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5년 7월 인당에게 벌어졌던 일이 재현되었다. 장군들의 군사적 승리는 정치적 위협이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찬양받는 것이다. 그것이 당대의 역사이다. 그들은 그 시대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의미 안에서만 수용된다. 사가史家들이 공정한 이유는 그들이 역사 밖에 있는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역사가는 그로 인해 당대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정치가들의 경우 당대를 넘어서는 의미를 이해한다 해도 정치적 불가피성은 그들에게 한정된 선택을 강요한다. 이런 정치가는 스스로가 분열되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현실의 불가피성과 역사의 이념 사이에서 방황한다. '불행한 의식'은 역사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이 아니라,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의식이다. 그러나 역사의 목적이 없다면 역사는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역사의 목적은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탄생된다. 그 경우 역사는 도달해야 할 목적을 가진다. 목적론적 역사는 자연적 의식이 아니라 불행한 의식의 역사이다. 


  정몽주는 엯사의 이러한 성격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었다. 홍언박 등 당대의 유수한 정치가들은 장군들의 살해를 불가피한 일로,혹은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였다. 공민왕 역시 그랬다. 그들은 당대의 역사 안에서 그들을 이해했다. 그러나 안우의 아들에게 보인 공민왕의 연민을 볼 때 공민왕은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공민왕은 안우 등이 정치적 불가피성의 희생자임을 알고 있었다. 안우 등을 처형한 뒤 내린 교서에서 왕은 "옛 공로를 생각하여 처자에게는 죄가 미치지 않게 할 것이며, 아울러 그 관할에 소속된 대소 관리는 관계 기관으로 하여금 공을 헤아려 서용케 할 것"을 명했다. 또한 안우의 어린 아들이 헐벗은 몸으로 길가에 서 있따는 말을 듣고, "슬퍼하여서 불러 궁중에 두고 돌아갈 곳을 물어서 보냈고, 안우의 휘하 군사가 놀라 무너지자 왕이 불러서 위로하였다"고 한다. 백성들 역시 이들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방실의 아들은 중문中文이다. 안우의 아들은 나이가 겨우 10여 세였다. 저자에 나가 놀자, 사람들이 음식을 먹이면서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이 편하게 먹고 잘 수 있는 것은 모두 원수의 공"이라 말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고려사 열전 26, 안우)

  정치가들과 달리 평범한 사람들의 윤리로는 이들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민왕 13년 정도전은 일찍이 정세운이 개경의 동문 밖에 심은 버드나무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성을 나와 남쪽 바라보니 갈 길은 멀고 먼데,

동풍 불어 때는 바로 이월 초순,

뉘라서 도성 문에 버들을 심었느냐. 

해마다 버들솜 날아 사람의 슬픔을 더해주네. (삼봉집 出城)


  그러나 이 사건을 역사의 보편적인 문제와 결부시켜 이해했던 사람은 정몽주였다. 김득배와 정몽주는 좌주와 문생 관계였다 김득배는 원래 과거에 급제한 문신으로 정당문학에 올랐다. 그는 공민왕 9년 10월에 지공거 (과거 시험관)를 맡아 정몽주를 뽑았다. 당시의 습속에서 '좌주-문생' 관계는 부자 관계처럼 인식되었고, 평생 동안 유지되는 중요한 정치적, 윤리적 관계의 하나였다. 김득배가 죽자 직한림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시체를 거두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아아! 황천이여! 나의 죄가 무엇이며, 아아 황천이여!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대개 듣건대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림은 하늘이요, 선인을 상 주고 악인을 벌함은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나 그 이치는 하나인즉,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하였으나,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김은 과연 무슨 이치며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함은 또한 무슨 이치입니까? 지난날 홍건적이 침입하여 임금이 서울을 떠나시니 국가의 운명이 한 가닥 실 끝에 달린 것처럼 위태롭거늘, 오직 공이 먼저 대의를 선창하자 원근이 향응하였고 몸소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능히 삼한의 대업을 회복하였으니, 무릇 이제 사람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자는 것이 그 누구의 공입니까?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공으로써 덮는 것이 옳을 것이요, 죄가 공보다 무겁더라도 반드시 그 죄를 자복시킨 뒤에 베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말의 땀이 마르지 않고 개선하는 노래가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태산 같은 공을 오히려 칼날의 피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로써 하늘에 묻는 바입니다. 나는 그 충혼忠魂, 장백壯魄이 천추만세토록 반드시 구천의 아래서 울음을 머금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아, 명命이로구나!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고려사 열전 26, 안우)


  비통함으로 가득한 이 글은 장차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는 듯한 글이다. 그런데 이 글에는 단순한 슬픔 이상으로 당대 고려의 정신이 직면한 분열과 위기가 격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정몽주는 인간세계의 부조리와 하늘 및 인간의 관계를 묻고 있다. 그것은 일찍이 사마천이 중국 역사를 시작하면서 물었던 물음과 같은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천도天道는 특별히 친한 자가 없으며 항상 선인과 함께한다고. 백이. 숙제 같은 사람은 정말 선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인을 쌓고 깨끗한 행동을 하였는데 굶어 죽고 말다니! 70명의 문도 중에서 공자는 안회만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칭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안회는 굶기가 일쑤였고 술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여 베푸는 것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 나는 심히 당혹감을 금치 못하겠다. 도대체 이른바 천도라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기 열전 1. 백이숙제)


  하늘은 인간과 만물을 낳았으니 인간과 하늘은 하나가 아닌가? 그런데 역사의 이 비극들은 어찌된 것인가? 과연 하늘은 존재하는가? 우리의 이해가 잘못된 것인가? 하늘이 인간을 이긴다 하고 인간이 하늘을 이긴다 하면, 하늘과 인간은 달느가?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영원한 가치의 기준이 존재할 수 있는가? 모든 가치는 상대적일 뿐 절대적인 가치는 없는 것인가?


