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 제 3인류

Swimming/BOOKS 2013. 12. 21. 19:17
...간만에 이러저러한 일로 읽은 베르베르. 음. 읽기 전부터 편견에 차 있었고 다 읽은 후에는 더 강화됨. 낄낄. 







   두 권으로 구성된 소설을 꾹꾹 읽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문장 아래 작은 활자로 추가된 글자 몇 개를 보고 당황한다. - 1부 끝 - 맙소사. 이게 1부라고? 즉 2부가 나올 거란 말인가? 아. 정말 다행이다. 그가 2부를 나중에 내 줘서. 덕분에 2부는 리뷰를 쓰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만세. 만세. 만세. 

  적당한 기발함을 적당히 배포할 줄 아는 센스.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한 내 감상이다. '적당한 기발함'이라는 게 성립 가능한 표현이라면 말이다. 이 소설은 가볍고, 심각하지 않고, 적당히 심심풀이로 보기 좋다. 적당한 유머 감각과 밉보이지 않을 지성, 감성을 갖춘 인물들이 나와 몇가지 착상을 주고 받는다. 그 와중 베르베르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상식 사전이 '에드몽 웰즈' - 주인공의 증조부라는 신선격 존재를 빌어 마구 투입된다.  이런 구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베르베르는 이야기를 매끈하게 술술 풀어나가는 작가다. 내가 적당히라는 말을 적당한 정도를 넘어서 남발하고 있는데, 적당히가 왜, 나쁜가? 소설은 일차적으로 즐기기 위해 쓰고 읽는 것이고, 대다수의 사람이 즐기기에 나쁘지 않다면 그건 장점 아닌가.  
  
  비록 이 소설이 '진화'와 '현세계의 편견을 뛰어넘는 시도'를 다루는데도 불구하고 극히 '편견'에 휩싸여 있으며, 편견이 으레 그렇듯 자화자찬과 팔 안으로 굽기가 보인다고 해도 말이다. 작가는 '공평'하고 '진보'적인 시각으로 편견에 휩싸인 무리들을 까내린다. 자신들도 인종 차별 당했음에도 어느새 백인들처럼 피그미 족 사람들을 끔찍하게 학대하는 반투족이라든가, '여성 인권 묵살의 상징'인 차도르를 옹호하여 프랑스 출신 페미니스트와 드잡이하는 이슬람권 여성들 말이다. 작가는 신문에서 보도되는 그런 사건들을 싹 모집해 자신의 책 안에서 신나게 섞었다. 쉐킷 쉐킷~.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된 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전혀 없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냐고? 그렇게 보일 만한 증거가 책 도처에 깔려 있으니까.

이 소설에서 피그미족과 아마조니스의 가치를 알아 보는 이들은 '소르본 대학의 공모전'에 입상한 프랑스 백인 학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지적이고 일정 이상 부유한 백인 부모 아래에서 자랐다. 적어도 그들이 이 세계에서 약자 계층에 속하지는 않는다. (남녀간 차별을 제외하고 본다면 말이다.) 이들은 그 부모들에게서 너희가 세계를 구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 계시에 따르든, 반하든 결국 그들은 정말 그렇게 해낸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가장 깨달은 이, 이자 주제를 전하는 이들은  '중산층 이상 백인 인텔리' 사회의 일원인 것이다. 이 소설을 그렇게 보는 건 쿨하지 못하다고? 이 소설은 그런 얘기를 하는 소설이 아니라고? 실컷 이 세계의 편견과 아집을 보여주면서 왜 주인공에게는 그걸 적용하면 안되나? 그럼 공평하게 주인공 남녀가 그런 자신의 소속을 뛰어넘는 인식을 보여줬는지 살펴 보자고. 음. 어디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부모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허덕이는 걸 보고 한심하다고 하려는 게 아니다. 그 부모의 틀에서 벗어나 가는 곳이 '무려 전생으로의 회귀'니까 하는 말이지. 작가가 짜놓은 틀에서는 그런 인식을 벗어날 필요조차 없다. 이미 그들의 쿨함과 진보적 태도만으로 당면한 위기를 해결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얘기해서, 이 소설에서는 세계의 편견을 깨닫는 것마저 (서양 세계의 사고관으로 무장한) 백인들인 것이다. 그들이 체험하는 피그미족과 아마조니스의 의식은 또 어떤가. 새삼 말하는 게 허무할 만큼 신비주의에 쩔어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는 그런 '초월적인 해결책'을 알아 보는 것마저 백인들의 역할인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 남녀의 그 기발한 영감은 그들이 팔천년 전 전생에 '위대한 거인들'이었을 때 이미 시도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순환 고리란 거다. 이 소설은 진화를 얘기하지만 그 '진화 방법'은 '옛날 옛적에 있었던 일의 재현, 반복'이다. 법칙에 따르는 순환이 어떻게 진짜 변화란 말인가? 그 법칙이 바로 지금의 모순을 찍어낸 틀인데. 

  그런데 적어도 이 두 권 짜리 '1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여섯 명의 주요 인물 중 아무도 자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한 지성체를 만드는 것에 대한 구태의연한 문제 제기도 나오지 않는다. 아, 그 문제는 너무 구닥다리라 아예 다룰 필요가 없는 것인가? 이들이 쿨한 과학자들이자 아마조네스 전사,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을 되뇌는 군인들이기 때문에, 진보의 첫발을 내딛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얘기는 할 필요조차 없는 건가 보다.
  진보란 가장 뻔한 문제들의 답부터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소설이니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그런 문제가 아니니까 다룰 필요가 없다고 할 수는 있다. 솔까말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미니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거지 걔네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겪는 - 혹은 실험체들이 겪게 되는 윤리적, 정신적 문제가 아니란 건 나도 안다. 그 문제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다뤄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이 소설을 읽을 때 그런 문제들을 떠올렸고, 그게 떠올랐다는 게 이 소설의 구멍으로 느껴졌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 소설은 정말, 구멍 천지니까.

