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환상-토도로프 하태환 譯

Growing 2013. 6. 17. 20:29

중략. 한 두 단어 바꿈. (괄호 안에 나 혼자 중얼거림 있음). 오타 있음. 




  문학 작품을 익는 독자는 원칙적으로 작품의 주인공과 동화하는데, 환상적인 문학 장르는 이 독자로 하역므 낯선 사건의 성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망설이도록 한다. (중략) 달리 말하면 독자는 이상한 사건이 있다거나 있지 않다고 작정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상 문학은 근본적으로 독자가 사건의 성겨을 정함에 있어 머뭇거리고 <주저> 하게 한다는 사실 위에 기초하는 것이다. 또한 환상 문학은 독서의 유형을 강요한다. 독서 유형을 정하지 않고서 읽게 되면, 독자는 환상적인 것 속에서 동화적 비유나 시적 효과밖에 보지 못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반드시 의무 사항은 아니지만, 환상적인 작품 속에 흔히 나타나는 언어적이고 구문적인, 그리고 의미적인 (또는 테마적인) 특징들이 있다. 이렇게 한 작품에 내재하는 요소들을 분석하고 기술하는 작업은 다른 곳에서 이미 소개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관점을 바꿔 환상 문학을 그 외부로부터, 즉 문학 일반적인 또는 사회 생활적인 시점으로부터 접근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환상문학이란 무엇인가? 가 아니라 왜 환상 문학인가? 이다. 첫번째 질문은 그러한 문학 장르의 구조에 관한 것이고,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두번째 질문은 그 기능들을 겨눈다고 할 것이다.

 

  기능에 관한 질문 역시 제기되자마자 여러 개로 나눠지게 되고, 또 여러 특수한 문제들로 갈라진다 이 질문은 환상적인 것 위에, 다시 말해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반응 위에, 그리고 또 초자연적인 것 그 자체 위에 제기된다. 마지막의 초자연적인 것 위에서도 초자연적인 것의 문학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럼 맨 마지막의 초자연적인 것의 사회적 기능부터 시작하기로 하겠다.

 

  우리는 피터 펜졸트의 지적 속에 이에 대한 대답이 언뜻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작가들에게 초자연적인 것은 자기들이 도저히 사실주의적 용어들을 빌려서 할 수 없을 그런 사물들을 묘사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초자연적 사건들이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에 대해 믿지 않고 의심을 품을 수는 있다. 그렇짐나 이 주장 속에는 분명 일편의 진실이 들어 있다. 즉 환상적인 것은 거기에 호소하지 않는다면 접근할 수 없는 어떤 한계들을 뛰어넘도록 해준다.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잘 생각해 보면 이러한 주장이 일리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근친 상간, 동성애, 집단 섹스, 시간, 지나친 관능성 등과 같은 테마들을 환상 문학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떤 검열에 의해 금지된 테마들의 목록을 읽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실제로 이 테마들 각각은 금지되어 있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금지될 수 있다. 게다가 환상적이라는 색깔이 언제나 작품들로 하여금 엄격한 검열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승려}와 같은 작품은 재판을 찍는 것이 금지되었다.

 

  제도적인 검열의 곁에, 조금 더 교묘하고 일반적인 다른 검열이 있다. 그것은 작가들의 심리 자체 속에서 지배하는 검열이다. 어떤 행위가 사회의 벌을 받는다는 것은 개인 속에서 행사되는 벌을 자극하게 되고, 그가 터부시된 테마들에 접근하는 것을 금한다. 따라서 환상적인 것은 단순한 핑계 이상으로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검열과 싸우는 수단이다. 예를 들어 성적인 폭발을 악마의 농간에 의한 것이라고 해놓으면 모든 종류의 검열을 피하기 쉬울 것이다.

 

  환상적인 것들 중에서 타인과 관계되는 테마들은 직접적으로 터부에 속하고 그럼으로써 검열의 대상이 되는데, <나>와 관계되는 테마들도 마찬가지다. <나>에 관계되는 테마들이 광기로 돌려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신 이상자의 생각은 터부를 위반하는 범죄자들에 못지 않을 만큼 엄한 사회적 단죄를 받는다. 그래서 광인은 범죄자처럼 갇히는 것이다. 광인의 감옥은 요양원이라고 불린다. 사회가 마약 사용을 억제하고, 또한 마약 사용자를 감금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마약은 유죄라고 평가된 사유 방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종류의 테마망들에 가해진 단죄의 방식을 체계화할 수 있고, 또 초자연적 요소들을 도입하는 것은 이러한 단죄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렇나 테마들의 유형은 정신병적인 유형과도 일치한다. 초자연적인 것의 기능은 텍스트들을 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법을 위반하기 위한 것이다

