갔습니까? 아무리 팬픽이라고 해도 이렇게 자동기술 해도 되는 겁니까? 생각이란 걸 하고 써 제발. 


그래서 이 글의 의도는 뭔가. 개그인가? 시리어스인가? 개그하다 시리어스하다 개그해...네. 오랫동안 글을 안 쓰고 놀려두면 이런 사태가 벌어집니다. 아니 그냥 내가 존못이라서 으끄흑 흐끄윽.


시작은 망충한 형제 사고질을 보며, 자기들 어린 시절을 상기하는 어른들이었음. 그 상태에서 한 달 가까이 방치하다 다시 잡으니 그 사이 추가된 생각들이 붙으면서... 음. 아니 전에도 내용이 없었지만 이건 정말 썰같네. 썰이야. 썰이군. 원래는 이것보다는 킬리랑 필리가 더 나왔어야 할 것 같은데... 애들로 깨발랄짓 하려던 걸 어른들로 하고 있다? 역시 나는 애들을 못 쓰는 것인가?


뭐 어쨌든 팬픽답게 써진 팬픽... 아니 썰이니까. 고칠 곳이 여기 저기 보이지만 일단 만족. 제목은 여전히 미정.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호빗 팬픽 2호? 


애정을 더 풀어보자면: 드워프의 의리 좋아합니다. 형제애 좋아합니다. 신념 좋아합니다. 타종족에게 매우 배타적이고 옹졸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신뢰라는 말을 묵직하게 쓰는 종족이 또 없는 것 같아요. 피를 나누고 시간을 나눈 동족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은 정말 대단하고./// 피터 잭슨이 드워프 열세명 넣느라 죽을 고생 했으면서도 기어이 만들어낸 이유를 알겠달까. 말마따나 비극적이고도 유쾌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고요. 그래서 보푸르가 좋다고 보푸르가 언젠가 보푸르도 쓰고 싶은데 나만의 설정 돌아가고 있는데 그건 대체 언제 쓸까... 아니 왜 얘기가 기승전보푸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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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켄스톤

Swimming/etc 2013. 1. 26. 06:09

소설 후반부(영화 2or3부 추정) 스포일러 있습니다. 







  -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지?


  드워프 왕의 일갈이 홀을 울렸다. 노기가 산의 뿌리에서부터 올라온 듯한 노기가 엉겨붙어 있었다. 왕을 마주 보고 선 호빗이 일순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던 드워프들 중 아무도 감히 나서 반인족을 부축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노하고 당혹한 채 그대로 돌로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침묵하고 있었으나, 모두를 휩싼 의문은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단 말인가? 소리 없는 질타가 호빗의 어깨를 내리눌렀고 그는 두 눈을 꾹 내리감았다. 그들이 밟고 서 있는 황금무더기에서 난반사된 빛이 유난히 차고 시려웠다. 


  - 어떻게 감히!


  호빗은 지나치게 담담했다. 적어도 왕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감히 두린 왕가의 상징, 재산, 산의 심장돌을 훔친 도적. 안락한 삶이 그리워 적들의 손에 보물을 넘겨준 배신자. 어떻게 이토록 작고 비열한 자에게 심장돌을 유린당할 수 있단 말인가? 고비를 수없이 넘겨 간신히 되찾은 고향에서 또 한 번 약탈당했다. 이번 약탈자는 이 시대 최강의 용이 아니었다. 거대한 덩치나 강력한 마법, 입에서 내뿜는 화염도 없었다. 한 주먹에 멱살을 움켜쥐면 달랑 들어 올릴 수 있는 반인족에 불과했다. 

  어떻게 그의 원정단에 이런 배신자가 끼어 있었단 말인가? 왕은 호빗을 노려보았다. 차라리 호빗이 심장돌을 삼켰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를 조각내 돌을 되찾았을 테니까. 하지만 호빗은 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자신에게 그 돌의 처분권이 있노라 주장하고 있었다. 

  어떻게 감히 그가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어째서 그는 그런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르고는 왕 앞에 꿇어 엎드리지 않는 것인가. 호빗은 당장 빌며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자신이 몇 번이고 왕의 목숨을 살려줬던 것을 들먹이며 흥정하려 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적반하장으로 저 조막만 한 어깨를 떳떳이 펴고는 그와 맞서고 있는 것이다. 낯색은 창백할망정 눈빛은 흔들리지 않는다. 안타까워하고 있지만 죄를 청하지는 않는다. 그를 노려보면 볼수록 왕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자는 자신을 위해 제 덩치의 세 배는 되었을 오크에게 달려들었던 그 호빗이었다. 