  심지어 그들은 미니 인간들을 만들어 놓고 아주 뻔한 신 롤플레이도 한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지구의 멘트도 공허하고 별 맛이 없다. 지구의 자기 역사 서술은 차라리 과학 교양서 쪽을 보는 게 훨씬 재미있을 정도다. 원래 신화적 서사란 클리셰 난무라지만, 이 소설은 그게 '뻔하게' 느껴진다는 게 문제다. 사상누각이랄까. 공들이지 않은 탑이랄까. 대충 이런 건물에는 이 쯤에 창문이 있고 문은 이쯤에 있겠지 / 하고 슥슥 구멍을 뚫어 놓은 집을 구경하는 것 같다.  베르베르 쯤 되는 다작 작가면 이제 그런 법칙들에는 이골이 나있긴 할테다. 그렇다고 읽는 나한테 '이골이 났다는 걸' 어필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이 소설은 '재미있게 풀 수도 있는 소재'들을 가지고 뻔한 사건들을 연속시킨다. 베르베르 식의 글쓰기 방식을 쭉쭉 펼쳐 나가기는 하지만, 그 안이 텅 비어 있다. 이 소설은 지푸라기 공이다. 그 표면에 지구과학, 생물학, 역사, 문학, 신학, 심리학 등등 온갖 상식들이 잡초 나부랭이들이 붙어 있다. 문체가 가볍고 읽기 편해서 쑥쑥 읽히지만, 따져보면 이 잡초들이 붙어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 아무 잎이나 한두 잎 쯤 떼어내도 지푸라기 공에는 아무 영향도 못 미칠 것 같은 걸. 적당히 재미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은, 시간 떼워야 할 때 읽기 좋은 소설. 2부가 나올 모양임.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 떼워야 할 만큼 시간이 많이 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베르베르의 모든 작품을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일단 내가 베르베르의 모든 작품을 읽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흥분한 채 쓴 내 리뷰는 엄청 조잡하고 건방져 보일 거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이게 베르베르의 글이 아니었거나, 베르베르가 쓴 글이라는 걸 모르고 봤다면 이렇게 툴툴 거렸을까 계속 자문했다. 어차피 이프 온리에는 답이 없으니까, 과연 어땠을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글에 그런 문제들이 있고, 베르베르라는 저자 이름을 단 채 우리 집에 배송되었다는 건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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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

Swimming/BOOKS 2013. 7. 14. 06:00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

 - 슈테판 츠바이크 / 남기철 / 이숲에올빼미 / 2011.11.01




  - 이제는 우리의 삶을 부정할 필요가 없어졌잖아. 우리는 우리가 파괴할 자격이 없는 어떤 것을 파괴하려고 했던 거야. … 한 줌의 돈만 있으면 내 안에서 아직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들을 밖으로 펼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실현될 수 없는, 내가 지금 꺾어버린 이 나뭇가지처럼 시들어가고 있는, 단지 꺾어버렸기 때문에 시들어가고 있는 것들 말이야. 내 안에서 더 자랄 수도 있는 어떤 것들…… 

 -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 – 425~426p



  전쟁이 오스트리아를 덮쳤다. 음식도 돈도 한줄기 미소도, 모든 것이 모자라 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영영 지워지지 않는 그늘이 드리웠다. 숨 막히는 전시 사회, 뼛골까지 삭은 채 시골 우체국에서 시들어가던 여자가 있다. 육 년 동안이나 전쟁터를 떠돌았으나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 남자가 있다. 둘은 대화를 섞자마자 서로가 무엇에 분노하는지, 무엇을 박탈당했는지 이해한다. 출구 없는 세계, 계속 그들을 메마르게 하는 가난, 앙상한 두 손 쥔 채 분노에 떨다 죽어야 한다는 무력감, 서로 묶여 있는 굴레가 같다는 걸 안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리고 마침내 위로할 힘마저 고갈된 그들이 자살을 결심했을 때 마지막으로 남자가 제안한다. 여자가 관리하고 있는 돈으로 그들이 박탈당한 것을 되찾지 않겠냐고. 남자가 횡령을 제의하고 여자가 동의하는 그 순간, 이야기가 멈춘다. 원고가 끝나 버렸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는 두말할 것 없이 미완의 작품이다. 소설은 두 남녀가 마침내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 아무 예고 없이 단절된다. 내용 역시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지 못한 채 불균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는 보잘것없는 우체국 직원 크리스티네가 뜻밖의 호화 호텔 휴가를 누리며 겪게 되는 변신과 몰락을 절반 넘게 다룬다. 딱 일주일, 크리스티네의 단 꿈이 이어진 것은 그녀 인생 28년 중 일주일 뿐이었다. 그동안 여자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천국의 문 안에 들어선다. 너무도 쉽게, 옷 한 벌을 갈아입은 것만으로. 스위스 호텔에서의 여름은 아름다웠다. 원할 때면 언제든 쏟아지는 고급 의상과 장신구, 풍족한 식사와 신사들의 관심. 그곳에서 무책임하고 갑작스럽게 쫓겨났을 때 여자는 처음으로 자신이 전쟁 때문에 무엇을 빼앗겼는지 자각한다.

  독자들은 이 소설의 제목을 보고 흔히 이 호텔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끝날 거로 생각할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특기, 풍부하면서도 입체적이고 드라마틱한 인물 심리 묘사는 이 소설에서도 매 페이지마다 살아있다. 즉 크리스티네의 폭발적 상승과 하락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인 소설이 완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려한 호텔 생활 뒤로, 작가는 다시 길게 크리스티네의 절망을 그린다. 

  그녀는 자신에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들, 그것들과 자신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에 분노한다. 그 영원히 마르지 않는 황금 분수는 터무니없는 공상에 불과한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허름한 우체국 사무실 벽을 원망하게 되는 것은 그녀의 잘못일까? 그저 허영심이라는 열기에 애꿎은 가슴을 태우는 것은 가련한 우체국 직원의 착오일 뿐일까?

  그런 그녀 앞에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열아홉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 인생의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시절을 전쟁에 상납했다. 그 보상으로 그가 받은 것은 국적마저 불명확한 비정규직 인생. 육 년 동안 어린 시절의 꿈도, 생계 유지 수단도 잃은 그에게 남은 건 분노와 수치심뿐이다. 소설 후반부 절반은 그들이 가까워지는 과정과 그에 따른 관계 진전을 메인 스토리로 끌고 간다. 가난한 두 연인의 보잘것없는 연애사이니만큼, 앞쪽의 바쿠스 연회장을 연상시키는 부분과는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변화는 이야기 방식에서 발견된다. 앞 전반부에서 작가는 크리스티네의 스팩터클한 변신을 카메라에 담듯 묘사했고, 크리스티네의 심리 여과 없이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주로 남주인공 페르디난트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즉 페르디난트의 긴 연설, 한탄, 분노에 넘치는 웅변으로 주제 '전쟁에 의해 영영 박탈당한 세대의 괴로움'이 전달되는 것이다. 


  - 아니야. 프란츠. 내가 자네를 비난하는 게 아니야. 자네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알고 있어. –중략- 자네가 선량한 친구라는 것을 잘 알아.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잘못된 점이자 어리석었던 점이야. 우리는 너무 착하고, 의심할 줄도 몰랐어. 그래서 우리는 이용만 당했지.

    하지만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앞으로 절대 안 속을 거야. 내가 아직 사지가 멀쩡하고 목발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으니 행복한 것 아니냐는 따위의 이야기에 설득당하지도 않을 거야. 숨 쉴 수 있고 먹을거리 있으면 충분하지 않으냐는 이야기, 그 정도면 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에 설득 당하지도 않을 거야.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신도, 국가도, 삶의 의미라는 것도 믿지 않아. 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생존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을 거야. 그런 권리를 찾지 못하는 한, 세상이 내 인생을 빼앗아 갔고 나를 속였다고 생각할 거야.