  19세기 작가들이 가지고 있던 개인적인 가능성들과 오늘날의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테오필 고티에가 등장 인물의 시간을 우리에게 묘사해 주기 위해 취해야 했던 우회적인 방법, 즉 흡혈귀적인 모호한 유희를 기억한다. 그렇다면 19세기와 20세기의 거리를 가늠해 보기 위해, 같은 변태성을 다루는 조르주 바타이유의 {하늘의 파랑} 발췌를 보자

 

 

 

[이것이 나에게 일어난 독특한 사건입니다. 어느 날 밤 나는 한 나읻느 여자가 금방 숨을 거둔 아파트에 들렸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 촛불 사이의 침대 위에 있었습니다. 두 팔은 몸을 따라 길게 놓여 있었는데 손을 모으지는 않았습니다. 밤에는 방에 아무도 없었지요. 그 순간 나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나는 새벽 세시경에 잠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시체가 있는 방으로 간다는 생각을 했지요. 나는 공포에 질렸스비다. 그렇지만 아무리 떨려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달아나지 않고 시체 앞에 그대로 있었으니까요. 결국에는 내 잠옷을 벗어내렸습니다.]

  [당신은 어디까지 갔습니까?]

  [나는 꼼짝 않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때문에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일은 거리를 두고서 간단히, 보기만 하면서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예뻤나요?]

  [아니오. 완전히 시들어버린 여자였습니다.]]

 

  왜 바타이유는 고티에가 간접적으로만 언급할 수밖에 없던 욕구를 직접적으로 묘사할 배짱을 갖게 되었을까? 다음과 같은 대답을 제시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 책의 발간 사이에 하나의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몰고 온 가장 잘 알려진 결과는 정신분석학의 출현이다. 오늘날에는 정신 분석학이 맨 청므 나왔을 때 부딪쳤던 저항을 잊어가고 있다. 그 저항은 정신 분석학을 믿지 않았던 학자들로부터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도 왔다. 그러니까 인간의 심리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변화를 나타내는 신호가 바로 정신 분석학이다. 바로 그 변화가 어떤 테마들에 대한 접근을 급했던 사회적 검열을 제거해 주었다. 그러한 검열이 존재했던 19세기에는 {하늘의 파랑} 발간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이 책은 그때에는 쓰여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드는 18세기에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18세기에 가능한 것이 19세기에도 꼭 그렇지는 않다. 다른 한편으로, 화자의 어떤 태도를 내포하고 있는 바타이유적 묘사의 메마름과 단순성은 예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신 분석학의 도래가 터부들을 파괴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 터부들은 단지 자리를 이동했을 따름이다.

  좀더 멀리 가보자. 정신 분석학은 환상 문학을 대체하였다(그리고 그럼으로써 환상 문학을 무용하게 만들었다) 오늘 날에는 지나친 성적 욕구에 대해 말하기 위해 악마에게 호소할 필요가 없으며, 시체에게 끌리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흡혈귀에게 호소할 필요가 없다. 정신 분석학과 그로부터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영감을 받은 문학은 그런 주제들을 위장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여 다룬다. 환상 문학의 테마들은 하나도 틀리지 않고 지난 50여 년 동안 심리 연구의 테마가 되었다. 우리는 이미 앞의 연구들에서 그에 관한 충분한 예를 들어주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예로써, 이중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프로이트이ㅡ 시대에서부터 고전적인 연구 주제였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오토 랑크의 돈 주앙:이중성에 관한 연구). 악마에 관한 주제도 수많은 연구의 대상이었다. 프로이트 자신도 18세기의 악마적인 신경증의 경우에 대한 연구를 하였고, 샤르코를 따라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이 먼 옛날의 신경증들이 악마적인 의상 아래서 제시되었다고 해서 놀라지 맙시다.>

 

  환상 문학의 테마들과 정신 분석학의 테마들 사이의 접근에 관한 명백한 예가 또 있다. 나는 앞서 <나>에 관한 테마망 속에는 우리가 범결정주의적 행위라고 명명한 것이 있음을 밝혔다. 이것은 우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비록그 관계가 우리를 빠져 나간다 할지라도 사실들 사이에는 언제나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하는, 두루 일반화된 인과론이다. 따라서 정신 분석학은 바로 이 결정주의를 최소한 인간의 심리적 활동 영역 속에 하나도 어김없이 적용하고 인정한다. 프로이트는 {일상 생활의 정신 병리학} 속에서 <심리적 생활 속에서는 자의적인 거싱나 미리 결정되지 않았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고 말한다. 그로부터 범결정주의에 대한 믿음 외 다른 것 아닌, 미신의 영역이 정신 분석학의 주요 관심 사항의 일부가 된다.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학이 이 영역 속에 동비할 수 있는 이동을 지적한다. <재수 없는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중욯나 계획을 포기해 버리던 이 로마인의 행동은 상대적으로 일리가 있다. 즉 그는 자기의 예감에 맞춰 행동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문지방을 잘못 디뎠기 때문에 계획을 포기해 버릴 때, 그는 우리 같은 믿지 않는 자들보다 한 수 위임을 드러내고, 그가 우리보다 더 훌륭한 심리학자임을 보여주었따. 그에게 걸음을 잘못 디뎠다는 것은 이 계획에 대한 회의와 내적인 반댈가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계획을 실행한느 순간에 회의와 내적인 반대의 힘이 그의 의도와 힘을 제거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정신 분석학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독립적인 사실들 사이에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환상적인 동화의 화자와 유사한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를 보면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한 것이 타당함을 알 수 있다. <중세는 아주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심리학적인 관점에서는 거의 정확하다고 할 정도로 이런 모든 좋지 않은 현상들을 악마의 탓으로 돌렸다. 나 역시도 이런 비밀스런 힘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정신 분석학이 바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이상하게 불안한 것이 되었음을 알고서 놀라지 않는다.>