  그래. 좀도둑보다는 야채장수가 어울리는 그 반인족. 칼은 쥐어본 적도 없고 나귀 등에 오르는 데도 온갖 유난을 떨었던 얼간이. 그들의 험난하고 위대한 원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좀스러운 호빗.

그리고 여기까지 그들을 이끌어온 원정단의 일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평생 익숙했던 감각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서늘하고, 비릿하고, 저주스러운 통증. 배신당했다는 자각. 격분이 머리를 내리치고 가슴팍을 걷어찬다. 어이 없게도 두린의 후손은 이 작고 변변찮은 반인족에게 또 배신 당했다

  또 한 번. 다시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배신감은 신뢰했던 자에게서 믿음을 거둘 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신뢰했던 모습 그대로 제 적으로 나타났을 때 생기는 것이다. 등을 맡겼던 단검이 제 뒷목을 겨눌 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 왕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수십년간 그 단검 날 끝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가 처음 세상이 그들을 져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들판에 흩어진 동족들을 버려둔 채 자신들의 안전한 숲으로 돌아가던 엘프군단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부르지 않았다. 왕가가 번성하던 무렵 찾아주었던 자들 중 단 한 세력이라도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면, 수많은 드워프들이 그리 들판에 뼈를 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용에게 쫓겨난 왕가는 주정꾼들의 노래에조차 오르내리지 않았다. 그들의 긍지와 부를 칭송하던 자들은 싸늘한 시선조차 그들과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왕이 왕국을 되찾지 않는 한 전설은 오욕이 되었고 고향은 치욕의 땅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왕좌를 장식하던 심장돌은 탐욕스러운 용의 노리개로 전락해 버릴 터이고........



  그리고 지금 심장돌은 하필 왕에게 첫번째 배신감을 맛보게 했던 바로 그 자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 세상 일이란 얼마나 우스운가. 왕은 제가 앉아있던 왕좌를 돌아보았다. 왕좌의 상부에는 섬세한 황금 격자가 장식되어 있었고 그 중간은 텅 비어 있었다. 거기가 할아버지가 만든 심장돌의 원래 자리였다. 심장돌. 그 존재를 아는 이는 모두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었던 왕국의 정수. 용에게 그것을 빼앗기기 전까지만 해도 왕은 돌을 저주했었다. 할아버지가 그 보석을 가슴에 안은 채 어르는 것을 먼 발치에서 볼 때마다 얼마나 진저리쳤던가. 궁전 가득 쌓인 황금 중 어떤 것도 그 돌에 견줄만하지 못하다는 재촉이 떨어질 때마다 얼마나 그 돌을 호수에 던져버리고 싶었던가. 돌은 할아버지로 하여금 존엄을 잃게 했고 왕국을 위험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온 지금에 이르러서는 에레보르의 모든 황금과도 바꿀 수 없는 왕가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돌은 왕의 심장이었다. 왕이 다시 왕좌를 발견했을 때부터 그는 제자리에 돌아와 있는 심장돌을 보고 있었다. 심장돌뿐만이 아니었다. 왕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지금 앞에 서 있는 열 두명의 일원들 뒤로 홀을 가득 매우고 있는 제 백성들이. 다시 그들을 이 곳으로 데려올 것이다. 번성시킬 것이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줄 것이다. 산밑왕 스로르가 이루었던 영광과 위세를 재현해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심장돌은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그와, 그와 함께 한 열두명의 동족들과, 그들의 아이 모두를 위해. 반드시. 


  왕이 호빗에게 선언했다. 


  - 네 몫을 주장하겠다면, 좋다. 너를 살려 주지. 그것으로 내가 너에게 지불해야 할 대가는 다 치루었다. 당장 에레보르에서 떠나라. 내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눈 앞에서 사라져!


   둘러선 동족들 중 몇이 눈에 띄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빗은 입술을 한 번 축이더니, 어깨를 한 번 추스르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저 제 갈길을 간다는 듯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걸이였다. 오히려 보는 쪽에서 빨리 도망치라고 재촉하고 싶을 정도였다. 왕의 마지막 충고가 완고한 벽이 되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착각하지 마라. 너는 내게 그 돌이 아니라 네 목숨을 받은 것이다. 


  산밑왕은 배신자들과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유든, 어떤 경로든, 배신자들이 일족의 유산을 나누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왕이 이 간 큰 좀도둑을 살려 보내는 것은 그 이상 이하 어떤 의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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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러니까. 이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인데요. 

그 스란두일이 그 아르캔스톤을 가지고 있는 걸 그 소린이 보게 하다니! 으하하 피잭 ! 당신이란 드워프는 정말! 으하하하! 


+ 아르켄스톤이라고 쓰는 것보다는 심장돌이라고 쓰는 게 더 와닿아서 글 안에서는 심장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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