   - 본문 318p


  페르디난트의 감정상태에 대한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는 크리스티네의 섬세한 감정 묘사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야기 전달 방식이 페르디난트라는 한 인물의 등장으로 확 바뀌어버리는 것은 완성도 측면에서 볼 때 그리 매끄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크리스티네는 ‘특유의 내성적이고 의존적인 성격 탓인지’ 분명 페르디난트의 말에 동의하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저 공감을 감정적으로 표현하고 그를 감싸줄 뿐이다. 중반까지 휘몰아치는 감정의 파고를 드러내며 더없이 매력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춤추던 크리스티네의 존재감이 확 줄어들어 버리는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이 균형감을 갖추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면 크리스티네의 호텔 유희 부분이 한층 줄어들거나 페르디난트의 등장이 훨씬 빨랐어야 했다.

  또한, 주제 심화 차원에서도 이러한 페르디난트의 난입은 문제를 노출한다. 전쟁에 직접 참가해서 손가락 불구까지 된 페르디난트의 문제의식과 후방에서 가난에 찌든 나날을 보내다 한 차례 화려한 휴가로 충격을 받은 크리스티네의 그것은 절대 같은 층위일 수는 없다. 물론 그 둘을 가두고 있는 거대한 굴레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둘은 ‘이 모든 것이 전쟁 때문이며, 그들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것 또한 전쟁뿐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 둘의 분노가 과연 같은 종류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당장 둘은 상황의 급박함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게다가 페르디난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사회상과 크리스티네가 바라는 회복된 삶의 질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앞쪽에서 섬세하게 묘사되었던 크리스티네가 이런 차이를 무시한 채 덮어놓고 그와 나는 같다고 공감을 표하는 것은 그다지 그녀답지 않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주제 ‘전쟁 이후 피폐해진 젊은이들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성급한 진행인 듯 보인다. 


  이러한 여러 가지 불완전한 요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는 독자를 도취경으로 이끄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읽는 이의 심장을 움켜쥐고 깊이 끌어당기는 힘이 소설 전체에 작용한다. 아무 전조도 없이, 그것도 가장 중요한 순간 이야기가 끊겼는데도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의 상은 흔들리지 않는다. 

  인생의 매 중요한 순간마다 그 순간이 지나갈 때까지 성공 여부는 아무도 얼 수 없지 않은가. 뜨겁게 고민하느라 차갑게 식어가던 두 남녀가 성공할지 안 할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이 총 대신 강탈을 선택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 순간이 그들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다. 그들이 횡령 계획을 진행하든 하지 않든, 모든 일이 잘 풀려 그들이 오래 함께 하든 금방 헤어지든, 성공하든 하지 못하든 그런 차이는 궁극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페르디난트가 짠 장문의 계획서대로 모든 것은 장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구성도 불안정하고 줄거리도 끊긴 소설을 끌고 가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모든 글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발산하기 위한 무대 장치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아주 훌륭한 확성기다. 그는 페르디난트의 입을 통해 직접 전후 오스트리아 사회의 모순과 도태를 고발한다. 크리스티네와 그녀를 둘러싼 호텔 인물스케치를 통해 제 욕망을 상류층의 나태한 양상을 그린 것은 훗날 페르디난트의 비난 실례가 된다. 작가는 실로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 한 쌍을 통해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전체를 상대로 화풀이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화풀이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인물들의 생생함이라는 것이다. 그는 제 매력적인 문투로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의 어조와 행동을 끌어낸다. 그의 묘사로 태어난 인물들은 도자기 사이에서 홀로 피부와 뼈와 피를 나눈 자들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작가는 인물들의 성격과 생각의 변화, 대화의 혼선을 다른 이의 눈과 귀에 확고하게 박아 넣는다. 그는 뻔하고 천박한 욕심들을 단순히 더러운 것 이상으로 채색해낸다. 크리스티네의 허영심도, 페르디난트의 엉뚱한 분노도, 싸구려 호텔에서의 역겹고 초라한 하룻밤마저도 말이다. 그것이 몇 세기 전 섬나라의 실존 여왕이건 가상 설정 속 시골 우체국 여직원이건 츠바이크의 문장을 타고나면 둘 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어느 장르에서건 제 글 속 인물의 심리를 마음껏 펼쳐 보인다. 그의 글에서 긴장감은 인물이 '비밀'을 숨김으로써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모조리, 마음의 흐름까지 그대로 보여주면서 긴장감이 올라간다. 책을 덮고 나면 독자는 나비의 날갯짓을 쫓다 정신 차려보니 화단 한가운데까지 침범한 아이 꼴이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야말로 모든 이야기의 핵심이며 '인간의 감정'만으로 가장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조건에 충실함으로써 츠바이크 소설은 공고한 세계를 구축해 낸다. 자살이나 절도 외에는 '미래'를 얻을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빠른 파멸이냐 조금 더 돌아가는 길이냐 선택의 기로에 선 남녀를 보여준 채 소설은 끝난다. 횡령은 영원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 채' 남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츠바이크의 인물의 생생함은 독자들로 하여금 책장 바깥에서 어른거리는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실재하지 않으나 우리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의 뒷모습을 쫓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잘 쓰인 소설의 마력 아닐까. 이런 마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비록 미완성 작품이라 할지라도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여자가 남자의 시선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을 내밀며 대답한다. - 좋아, 한 번 해보자. 

      - 본문 461p


  결국, 그들은 어떻게 될까? 몇만 프랑을 얻는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중요한 건 그들이 박탈당했다고 믿는 것이 정말 그들이 박탈당한 것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전쟁을 통해 정말 박탈당한 것은 무엇을 박탈당했는지 확인할 능력이다. 그들은 외면에 익숙해지고 핍박에 수치심을 자극당하느라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열병에 걸린 나머지 환상 속 우물을 향해 고개를 처박는 환자들이나 매한가지 상태다. 크리스티네가 전쟁을 통해 잃은 건 안정감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서민의 일상이다. 스위스 호화 호텔에서의 환락의 밤이 그녀가 박탈당해 못 견딜 것은 아니다. 페르디난트는 너무 모멸을 많이 겪은 나머지 화를 내야 할 상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의 예민한 정신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찔러댄 수치심을 가라앉히지 못해 항상 과민상태에 빠져 있다. 그들은 몇만 프랑을 횡령해서 자신들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무엇을 해야 이 끔찍한 예속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모른다. 이 소설의 '열린 결말'이 한없이 씁쓸한 것은 결국 남녀주인공들이 또 다른 수렁으로의 길을 재촉했다는 것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은 어디까지 변신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세계에 사는 독자 나는,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의 탈을 쓴 작가의 열변에 손을 꾹 쥐며 공감한 나는 어디까지 도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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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시

Swimming/BOOKS 2013. 6. 29. 06:12

안도현


얼음 매미


매미가 벗어놓고간 허물 속으로, 눈이 내린다

이 누더기의 주인은 저 광할한 우주 속으로 날아갔는데

눈은 비좁은 구멍 속으로
자꾸자꾸 내린다. 그리하여 쌓인다

하늘은 몇 번이나 녹았다가 얼고,

(이 겨울이 지날 때쯤 나는 매미 허물을 가만히 벗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날아갈 줄도모르고, 발을 가슴께로 그러모은
얼음 매미 한 마리가 거기 웅크리고 있겠지