 

  이렇게 초자연적인 것의 사회적 기능을 살펴본 다음, 문학으로 되돌아와서, 이번에는 작품 안에서 초자연적인 것이 하는 기능들을 관찰하기로 하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전에 한 번 한 바 있다.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이용하여 어떤 생각을 더 잘 나타내주고자 하는 여러 비유들은 별도로 치고, 세 가지의 기능을 구별했다.

실용적인 기능: 초자연적인 것은 독자를 감동시키고, 놀라게 하며 또는 단순히 독자들을 긴장 속에 붙들어놓는다.

의미적인 기능: 초자연적인 것은 자기 스스로의 나타남, 즉 자기 자신을 지적한다.

구문적인 기능: 초자연적인 것은 스토리의 전개 속에 들어간다.

 

이 세번째 기능은 다른 둘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전체 문학 작품과 연결되어 있다. 이제 그것을 명확히 해보겠다.

 

  초자연적인 것을 가꿔내는 작가들과 작품 속에서 특히 행위의 전개에 집착하는, 다시 말해 이야기를 하는데 우선을 두는 작가들 사이에는 묘한 일치가 존재한다. 선녀나 요정이 나오는 동화는 일차적인, 그리고 또 가장 안정된 스토리 형태를 준다. 따라서 이런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발견한다. [오디세이아], [데카메론], [돈키호테]는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가 경이로운 요소들을 포함한다. 이것들은 동시에 과거의 가장 위댛나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서도 맟나가지다. 발자크, 메리메, 위고, 플로벨, 모파상은 환상적인 단편들을 썼던 이야기꾼들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서로 내포 관계가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스토리를 이어가는 데 초자연적인 것에 호소하지 않는 역사물 작가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둘의 일치 관계는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흔하게 일어난다. 러브크레프트는 일찍이 이런 사실을 지적했다. <환상적인 것을 쓴 대부분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포는 인물들을 그리는 것에서보다는 사건 속에서, 훨씬 폭넓은 차원의 서술적 효과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이런 일치를 설명하려면, 잠깐이라도 틈을 타서 스토리의 성격 자체에 대한 질문부터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현대 텍스트에서 보통 발견되는 스토리가 아니라 최소 단위의 스토리 이미지, 즉 그것 없이는 어디에 스토리가 있다고 말할 수 없는 핵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이미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모든 스토리는 유사한, 그렇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두 균형 사이의 움직여 감(나 이해:이동)이다.> 스토리의 처음에는 언제나 안정된 상황이 있고 인물들은 어떤 전체적인 모습을 형성하는데, 그 못브은 유동적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일정 수의 근본적인 특징들을 다치지 않고 보존된다. 예를 들어 한 어린아이가 가족의 품에서 살고 있다고 하자. 그는 자체의 율을 지난 한 작은 사회 속에 참여해 있다. 이어서 이 적막을 깨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것은 어떤 불균형을 도입한다(원한다면 이것을 부정적인 균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집을 떠난다. 이야기의 끝에 이르면, 수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다음 장성한 아이는 아버지의 집에 다시 합류한다. 이렇게 해서 균형은 회복된다. 그렇지만 이 균형은 이제 처음의 균형이 아니다. 아이는 이젠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한 성인이다. 따라서 이러한 초보적인 스토리는 두 유형의 에피소드르 포함한다. 하나의 유형은 균형 또는 불균형의 상태를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통과를 그린다. 첫번째 유형의 에피소드들과 두번째 유형의 에피소드들은 정체적인 것과 역동적인 것, 안정과 변화, 형용사와 동사처럼 서로 대립한다. 모든 스토리는, 흔히 알아보기는 쉽지 않더라도 이런 근본적인 도식을 포함한다. 처음이나 끝을 없앨 수도 있고 그 자리에 설명이나 다른 완전한 스토리를 끼워넣을 수도 있다.