빗소리 듣는 동안


1970년대 편물점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는 것철머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이게 양푼 밥을 누나들이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히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 듣는 동안......
연못물은 젖이 불어
이 세상 들녘을 다 먹이고도 남았다네
미루나무 같은 내 장딴지에도 그냥, 살이 올랐다네


도둑들

생각해보면, 딱 한 번이었다
내 열두어 살쯤에 기역자 손전등 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푸석하고 컴컴해진 초가집 처마 속으로 잽싸게 손을 밀어넣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밤 내 손끝에 닿던 물큰하고 뜨끈한 그것,
그게 잠자던 참새의 팔딱이는 심장이었는지, 깃털 속에 접어둔 발가락이었는지, 아니면 깜빡이던 곤한 눈꺼풀이거나 잔득잔득한 눈곱 같은 것이었는지,
어쩔 줄 모르고 화들짝 내 손끝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던, 그것 때문이었다

나는 사다리 위에서 슬퍼져서 한 발짝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허공을 치며 소리 내어 엉엉 울지도 못하고, 내 이마 높이에 와 머물던 하늘 한귀퉁이에서 나 대신 울어주던 별들만 쳐다보았다
정말 별들이 참새같이 까맣게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울던 밤이었따

네 몸속에 처음 손을 넣어보던 날도 그랬다
나는 오래 흐른 강물이 바닥에 닿는 순간 멈칫 하는 때를 생각했고
해가 달의 눈을 가려 지상의 모든 전깃불이 꺼지는 월식의 밤을 생각했지만,
세상 밖에서 너무 많은 것을 만진
내 손끝은, 나는 너를 훔치는 도둑은 아닌가 싶었다
네가 뜨거워진 몸을 뒤척이며 별처럼 슬프게 우는 소리를 내던 그 밤이었다



3월에 내리는 눈


3월도 스무 닷새나 눈곱을 떼어냈는데
참말로 눈이 내리는 것입니다

도톰하게 입술 내밀고 있는 목련 꽃망울들한테
도대체 뜬금없이 달려들어 뭘 어쩌자는 것입니까?
꽃망울 속에 들어 있는 꽃들이
제 귓볼을 만지며 앗 뜨거워, 뜨거워하며
난감해하는 모양 보자는 것 아닙니까?

자글자글 햇빛이 끓는 봄의 냄비 뚜껑을
좀 열어보려다가
이거 신세 조지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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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진개드립

Swimming/BOOKS 2013. 5. 21. 13:37

  "자연은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비극들에 대해 무관심하다. 죄 없는 사람이 매달려 죽는다고 흥분한 교수목은 지금까지 단 한 그루도 없었다. 전장의 풀도 쓰러진 자를 위해 애도하지 않는다."


  이걸 누가 썼을까? 당연히 나다. 소설 [철저한 중도]에서 쓴 글이다. 차모니아에서 나 말고 누가 이렇듯 심오한 표현을 하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연이 별 마찰 없이 움직인다고 해도 그 속에 자비로운 영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차모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체의 행동조차도 철두철미하리만치 이기적이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뭔가? 무진장 나이 들었다고 해서 더 고귀한 형태의 지식과 도덕을 소유해야 할까? 어쩌다가 차모니아에서는 치매를 지혜와 끈질기게 혼동하는 일이 벌어졌나? 우리의 광신적인 연금생활자 숭배에는 도대체 어떤 장점이 있는가? '500세 이상은 면세. 200세 이하는 관직 금지. 1000세부터는 모든 박물관 무료 입장. 350세부터 의치 무료.' 각종 특권과 세금 혜택은 청소년들이 누리는 게 후렀니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이런 혜택으로 아직 뭔가 할 수 있을 때 말이다. 미래를 위해 뭔가 배우도록 박물관을 찾아야 할 주체는 우리 청소년들이다. 늙어 덜덜거리는 노인들이 대가의 작품 앞에서 청소년들의 시야를 가려서 좋을 게 뭔가? 늙은 개는 더 이상 새로운 재주를 배우지 않는 법이다. 


  내가 별 감탄이들의 도덕적인 성숙에 관해 특이한 견해를 가졌다고 해서 놀랄 독자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우크질리어드 년 동안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도 떠오르는 생각이라고는 자기들이 양송이버섯을 즐기기 위해 어린이 둘을 멸망의 길로 보내는 것뿐이었다. 나이와 경험은 지적 능력이나 도덕적 성숙과는 거의, 또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걸까? 명청하게 태어나면 천 살을 먹어도 아무 소용이 없나? 왜 군대 지도층은 대부분 나이가 많고, 보병들은 언제나 꽃처럼 젊은가? 우리의 희망인 젊은이들을 불구덩이로 보내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여러분은 내 정치적 견해를 순진하다고 간주할 수도 있지만, 전쟁이라는 충돌 상황이 벌어지면 연금생활자들을 전장으로 내보내는 게 훨씬 옳지 않을까? 이런 종류의 전투는 금방 끝날 것이다. 내가 장담한다. 

  군인들은 양쪽 군대가 서로 부딪치기 전, 전장으로 가는 길에서 잠이 들거나 자연사할 테니까. 거기서 쏘는 거라곤 오줌줄기뿐이겠지. 자, 이제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 



엔젤과 크레테 -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가 쓴 차모니아의 동화 /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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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창조적 작가와 몽상 중

Swimming/BOOKS 2011. 12. 30. 13:08
문학가가 아닌 전문가의 이야기. 문학의 유희성에 대한 진지한 조명. 문학의 가치에 대한 존중.


  문학적 성향의 최초의 흔적들을 찾아야 한다면 어린아이드레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어린아이가 가장 애착을 느끼고 몰두하는 것은 놀이다. 어쩌면 우리는 놀고 있는 아이야말로 자김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면에서,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세계의 사물들을 새로운 질서에 맞추어 자신의 취향에 따라 배치하고 있다는 면에서 마치 한 사람의 시인처럼 행동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아이가 그 세계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일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이는 자신의 놀이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으며 엄청난 양의 정의적 움직임을 놀이 속에 쏟아 붓게 된다. 놀이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진지함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일 것이다.(유희의 반의어는 진지함보다도 현실)
(중략)
  문학 창조자는 결국 놀이를 하는 아이와 동일한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역시 몽상적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고 그 세계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실과 자신의 몽상적 세계를 선명하게 구분하면서도 창조 행위에 엄청난 양의 정의적 움직임을 쏟고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문학 창조라는 세계의 비현실성에서부터 예술적 기법에 관계된 매우 중요한 결과들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현실 그대로라면 즐거움을 제공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몽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변화되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로는 고통스러운 감정들이지만 그 감정들은 문학 창조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는 관객들에게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중략) 
  사춘기를 지나 청년이 되면 놀이를 중단하고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그가 놀이에서 얻을 수 있었던 즐거움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한번 경험한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대상을 바꿀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단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단념이 아니라 한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대체 작업인 것이다. 대용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청년이 놀이를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그가 포기하는 것ㅇ느 다른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그가 실제의 대상들에게 기대어 자신의 놀이를 보강했던 그 보강 자체다. 이제 그는 놀이를 하는 대신 자신의 몽상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는 구름잡는 이야기 속에서 모래성을 쌓는 것이다. 흔히 비몽사몽이라고 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어느 순간에서건 이런 몽상의 세계를 그려 보았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중략)

 - 성인과 아이의 놀이의 차이

  성인의 몽상은 어린아이의 놀이보다 관찰하기 훨씬 어렵다. (중략) 아이들은 그들이 결코 어른들을 위해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어른들에게 놀이를 숨기지 않는다. 반면에 성인이라면 잣니이 빠져있는 몽상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숨기려고 하면서 (중략) 이런 이유로 오직 자신만이 그런 몽상들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또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완벽하게 유사한 몽상적 차조물들을 볼 수 있다는 느낌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중략)

 - 몽상의 몇가지 특징

  행복한 사람들은 몽상을 좇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오직 만족을 모르는 자들만이 몽상을 좇을지도 모른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몽상을 움직이는 힘이고, 모든 몽상은 욕망의 완결이며 동시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보정이다. (자신의 격을 높이려는 욕망과 성적 욕망) 


   (중략) 

  - 백일몽의 법칙 

  몽상은 세 개의 각기 다른 시간 사이를, 다시 말해 재현 행위의 세 순간 사이를 부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 활동은 현재의 인상에 및락되어 있는데, 이 현재의 인상이란 개인이 품고 있는 어떤 큰 욕망을 일깨우는 한 계기이기도 하다. 이 계기에서 시작해 우리의 정신 활동은 이전의 경험으로 되돌아간다. 정신 활동은 이때 미래와 연관된 상황을 창조해 내는데, 이 상황이 욕망이 충족되는 상황, 더 정확히 말해 낮에 꾸는 꿈 혹은 몽상인 것이다. (중략) 시간을 가로지르는 욕망의 도화선이 요컨대 과거.현재.미래라는 세 시간대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불만족 - 과거 모델 통해 - 미래 이미지로 만들기)

(중략)


- 낮꿈과 창작의 차이  
  비록 그들(낮꿈러)이  우리에게 자신들이 품고 있는 몽상을 털어놓는다 해도 우리가 그들의 고백을 들으면 결코 어떤 즐거움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몽상들은 거부감을 주거나 기껏해야 냉담한 반응만을 얻게 된다. 그러나 만일 창조적인 작가들이 작업을 학나 혹은 우리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몽상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들려줄 때에는 반대로 진한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여러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일까? (중략) 바로 이 기교 속에 아마도 진정한 시학이 존재할 것이다. 이 기교는 두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창조자는 낮에 꾸는 꿈을 변형시키거나 베일로 가림으로써 자아 예찬이 주조를 이루는 꿈의 성격을 약화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몽상을 통해 순수하게 형식적인, 다시 말해 미학적인 즐거움을 제공하여 독자들을 유희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즐거움은 깊은 정신적 움직임들에서 시작하는 좀더 큰 즐거움에 대한 욕구를 상쇄시킬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을 우리는 흔히 상여 유혹이라거나 혹은 사전 쾌락이라고 불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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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 루이 조르주 탱

Swimming/BOOKS 2011. 12. 27. 06:03

부제는 '이성애와 동성애 그 대결의 기록'으로 잡아놨지만, 너무 자극적이거나 점잖 빼는 부제들이 흔히 그렇듯 원문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동성애와 이성애 간의 싸움보다는 오늘날의 이성애 개념이 지배적 힘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중세부터 현대까지, 세 가지 방향에서 풀어놓은 책이다. 동성애와 이성애 간의 알력은 이 세 방향 중 첫 번째, 중세 기사 사회(남성 동성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나올 뿐, 이 다음 이어지는 신학적 관점과 의학적 관점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뭐 표지부터가 참... 어설프게 외설적이긴 한데 말이지. 

  원인보다는 현상 진행 설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각 방향에 따른 예시가 다양하다. 내용이 정밀하다기보다는 많은 사람이 접근하기 용이한 책. 굉장히 술술 읽힌다. 일단 오늘날의 이성애 개념이 어느 시대에나 '정상'이며 '의문시하는 것부터 배격되는 인생 규칙'은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은 효과적으로 전달됨. 예시는 치밀하고 말투는 위트있다. 후룩 후룩 잘 읽힌다. 

  다만 현상 설명에 치중하다보니 '왜'가 약한 건 아쉬움.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이성애가 부각되기 전 사회와 후 사회의 차이는 '남성사회'에서 '여성'을 (도구로서나마) 사회에 편입시키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그런 변화는 왜 일어났는가?  책은 서구 문화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설명하고 있는 현상은 사실 여러 문화권의 동성 집단에서 흔히 보이는 것들인데, '왜'가 설명되었다면 서구 성애 담론 양상에서 한 발 더 나가지 않았을까 싶어 아쉽다. 

  그리고 아무리 근대 이전까지 여권이 시망이었고 사료도 얼마 안 남아 있다고 하지만 여성 동성애 혹은 여성 동성 사회에 대한 설명이 너무 없는 것도 좀 씁쓸함. 여자가 동성 문화권에서나 이성애 문화권에서나 주체적으로 다뤄진 적이 거의 없다는 건 잘 아는데 그래도 좀.....'ㅠ' 오늘날 이성애담론이 의문시 자체가 힘들 정도로 지배적이고 폭력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에 대한 반발로 이런 작업을 수행한다면 당연히 여성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거 아님?'ㅠ' 

  저자는 - 이성애의 관습은 성별에 따른 사회관계, 일반적으로 남성의 지배가 행사하는 관계를 확실히 구조화하는 사회의 객관적인 요구- 라고 했는데 책에서 다룬 데까지만 보면 적어도 중세 동성 사회 문화도 어차피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구조에 따라 만들어진 것 아닌가? 물롱 동성애 문화라고 해서 성적 편견에서 자유로울 거라고는 생각 안합미다. 이성애 문화건 남성 중심 동성애 문화건 여성 중심 동성애 문화건, 이성에게나 동성 양쪽에게 매우 매우 편견 쩔 수 있음.ㅋ

  다만, 이성애 문화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사회적 요인을 저렇게 잡았다면 동성 사회 문화 혹은 이성애에 별 관심 없던 문화는 왜 그런 사회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는지 차이점이 드러나야 할 거 아냥.ㅎㅎㅎ 그리고 남자 동성애는 설명이 된다 치고 여성 동성애는 아예 전혀 설명이 안되잖 ㅎㅎ 그럼 이게 과연 성애 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거냐구. 거기가 너무 빈약... 뭐. 저자가 예상 불가능하게 써놓은 건 아니지만 부족한 건 부족한 거라긔.
  그래도 계속 흥미를 유발하는 좋은 책이었음. 특히 3부 의사들의 저항 편이 신선했다. 