 

  그러면 이제는 이러한 도식 속에 초자연적인 것들을 위치시켜 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아랍이나 나이트]에 나오는 [카마랄자만의 사랑이야기]를 보자 이 카마랄자만은 페르시아 왕의 아들이다. 그는 그 왕국 안뿐만 아니라 왕국 밖 어디에서도 가장 잘생기고 지혜롭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그를 결혼시키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이 젊은 왕자는 갑자기 자신 속에서 여자들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혐오감을 발견하고 아버지의 명령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를 벌하기 위해 왕은 탑 속에 그를 가둔다. 이것이 (불균형의) 상황으로서 십 년이라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초자연적 요소가 개입한다. 어느 날 메문이라는 요정이 긴 여행을 하던 중에 이 아름다운 젊은이를 발견하고 그에게 반해버린다. 이어서 그녀는 남자 요정인 다나슈를 만나는데, 그도 중국의 한 공주를 알고 있다. 그런데 틀림없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공주도 결혼하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이 두 주인공의 미를 비교해 보기 위해 두 요정은 잠들어 있는 공주를 역시 잠들어 있는 왕자의 침대로 옮긴다. 이어서 그들은 그 둘을 깨워 그들을 관찰한다. 이어서, 이렇게 밤에 언뜻 만난 후에 왕자와 공주가 재결합하기 위해 벌이는 여러 모험들이 뒤따른다. 결국 그들은 서로 만나게 될 것이며 새로 가정을 이룰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완벽하게 사실주의적인 처음의 균형과 마지막의 균형을 가지고 있다. 초자연적인 사건은 중간적인 불균형을 깨뜨리고, 두번째 균형을 찾아나서는 긴 추구를 유발하기 위해 개입한다. 초자연적인 것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동하는 경과를 그리는 일련의 에피소드들 가운데 나타난다. 사실, 몯느 참여자들이 공고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처음의 안정적인 상황을 가장 잘 뒤집어엎을 수 있는 것은, 그 상황뿐만 아니라 세상 그 자체에 대해 외적인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 있겠는가?

 

  고정된 법, 잘 설정된 규칙, 이것은 스토리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법의 위배가 신속한 변화를 불러오게 하려면, 초자연적인 힘들이 개입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렇지 않으면 한 인간적인 심판자가 원래의 균형에 균열이 생겼음으 알아보게 될 때까지 기다리느라 스토리가 질질 끌게 될 위험이 있다.

 

  뚜 [두번째 탁발승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탁발승은 지하에 있는 공주의 방에 있다. 그는 그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한, 공주를 가지고 즐기면서, 그리고 공주가 제공하는 맛있는식사를 먹으며 지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뿐이라면 스토리는 아무 재미도 없이 끝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하나의 금지, 규칙이 있다. 그것은 정령의 부적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은 즉각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자 제재자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만큼 상황은 신속하게 변하게 될 것이다. <부적이 깨뜨려지자마자 궁전이 뒤흔들리며 곧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또는 [세번째 탁발승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여기서의 법은 신의 이름을 발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어기면서 주인공은 초자연적인 것의 개입을 유발한다. 그의 뱃사공 청동인은 물 속으로 뒤집어진다. 조금 후의 법은 한 방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어기자 주인공 앞으로 말이 한 마리 나타나서 그를 하늘로 데리고 가버린다. 그와 함께 줄거리는 무서울 정도로 빨리 진행된다.

 

  이 예들에서, 안정된 상황의 단절에는 초자연적인 것이 개입이 따른다. 경이적인 요소는 다음의 기능을 최대로 충족해 주는 서술적인 재료이다. 즉 앞선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고, 기왕에 설정된 균형(또는 불균형)을 깨뜨린다.

 

  이러한 변화는 다른 수단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수단들은 덜 효율적이다.

 

  초자연적인 것이 보통 어떤 행위의 이야기와 결합하기 때문에 그것이 묘사나 심리 분석에만 집착하는 소설 속에 나타나는 것은 아주 드물다(헨리 제임스의 예가 여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것과 서술 사이의 관계가 명확해진다. 초자연적인 것이 들어가는 몯느 텍스트는 하나의 스토리이다. 왜냐하면 초자연적인 사건은 우선 미리 설정된 균형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초자연적인 요소들 사이에 친화력이 존재한다 해서 모든 스토리가 그런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점에서 초자연적인 것의 사회적 기능과 문학적 기능이 하나가 되는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법을 위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회 생활 안에서든, 혹은 스토리 안에서든, 초자연적인 것의 개입은 언제나 미리 설정된 규칙 시스템에 단절을 가져오고, 그 점에서 그 정당성이 발견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환상적인 것 그 자체의 기능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초자연적인 사건의 기능이 아니라 그 사건이 유발한 반응의 기능에 대해서이다. 초자연적인 것, 그것을 글자 그대로 취하는 문학 장르, 경이로운 것 등이 문학에서 줄곧 존재해 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지만, 환상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짧은 생명밖에 누리지 못할 마큼 이 질문은 흥미로운 것 같다. 환상적인 것은 18세기 말경에 카조트cazotte와 함께 체계적인 방식으로 출연했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나 모파상의 단편들 속에서 이 장르의 미학적으로 만족할 만한 예들을 보게 된다. 우리는 다른 세기들에서도 환상적인 <주저함>의 예들을 만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나 주저함이 텍스트 잣니에 의해 줴화된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환상 문학이 이렇게 짧은 수명밖에 누리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또는 왜 호나상 문학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환상적인 것을 묘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더 유형들을 더 가까이에서 검사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독자와 주인공은 이런 사건이나 현상이 현실에 속하는지 상상에 속하는지, 그것이 사실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환상이 정의에 그 깁노틀을 제공해 주었던 것은 사실적인 것의 범주이다.