>

 ... 마찬가지로 이성애의 관습이 보편적이라 할지언정 이성애 문화는 보편적이지 않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명백히 이성애적이라 할지라도, 이로써 인류의 번식이 가능해지긴 하지만, 인간의 문화가 반드시 이성애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고대 또는 '원시'사회의 검토를 통해 입증되듯이 문화나 문학 또는 예술의 재현에서 남녀 커플과 사랑에 언제나 우위가 부여되지는 않았다. (중략) 실제로 수많은 사회에서 이성애의 관습이 비록 통상적인 관례라 해도 열정의 양태는 물론이고, 사랑의 양태로도 고양되지 않는다. 
- 9~11p 머리말 중 


  예전에 나약한 남자는 에레크처럼 여자의 환심을 사려는 풍조와 이성애 문화를 다소 지나치게 따르는 이였다. 반대로 남색자는 남성의 동성사회 문화를 다소 지나치게 따르는 이였다. 이것들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고정관념이었다. 
(중략)
프랑스 역사에서 앙리 3세는 필시 남색자이자 동시에 여자 같은 남자라고 비난받은 최초의 주요 인물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결합이 어느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19세기부터는 동서애자의 이미지가 대체로 여성화된 남자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리 3세 이전에는 이와 같은 동일시가 그다지 실재하지 않았고 여자 같은 남색자의 모습이 결코 그 정도로 공들여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73p 제 1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기사들의 저항 


  적어도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에 따라 철학자가 영혼의 의사라면 의사는 육체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207p 제 3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의사들의 저항 
 

  오베리는 자신의 개론서에서 시인, 특히 롱사르로부터 많은 구절을 인용한다. 이것은 현대 독자에게 뜻밖의 일일지 모르지만, 사실 당시의 의사들은 시인이 견디고 동시에 퍼뜨린 사회병리를 치료하려고 애썼다. 시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욕망을 고양하는 새로운 문화의 확산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고, 장 오베리는 이 현상에 대부분의 책임이 있는 이들을 끊임없이 참조하면서 이 문화를 개선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210p  제 3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의사들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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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나츠메 소세키

Swimming/BOOKS 2011. 9. 28. 14:33

일본 소설 싫어 싫어 노래를 부르지만, 아니 노래를 부르기에 더욱 더 일본에 대해 무지하다. 바로 옆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되도록 관심을 두고 싶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골치 썩이고 싶지 않은 거지. 일본의 제국주의는 나빠. 일본의 몰염치한 역사관은 나빠. 국가로서의 일본과 일본에 사는 사람 하나 하나를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 죽이네 살리네하는 사람들도 한심해.(어째서 일본 혐한이랑 노는 방식이 똑같냐? 그래. 걔네랑 파이트떠서 이기면 그게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냐?) 그렇다고 아무 생각없이 재미있으면 장땡이라는 애들도 웃기고.(특히 역사적으로 무개념한 작품을 아무 생각없이 핥는 애들 보면 딱하고 안쓰럽지) 사실 혐일이나 일본숭배자나 둘 다 역사적으로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잖아.

게다가 소설이 하도 대세라길래 몇개 집어 읽어보긴 했는데 딱 '그래서 어쩌라고' 이상 할 말이 없네. 번역체는 마음에 들지 않고 더욱이 일본 소설 저변에 깔려 있는 분위기를 납득하지 못하겠고. 아. 이 나라, 아니 이 집단 이상해. 

 그렇다고 이렇게 말하는 내 자신이 편견에서 자유로운가 하면 그럴 리가 있냐. 그래서 난 공평해지기 위해 가장 불공평한 자세를 취한다. 이 반찬은 너무 쓰네 짜네 다네 따지기 귀찮으니 아예 밥상에 올리지 않는, 이런걸 간단히 두 글자로 말하면 '편견'이라고 한다. 그 편견을 수 년간 유지한다. 



그러다 스터디에서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읽기로 한 김에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들었다가 아주 제대로 낚였다. 일단 너무 재밌다. 100년 전 글이라 템포가 가끔 아니 대체 왜 이래 싶게 느려질 때가 있는데 (가뜩이나 만담 늘어놓는 글이라) 그런데도 재미있다. 요즘 작가들의 어지간한 의뭉은 명함도 못 내밀겠다. 우왕.ㅇ<-< 게다가 지금까지 접했던 일본 작품들처럼 이게 일본발이란 걸 스루할 수 있거나 일본발의 한계라며 거식할 것 없이, 100년 전 일본이라는 걸 그냥 쭉 읽어나갈 수 있었다는 게 나한텐 꽤 충격이었음. 

제국주의고 러일전쟁이고 중일전쟁이고 한일합방이고 간에, 아무튼 거기에도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거다. 그것도 도저히 우리나라의 근대와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형태로. 뭐. 식민지가 되었으니 당연한 거지만, 문학사를 읽으며 그래 문예사조고 철학용어고 할 거 없이 받았더랬지 애초에 일본어로 번역된 걸 중역해서 들여오니까, 당장 이상만 해도 일본 누구 누구 영향 엄청 받았더랬고... 딱 거기까지가 내 세계관 속 근대 일본의 전부였다. 그 이상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이게 구첩 반상에 나물 반찬 하나 정도 비중이 아니었던 거지.

어차피 요새는 1900년대 초중부를 훑고 있으니 좀 더 각잡고 읽어보자고 마음 먹게 되었음. 그래도 여전히 일본 최근 소설은 마음에 안 들지만...

19세기, 20세기 초 인사들 글을 읽으며 그들의 입담이 지금 현재에도 유효, 아니 오히려 현재에 더 절실하다고 느낄 때마다 참 아득해진다. 그런 한편 어쩐지 안심이 되기도 하고. 요즘 세상이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붕 뜬 존재는 아니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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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싸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딱 무시하는 것이 안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무릇 대책이 없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법이다. 세상을 돌아봐도 그렇다. 어제 시집온 신부가 오늘 죽지 말란 보장이 전혀 없는데, 신랑은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행복하게 살자는 둥 좋은 말만 늘어놓을 뿐 걱정하는 기색이 없다. 걱정하지 않는 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걱정해 봐야 아무런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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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요즘 사람들은 자기와 타인의 이해관계에 깊은 골이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말일세. 그런 자각심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하루하루 예민해지기 때문에 결국은 일거수일투족조차 자연스럽게, 마음대로 할 수 없어졌다는 걸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라는 사람이 스티븐슨을 평하기를, 그는 방에서 거울 앞을 지날 때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정도로 한시도 자신을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추세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지. 눈을 감아도 나, 눈을 떠도 나, 이 나란 것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도처에 따라다니니까 인간의 행동거지가 인위적이고 좀스러워진 거야. 스스로도 답답하고, 세상도 숨이 턱 막히고 아침부터 밤까지 맞선을 보는 남녀 같은 심정으로 지내야 하는 거야. 유유자적이니 느긋함이니 하는 말은 글자는 있어도 의미는 없는 말이 되고 말았지. 그런 점에서 요즘 사람들이 탐정 같고 도둑놈 같다는 걸세. 탐정이란 직업은 남의 눈을 속이는 한이 있어도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장사니까, 특히 자각심이 강하지 않으면 안 되지. 요즘 사람들은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자기에게 이득이 되고 어떻게 하면 손해가 되는지를 생각하니까. 탐정과 마찬가지로 자각심이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지.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두리번두리번, 우왕좌왕,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한시도 안심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사람의 마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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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이라! 예술 역시 부부와 같은 운명으로 귀결될 것이야. 개성의 발전이란 개성의 자유를 뜻하지 않는가. 개성의 자유는 즉 나는 나, 너는 너라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 예술이 존재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예술이 번창하려면 예술가와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 사이에 개성의 일치가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자네가 아무리 신체시를 짓는 시인이라고 목청 돋우어 봐야 자네 시를 읽고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딱한 일이지만 자네 시의 독자는 자네밖에 없는 셈이지 않은가. ...

  사람들이 저마다 특별한 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타인이 지은 시 따위는 재미있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실제로 지금도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네. 작금의 영국 소설가가 가운데 작품에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메리디스를 보게나. 제임스를 보게나. 읽는 이들이 지극히 적지 않은가. 적을 수밖에. 그런 작품은 그런 개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는 읽어도 재미있찌 않으니 어쩔 수 없지...

  그렇지 않은가. 자네가 쓴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쓴 것은 자네가 이해하지 못하는데, 자네와 나 사이에 예술이고 뭐고 있을 수 없지 않은가. ...

  아무튼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개성을 허용하면 그만큼 인간관계가 답답해진다는 것은 틀림없네. 니체가 초인을 내세운 것도 그 답답함을 해소할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런 철학으로 변형시켰기 때문이지. 자칫 그 사상이 니체의 이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이상이 아니라 불평이야.... 그 목소리는 용맹하게 정진하는 목소리가 아니야. 원한에 차 통분하는 목소리지. 

.. 옛날에는 공자가 딱 한 명 뿐이었으니까 공자 혼자서 활개를 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공자가 여럿이야. 아니 어쩌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공자인지도 모르지. 그러니 나는 공자요, 하고 거들먹거려 봐야 먹히질 않아. 먹히지 않으니 불만이 생기고, 불만이 불거지니까 책 속에다 초인 따위를 휘두르게 된 거야. 우리는 자유를 원했고, 그리고 자유를 얻었어. 그런데 자유를 얻고 보니까 상대적으로 부자유를 의식하게 되엇으니, 난감한 일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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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죽는다. 죽어 이 평온함을 얻는다. 
평온함은 죽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기쁘고 기쁜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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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 이방인

Swimming/BOOKS 2011. 7. 20. 10:23

로버트 E 하인리히의 낯선 땅 이방인. '너님이 단테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면 소설에서 종교를 논하지 마세요. 더더욱이 신 종교를 만들지 마세요.' 목록으로 분류. 

작가가 자기 능력에 대해 도취되었을 때, 그리고 자신의 대상을 옹호하려고 할 때 어떻게 이야기가 구려지는지 잘 보여줌. 네. 감사합니다. 타산지석으로 잘 써먹을게요.ㅇ<-<
우습게도 이문열 사람의 아들 읽으면서 나왔던 삐리리함이 그대로 묻어나옴. 우월한 설명가가 나와서 따발따발 작가의 생각을 읊어준다든가. 교리에 대해 논할 땐 그 교리 자체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보다는 줄줄줄 자기가 아는 종교 잡식을 늘어 놓는다든가. 덕분에 구성이며 흐름이 막 깨짐. 대체 이런 얘기 늘어 놓으려고 '화성'을 그토록 공들여 설정했나 싶음. 

한마디로 '난 육체적으로도 굉장히 젊고 생각도 깨어있다' 고 생각하는 50대 사장님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 사장님이 아무리 재담가라고 해도 듣고 있다보면 살짝 역겨워진다. 뭐, 60년대에는 나름 깨어있는 ㅋ 감성이 50년 후 사람 눈에 안 차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가상 설정'을 할 때라든가, 이야기 찰지게 끌고 나가는 건 재미있음.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잘 보고 감. ... 비록 책을 딱 반권으로 나눠서 뒷쪽은 냄비받침으로나 쓰고 싶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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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피델리티를 재독하며

Swimming/BOOKS 2011. 5. 28. 22:55
로라는 성녀다. 성녀임에 틀림없다. 로브 플래밍이 열일곱명하고 잔 것보다 로라가 쟤랑 다시 사귀어 주는 게 더 기적에 가깝지. 이 책의 교훈 중 하나는 신은 쉽게 사람을 버리지 않는 다는 걸거야.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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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바로 우리 둘이 함께하는 이유야. 너에겐 가능성이 있어. 난 그걸 끄집어내려고 여기 있는 거고.
- 어떤 가능성?
- 인간으로서의 가능성. 넌 기본적인 건 다 갖췄어. 맘먹고 노력만 하면 넌 정말 아주 호감 가는 사람이지. 맘만 먹으면 살마들을 웃길 수 있어. 게다가 친절하고, 네가 누굴 좋아하기로 가정하면, 상대방은 마치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느끼게 돼. 그거 꽤 섹시한 느낌이거든. 단지 넌 별로 신경을 안 쓸 뿐이지. 
- 응. 이런 대답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 넌 그저 ...... 넌 그저 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 머릿속에서 헤매고 있어. 뭔가 일을 시작하기보다 주저앉아서 생각만 하고, 또 대부분은 쓸데없는 것만 생각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늘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중략 

- 너 이런 얘기 들어봤어? '시간은 주어졌으나, 온통 생각만 많다.' 그게 바로 너야. 
-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 나도 모르지. 뭐라도 해. 일, 사람 만나는 거, 스카우트 활동 같은 거나 아니면 클럽 운영이라도. 그냥 삶이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선택의 여지를 열어놓는 것 말고 그 이상의 뭔가를 말이야. 넌 할 수만 있다면 네 남은 평생 선택의 여지를 열어놓겠지. 아마 임종의 순간에도, 아마 담배와 관련된 병일 텐데, '음, 그래도 난 선택의 문은 열어놨었어. 적어도 발을 뺄 수 없는 어떤 일에 연루되진 않았다고.' 하고 생각할 거야. 그런데 말이야. 네가 선택의 여지를 열어놓는 내내 실은 그것들을 다 닫아버린 거나 다름없어. 넌 서른여섯인데 자식도 없어. 아이는 언제 가질 건데? 마흔? 쉰? 마흔이라 치자. 그리고 네 아이가 서른다섯까지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해봐. 그 말은 환갑 지나고도 10년이나 더 살아야만 네 손자 그림자라도 볼 수 있단 뜻이야. 네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사는 지 알겠지?
- 결국 그 얘기군.
- 뭐?
- 아이를 낳자, 아니면 우린 헤어진다. 가장 오래된 협박이잖아.
- 집어치워, 로브. 내 말은 그게 아냐. 네가 아이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난 상관 안 해. 그래, 난 아이를 원해. 하지만 네 아이를 갖고 싶은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네가 아이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그건 내가 풀어야 할 문제야. 난 그저 너를 깨우쳐주려 했던 거야. 난 그냥 네가 인생의 절반이나 살았지만 네가 보여줄 수 있는 거라곤 열아홉 살짜리랑 다를 바 없다는 얘길 해주려고 했어. 돈이나 부동산이나 가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로라는 내가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너야 그런 말 하는 게 쉽겠지. 잘나가는 법무법인 변호사니까. 하지만 가게가 잘 안되는 게 내 탓은 아니라고.
- 세상에 맙소사
로라는 상당히 과격하게 기어를 바꿨고 한동안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거의 어딘가 도달했다는 걸 안다. 용기라도 좀 있었다면 그녀가 옳고 현명하고, 난 그녀가 필요하며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결혼해달라고 했을 것이다. 난 그저, 그러니까, 선택의 여지를 열어놓고 싶었던 거고, 아무튼 말할 틈도 없다. 얘기가 아직 끝난 게 아니라서. 
- 내가 왜 정말 약 오르는지 알아?
- 그럼 알지. 네가 방금 나한테 말한 모든 것 때문이지. 내가 선택의 여지를 열어놓고 사는 방식이나 뭐 그런 거.
- 그런 거 말고.
- 젠장. 미치겠네.
- 난 네 문제가 뭔지, 그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아주 정확히 짚어줄 수 있는데, 넌 내게 그 비슷한 것조차 해줄 수 없어.