 

  이런 사실을 의식하자마자 우리는 깜짝 놀라며 정지해야 한다. 그 정의에서부터 시작하여, 문학이라 하는 것은 사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의 구별,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구별을 넘어서 간다. 차라리 어느 면에서는 문학과 예술 덕분에 이런 구별을 지탱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문학 이론가들은 그 말을 수차에 걸쳐 했다.

 

 

  예술은 길이 되기에 충분히 진실하고 또 그렇지 않으며, 장애로 변하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이고또 그렇지 않다. 예술은 <마치 그러한 것처럼>이다. - 모리스 블랑쇼, 불의 부분, 26

 

  문학은 수학처럼 한 귀퉁이를 존재와 비존재의 반대 명제 속에 박아놓고 있는데, 이것ㅇ느 추론적인 사유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 우리는 햄릿과 팔스타프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 노스롭 프라, 비평의 해부, 351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문학은 모든 이분법에 이의를 제기한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불연속적이 여러 조각들로 자른다는 것은 언어의 속성 자체이기도 하다. 이름이란 그것이 형성하는 개념 중에서 하나 또는 몇 개의 특성들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특성들을 배제해 버리고, 이것과 그 반대의 명제만을 제기한다. 그런데 문학은 단어들에 의해 존재한다. 그렇지만 문학의 소명은 언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언어적인 분할들을 넘어서는 것이다. 언어의 내부에서 문학은 모든 언어에 내재한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것이다.

 

  문학적 담론의 특징은 저 너머로 가는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없다). 문학은 언어가 자살하는 데 쓰는 무기와 같다. 

 

  그렇다면 사실적인 것과 비사실적인 것 사이의 대비처럼 언어적인 대립들 위에 기초한 이런 문학적 다양성이 바로 문학이 아니겠는가.

  사실 문제는 더 복잡하다. 그가 특별히 겨냥한 주저함에 의해, 환상 문학은 사실적인 것과 비사실적인 것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대비가 존재한다는 것을 문제로 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비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비의 대립항들을 알아보고 인정해야 한다. 이어서 그중 하나를 희생시키려면 어떤 것을 희생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바로 그런 식으로 환상 문학이 남겨놓은 모호한 이중적 인상이 설명된다. 즉 한편에서는, 모든 문학에 고유한 사실과 비사실 사이의 한계를 문제 삼는 것이 그 노골적인 중심이 됨에 따라, 환상 문학은 문학의 핵심 자체른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환상 문학은 문학의 입문 과정밖에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일상 언어의 형이상학을 깨부수면서, 그 일상 언어에 생명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 문학은 비록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출발하는 것일지라도 언어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에 어떤 책에 제시된 세계의 몇몇 사건들이 드러내놓고 상상적인 것으로 주어진다면, 그 사건들은 바로 그로 인해 책의 나머지가 가진 상상적인 성격에 이의를 제기한다. 어떤 출현이 과도하게 흥분한 상상의 열매에 불과한 까닭은 바로 그를 둘렀나 모든 것이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상 문학은 상상력의 찬가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텍스트의 대부분을 현실에 속한 것으로, 미리 존재한 사물에 주어진 이름으로 제시한다. 환상 문학은 우리의 손 사이에 두 개념을 남겨놓는다. 하나는 현실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의 개념인데 그 어느 쪽도 불만족스럽다.

 