중략 

- 너더러 뭘 어쩌라는 게 아냐. 그저 내가 너와의 관계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는 건 아니라는 걸 네가 깨달았으면 하는 거지. 우리 사이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내 삶 자체가 해결된 건 아니라는 듯이야. 나에겐 또 다른 의혹과 걱정, 야망이 있어.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어. 어떤 집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삼 년 후에 내가 벌어들일 돈은 겁이 날 정도야. 그리고...... . 
- 왜 처음부터 그런 걸 다 털어놓지 않았어? 내가 그걸 무슨 수로 알겠어? 또 그게 뭐 그리 큰 비밀이야?
- 비밀은 아니지. 단지 우리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이 전부가 아니란 걸 얘기하는 것뿐이야. 우리 둘이 함께 있지 않아도 난 계속해서 존재할 거니까. 

  결국 나도 그 문제를 풀었어야 했다. 내가 애인을 잃고 세상이 다 허물어진 것같이 느꼈다고 해서 남들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그걸 알았어야 했다. 


중략 

- 넌 남은 평생 똑같을 작정이야? 똑같은 친구들만 만나거나 아니면 친구가 없으면 없는 대로? 똑같은 일? 똑같은 태도?
- 난 문제없어. 
- 그래, 문제없겠지. 하지만 너도 완벽하진 않고, 분명 행복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네가 만약 '행복해진다면' 중략 우린 헤어져야겠네? 난 네 불행한 모습에만 익숙하니까. 만약 네가, 음, 네가 너만의 레코드 레이블을 내서 성공함녀 어쩔 건데? 새 여자친구를 찾을 거야?
- 억지부리지마.
- 뭐가 억지라는 거야? 네가 네 레이블을 내는 거랑 내가 구조공단에서 법무법인으로 옮긴 게 뭐가 다른지 설명해봐. 
  하나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장기적인 일부일처 관계를 조금이라도 믿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도, 또 일어나지 않는 일들도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 소용없지. 
난 과장해서 온순한 척 말했지만, 그녀의 지성과 사나움과 언제나 정당한 모습에 주눅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로라는 적어도 언제나 내 입을 틀어막을 만큼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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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자국

Swimming/BOOKS 2010. 10. 12. 22:45

한 때 그림자'제국'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이영도 중편. 지금도 제국 쪽이 더 간지가 난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새삼스럽게 왜 나는 좀비가 되지 못하는가 - 를 잘 되새김질하게 해준 책. 어. 이유야 별 거 있겠습니까. 머리가 나빠서. 
좀 풀어서 말하자면 - 나도 내가 뭔 말을 하는 건지 정확히 모르는지라 풀기 겁나긴 하는데 - 대략 이렇다. 뭐, 이영도의 캐릭터 1,2,3이 그저 이름만 다를 뿐 이영도 1, 이영도 2, 이영도 3인 건 이영도가 알고 캐릭터가 알고 독자가 아는 바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관철해오고 있는 개-_-성이므로 이제와서 이거 자체에 딴지를 걸 마음은 없는데. 어. 때로 이게 너무 극단적으로 치닫는단 말이지. 
대략 그림자 자국을 읽으면서 폴렙을 읽었을 때 느꼈던 정도의 불쾌감을 느꼈는데, 폴렙이 내 기억 약 7~8권의 장편이었고 이건 1권짜리라는 걸 생각해보면 불쾌감 상승 지수는 이쪽이 훨씬 높은 것 같다. 어. 그니까 요는.
뇌내망상인지 공상인지 공론인지를 신나게 늘어 놓는 건 좋은데, 그야말로 뇌내공론이기에 가능한 설정만 늘어 놓지 말란 말이야. 이야기 자체가 망가진다고. 이 소설은 정말 이야기로서는 시망이야.;;; 이게 뭥미. 아놔. 그래서 어쩌란 겅미. 내가 이영도 소설 읽다가 이렇게 넋나간 부랑자 된 건 또 간만이네.ㅇ<-< 예언자 존나 이건 뭐하자는 놈인걸까?;; 이 소설에서 드라 추억 돋는 드립들을 빼면 과연 이게 읽힐까?... 
앞에서 신나게 어떤 설정을 푼 다음, 그야말로 '이론상' 가능한 방법으로 그 설정을 깨부순다. 기존의 설정이 깨부숴지는 건 좋은데 문제는 그 과정이다. 그 설정을 깨는 설정이 너무나 수학 공식같은지라, 이야기가 망가진다고.;;; 덧붙여 캐릭터도.;;
이 이야기에 나오는 예언자는 이영도 등장인물 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 작품에 캐릭터라는 게 있다고 할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폴렙 때는 워낙 스케일이 커서 그럭저럭 스루할 수 있었는데 뭐랄까 이건... 어... 밑바닥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 이런 거 이런 걸 좋아하고 저런 거 저런 걸 싫어하고 그런 거 그런 걸 못 쓰는구나.;;; 근데 자꾸 쓰는구나.;; 하는.... 아니 물론 어느 작가든 글에 개성을 보이게 마련인데, 개성이 보이는 것과 장점 단점이 다 까발려 보이는 건 또 다른 문제라고나 할까....

소설 자체에 대한 감상이라면 예언자가 예언하기 전까지는 재미있었습니다. - 왕비가 심히 무리수였지만... 뭐 갈수록 무리수 돋긴 하지 - 이 이후에는 '이야기'로서의 가치가 있는 건가 싶게 산으로 갔습니다...

대개 이영도 소설은 마무리가 흠좀무인데, 이건 왜 중반부터 흠좀무였던 건지....

그래도 이영도 전투씬은 레알이다. ㅇ<-<


s와도 한 얘기지만, 이영도의 진정 무서운 점은 이 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몰라도 책장을 넘기는 것 자체에는 별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장점이자 단점인데, 어느 쪽으로든 무서운 점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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