  사실 19세기는 사실과 상상력의 형이상학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환상 문학은 이 실증적인 19세기의 그릇된 의식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아무도 외적인 움직일 수 없는 사실성을 믿을 수 없고 이렇나 사실성을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문학도 믿을 수 없다. 단어들은 사물들이 상실해 버린 자율성을 획득했다. 이런 다른 시야가 있음을 줄곧 주장해 오던 문학이 아마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한 원동력 중의 하나이다. 그 모든 페이지 내내 언어학적인 고착된 유형화를 전복시키던 환상 문학 자신도그로부터 치명타를 맞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이 죽음으로부터, 이 자살로부터 새로운 문학이 탄생하였다. 따라서 20세기의 문학이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것보다 더 문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건방짐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은 물론 가치 판단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면 안 된다. 바로 그런 사실로부터 그 장점이 감소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초자연적인 것의 스토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 범주에 들어가는 텍스트 중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카프카의 변신으 들어보자. 여기서 초자연적이 사건은 텍스트의 바로 첫 문장에서 주어진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빠져나오며, 그레고르 잠자는 그의 침대 속에서 진짜 벌레로 변한 채 잠을 깼다.> 이 글의 뒤에는 주젛망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간단한 언급들이 있다. 그레고르는 우선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는 곧 그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그는 합리적인 설명을 찾기를 즉각 포기해 버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레고르는 조금씩조금씩 현재 환각이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일었다. 그의 내적인 확신에 따르면 그의 목소리의 변화는 더위와 추위 같은 것의 서곡이었고 여행자의 직업적인 병이었다.> 라는 문장이 따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간략한 주저함의 언급은 스토리의 전체 움직임 속에 잠겨버린다. 그 전체 속에서 가장 놀라운 일은 바로 이 놀라운 사건 앞에서 놀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고골의 [코]에서와 마찬가지다(카뮈는 카프카에 대해 <이러한 놀람의 결핍에 대해 그 이상 더 놀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차츰차츰, 그레고르는 자신의 상황으 ㄹ비정상적인 것으로, 그렇짐나 아무튼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가 일하고 있는 회사의 관리인이 그를 찾으러 오자, 그레고르는 아주 비위가 상한 나머지 이렇게 자문한다. <언젠가는 이 사람에게도 같은 종류의 불행이 닥치지 않을까. 결국, 그렇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지.> 그는 모든 책임으 면하게 해주고, 사람들이 자기를 보살피게 해준 이 새로운 상태 속에서 어떤 위안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기 부모들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귿릉르 놀라게 했다면, 그건 안심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책임이 없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만약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잘된 일이라고 여긴다면, 괴로워한들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포기는 우선 그부터 찾아온다. 그는 마침내 <자기 의무는 임시로 스스로 냉정을 찾는 일이고, 자신의 상황이 본의 아니게 가족들에게 끼치게 된 손해를 자기가 인내하고 감사를 표함으로써 참ㅇ르 많나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이 모든 문장들은 한 인간이 벌레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발목이 부러진 것과 같은 전적으로 가능한 사건에 의거하고 있는것 같다. 그레고르는 차츰차츰 자기의 동물성에 익숙해진다. 우선 물리적으로는 인간들의 음식과 쾌락들을 거부하고, 정신적으로도 만약 기침ㅇ르 한 번 했으면 그것이 인간의 것인지 아닌지 자신의 판단을 신뢰할 수 가 없다. 그가 그 위에 눕기를 좋아하는 어떤 그림 하나를 누이가 그로부터 빼앗아가려고 한다는 의심이 들자, <그는 자기 누이의 얼굴 위로 뛰어들> 기세이다.

 

  차후로는, 그레고르가 가족이 그렇게 바라는 자신의 죽음이라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포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는 북받치는 애정을 느끼며 가족들을 다시 생각했다. 그가 떠나야 한다는 것,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그의 견해는 자기 누이의 견해보다도 훨씬 확고했다.>

 

  그 가족의 반응도 유사한 전개를 따른다. 우선 놀람은 있지만 주저는 없다. 즉각적으로 아버지의 적대감이 온다. 벌써 첫번째 장명네서, <아버지는 가차없이 자기 아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생각하면서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란 최고의 매정함이라고 결정하고 있었음을 자기가 변한 첫날부터 알고 있었다>고 자인한다.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 그렇짐나 그를 돕기에는 전적으로 무력하다. 그의 누이는 처음에는 그와 가장 가까웠으나 곧 포기하고 마침내는 터놓고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레고르가 죽게 되었을 때, 그녀는 모든 가족들의 감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저걸 치워버릴 방도를 생가해야 해요. 우리는 저것을 간호하고 참아내기 위해 인간적으로 할 일을 모두 했어요. 내 생각에는 누구도 우리에게 조금도 비난할 수 없을 거예요.> 가족들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그레고르의 변신이 그들을 슬프게 했지만, 그 변신은 차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다른 세 사람은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하고, 다시 생활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그들은 미래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잘 생각해 보면 장래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셋 모두가 정말 괜찮은 상황들을 발견했는데, 그 상황은 후에 많은 것을 주기로 약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 단편이 막을 내리느 지점은 블랑쇼가 말한 공포의 절저응로서, 그 누이의 새로운 인생으로의 개안, 즉 관능으로의 개안이다. (...관능?)

 

  우리가 이 스토리에 앞서 설정한 범주들을 가지고 접근해 보면, 그것이 전통적 환상 서사와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선 이상한 사건은 점층법의 정상으로서 일련의 간접적인 지적들 다음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 사건ㅇ느 첫 문장 속에 포함되어 있다. 환상적인 스토리는 완전히 자연적인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초자연적인 것에 이른다. 그렇지만 변신은 초자연적인 사건으로부터 출발하여 스토리가 진행하면서 그 사건에 점점 더 자연적인 모습을 부여한다. 그래서 마지막은 초자연적인 것과는 최대한 멀어지게 된다. 단숨에 모든 주저함이 불필요하게 된다. 주저함은 놀라운 사건의 인식을 준비하는 데 사용되었고,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초자연적인 것으로의 이동을 특징짓던 것이었다. 여기서 묘사된 것은 거꾸로 된 움직임이다. 즉 설명할 수 없는 사건 뒤를 잇는 것은 적응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적응은 초자연적인 것에서 자연적인 것으로의 이동을 특징짓는다. 주저와 적응은 두 개의 대칭적이고 상반된 진행을 지적한다.

 

  다른 한편, 주젛마과 놀람조차도없고 초자연적인 요소들의 현재함이 없다고 해서 변신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장르, 즉 초자연적 경이 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경이 문학은 우리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법칙들을 가진 세계 속에 잠겨 있음을 내포한다. 물론 변신에는 충격적이고불가능한 사건이 문제된다. 그렇짐나 그 사건은 결국에는 역설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그런 점에 있어서 카프카의 스토리들은 동시에 경이 문학에도 속하고 낯선 것의 문학에도 속한다. 이 스토리들은 명백히 양립하기 어려운 두 장르가 일치하는 경우이다. 초자연적인 것이 주어진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계속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일견 변신에 비유적인 의미를 주고 싶어한다. 그렇짐나 이 의미를 정확히하려고 시도함녀 즉시 고골의 코와 함께 만났던 현상과 아주 유사한 현상에 봉착하게 된다(최근에 빅토르 에르히리가 보여주었듯이 이 두 이야기의 유사성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물론 이 텍스트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적인 해석들을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텍스트는 그런 해석의 어떤 것도 확실히 해줄 뚜렷한 단서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카프케에 대해, 그의이야기들은 (글자 그대로의 차원에서) 우선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변신에서 묘사된 사건도 다른 여느 문학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사실적이다.

 

  가장 훌륭한 공상 과학 텍스트들도 유사한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처음에 주어진 것들은 초자연적이다. 로봇, 외계인들, 우주적인 공간, 이야기의 움직임은 겉으로는 경이스러워 보이는 이 요소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우리와 가까운 것이며, 그렇나 것들이 어느 만큼이나 우리 생활 속에 들어 있는가를 보도록 강요한다. 로버트 셰클리의 한 단편은 동물의 몸ㅇ에 인간의 뇌를 이식하는 경이로운 수술로부터 시작한다. 이 단편은 결국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 동물과 공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신체). 다른 소설은 싫은 사람들을 제거하는, 전혀 그럴 법해 보이지 않는 조직의 묘사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우리는 그런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친숙한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제거 서비스). 독자는 여기서 적응의 과정을 겪게 된다. 우선 초자연적인 사실 아에 놓이게 되고 이어서 그는 결국 그 <자연성>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한 스토리 구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환상 문학에서는, 낯설거나 이상한 사건이 정상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평가된 것의 바탕 위에서 보여진다. 그 때무네 자연의 법칙을 위배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의식을 강력하게 지배한다. 카프카에게서는 초자연적 사건이 더 이상 주저함을 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묘사된 세상 전체가 이상한 것이며, 이상한 사건만큼이나 밑바탕 자체도 비정상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전도된 환상의 문제를 다시 보게 된다. 환상 문학은 깨뜨리기 위하여 사실적인 것, 자연적인 것, 정상적인 것의 존재를 가정한다. 그렇지만 카프카는 그 문제를 뛰어넘는다. 그는 비합리적인 것을 유희의 일부로 다룬다. 그의 전체 세계는 악몽적이거나 최소한 어둠의 논리를 따르고 있으며, 실제적인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독자에게는 어떤 주저가 나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인물은 전혀주저함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보았던인물과의 동화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카프카적인 이야기는 우리가 환상 문학의 두번째 조건이라고 했던 것, 즉 텍스트 안에서 주저를 재현하는 것(특히19세기 작품의 특징)을 버린다.

 

  사르트르는 블랑쇼와 카프카의 소설들에 대해서 환상 문학 이론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방금 개진했던 것과 아주 빗ㅅ하다. 그 이론은 {상황 I} 속의 논문 [아미다브 또는 하나의 언어로 간주된 환상적인 것에 대하여]에 나타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블랑쇼나 카프카는 더 이상 특이한 존재들을 그리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인간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환상적인 대상만이 있을 따름이다. 몸의 반쪽만 세상에 담그고 있는 종교인이나 영지주의 인간이 아니라, 지나가는 영구차에게 인사를 하고, 교회에 가서 무릎을 꿇으며, 어떤 국기를 따라 박자에 마줘 행진하는, 주어진 인간, 자연적인 인간, 사회적인 인간이다.> <정상적인> 인간이 바로 환상적인 존재이다. 환상적인 것은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된다.

 

  이러한 변신은 그 장르의 기술에 중대한 결과를 낳게 된다. 예전에는 독자가 동화한 주인공이 완벽하게 정상적인 존재였다면 (그래야 동화가 쉬워지고 주인공과 함께 이상한 사건들 아펭서 놀랄 수 있다), 여기서는 바로 이 주인공이 <환상적>이다. [성]의 주인공도 그러하다. <그의 모험과 시야를 함께 나눠야 할 이 측량사에 대해, 우리는 금지된 마을에서 기를 쓰고 머무르려고 하는 그의 이해할 수없는 고집 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로부터 만약 독자가 등장인물과 동화한다면 독자 자신도 현실로부터배제된다는 결과가 나온다. <그래서 세상을 디집어서 세워야 하는 우리의 이성은, 이런 악몽 속에 휩쓸리게 됨으로써그 자체가 환상적이 된다.>

 

  카프카와 함께 우리는 일반화한 환상 앞에 직면한다. 책의 전체 세상과 독자 자신이 거기에 포함되게 된다. 사르트르가 자기의생각을 보여주기 위해 즉석에서 만들어낸, 이러한 새로운 환상을 보여줄 아주 명확한 예가 있다. <나는 앉는다. 크림 커피를 주묺나다. 종업원은 주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게 한다. 그리고 그도 실수하지 ㅇ낳기 위해 주문을 반복한다. 그는 뛰어가서 내 주문을 두번째 종업원에게 전달한다. 두번째 종업원은 그것을 쪽지에 기록하고 그 쪽지를 세번째 종업원에게 전달한다. 마침내네번째 종업원이 와서내 테이블 위에 잉크를 놓으며 말한다. [여기 있습니다.] [그렇지만 난 크림 커피를 주문했는데요.] 하고 내가 말한다. [그렇지요, 정확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는 가버린다. 만약에 독자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건 종업원들의 익살에 관한 것이라거나 또는 어떤 집단적 강박 관념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예를 들어 모파상은 [오를라]에서 그렇게 믿길 바랐다), 우리는 글을 잘못 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독자에게 이런 기묘한 일들이 정상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세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면, 독자는 단숨에 환상적인 것의 한가운데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고전적 환상 서사와 프카 서사의 차이이다. 전자의 세계에서 예외였던 것이 여기서는 규칙이 된다.

  결론적으로, 카프카는 초자연적인 것과 그러한 그대로의 문학을 희한하게 종합해서, 우리로하여금 문학 자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수없이 문학의 역설적인 위상에 대해 언ㄱ브했다. 문학은 일상 언어 자신이 보기에는 모순이라고하는 것을 먹고 산다. ㅁ누학은 말과 말을 뛰어넘는 것 사이의 반대 명제,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반대 명제를 담당한다. 카프카의 작품은 우리에게 훨씬 더 멀리 가도록 해줬으며, 어떻게 해서 문학이 그 심장부 안에서 또 다른 모순을 살게 하는 가를 보여주었다. 이런 작품에 대한 명상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리스 블랑쇼의 [카프카와 문학]이라는 수필이 쓰여진다. 보통의 단순주의적 관점은 문학을 (그리고 언어를) <현실>의 이미지로, 문학이 아닌 것의 복사로, 평행하게 달리면서 유사한 일련의 것으로 소개한다. 그렇짐나 이러한 관점은 이중으로 잘못되었다. 왜냐하면그것은 언술된 것의 성격과 언술 행위의 성격을 똑같이 배신하기 때문이다. 단어들은 그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느 사물들 위에 부착된 꼬리표가 아니다. 사람이 글을 쓸 때면, 그는 오직 그것만을 하는 것이다. 글쓰기의 몸짓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고 그 외 다른 어떠한 경험에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동시에 내가 글을 쓸 때면 나는 뭔가에 대해 쓴다. 비록이 뭔가가 글쓰기라 할지라도 말이다. 글쓰기가 가능하려면 그것은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죽음은 글쓰기 자신마저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더 이상 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은 자기 자신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만 가능한 것이다. 즉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거기 현재해 있으면 문학을 위한 자리는 없게 된다. (없어진다.) 또 우리가 문학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면,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어진다. 그것은 바로 블랑쇼가 말했던 것과 같다. <만약 언어가, 특히 문학 언어가 지속적으로 미리 잣니의 죽음을 향해 투신하지 않는다면 문학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불가능을 향한 움직임이 바로 문학의 조건이고 그를 기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의 부분} 28

 

가능과 불가능을 화해시키고자 하는 줄기찬 작업이 <불가능>이란 단어 자체에 대한 정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은 <없다>. 여기에 문학의 가장 커다란 역설이 있다.

 

옮긴이: 건국대 불문학 강사 하태환

세계의 문학 1997 여름호 84 161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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