  정몽주의 이 모든 질문은 결국 그가 혼란에 빠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학문을 통해 배운 세계가 아니었다. 김득배의 죽음은 그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ㅇ벗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이성에 강렬하고도 파괴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제문은 정몽주가 이 도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비탄이 그 증거로, 그는 "이것이 내가 피눈물로써 하늘에 묻는 바"라고 말하고 있다.


  정몽주의 이러한 질문들은 매우 독특한 인간의 탄생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는 홍언박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고착되어 그 안에서만 의미를 이해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현세에 있으면서도 현세 너머에서 현세의 문제를 통찰하려는 인간이었다. 그는 행위에 불변의 원칙을 가져다주고 삶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을 탐색하는 인간이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과 모든 행위는 하루살이처럼 부질없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의 비탄처럼 이러한 모색은 혼란을 가져온다. 세계는 더 이상 조화롭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이원적인 요소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이 속에서 우리는 현실 속에 가라앉거나 현실의 뿌리를 뽑는 극단적인 길을 택한다. 앞의 경우 역사의 의미는 질문되지 않으며, 뒤의 경우 역사의 의미는 살아갈 터전이 없다. 두 극단의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할 때, 그는 분열된 인간이며 그의 의식은 불행한 의식이다. 정몽주는 바로 그런 상태에 있었다. 정몽주는 그 혼란을 '명命'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그것은 알 수 없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뜻이다. 우리는 이 모든 역사의 부조리에 대해, 그리고 이 혼란에 대해 체념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이 역사를 묵묵히 견디며 살아갈 뿐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구원을 인간의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완성하려는 시도였다. 즉 인간은 그 잣니을 떠나서는 이 세계에서 구원될 수 없다. '천리'와 '수신'. '평천하'에 이러는 복잡한 설명은 그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의 실제는 그처럼 논리적으로 정합적인가? 인간은 그 자신을 스스로 구할 수 있는가? 또한 구원된 인간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가? 인간이 내적으로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성리학자들 역시 증험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나 이뉼, 만물로 확대된 자아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거기에 성리학자들의 곤경이 존재했다. 세계는 자기의 단순한 확장 이상인 것이다. 하늘은 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였찌만, 다만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남겨두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이 분열의 크레바스이다. 정몽주의 '천명'은 그 점에 대한 비통한 고백인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의 이 절규를 통해 우리는 하늘이 역사에서 이념 혹은 모적을 실헌하는 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정몽주의 제문은 바로 그 자신이 김득배의 죽음을 통해서 역사의 참다운 이념을 근본적으로 자각했음을 보여준다. 김득배의 죽음에 대한 비탄은 역사의 불합리에 댛나 의문이지만, 동시에 역사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발견이기 땜누이다. 그리하여 여말선초의 역사에서 정몽주는 이념의 서식처가 되었다. 정몽주의 의식 속에서 역사의 이념은 이미 탄생되었으나, 그것은 아직 세계 속에 실현되지 않았다. 김득배의 죽음은 그 분열을 분명히 자각시켰다. 그러나 이념의 성술은 정몽주에게 그의 삶 전부를 요구했다. 그리고 정몽주는 정치적 생애의 종국에 마침내 그와 같은 인간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제문은 정몽주 자신의 정신적 운명에 대한 예언이다. 그는 정치 속에서 그의 정신을 완성하고자 했으므로, 그것은 또한 그의 정치적 운명이기도 하다. 그 자신도 본질적으로 김득배와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정치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략의 희생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세계 속에 나타난 정신의 고통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김득배와 달리 그는 잣니의 죽음이 가진 이념적 의미를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몽주의 죽음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서 정신적 사건이 되었다. 조선의 정치적 탄생은 조선 건국자들의 공업이었지만, 정신적 탄생은 근본적으로 정몽주의 죽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웹툰 몇 작품 돌아보다 새삼 느낀 클리셰가 걸려서 몇 자 끄적끄적.







네이버 웹툰 <유미의 세포들>에 등장하는 서새이


유미의 애인, 구웅의 여사친 겸 직장동료다.

친구 사이임을 빌미로 구웅에게 집적거리며 유미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구웅의 옆집으로 이사하는 등 상당히 적극적으로 유미와 구웅 사이를 방해함.

해당 웹툰 댓글란에서는 주로 새이년이라고 불린다.







같은 웹툰에 등장하는 루비


유미의 직장 후배. 유미가 호감을 품었던 직장 동료 우기를 좋아한다.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짜증날만큼 무리한 애교를 구사한다. 

우기에게서 유미를 떼어내기 위해 태연하게 얄미운 말만 골라하여 초반부 얄미움을 하드캐리. 

역시 당시에는 댓글란에서 루비년으로 불렸다.

최근 우연히 만난 서새이도 우기를 좋아한다고 착각, 

유미에게 끌었던 어그로를 새이에게 시전하자 댓글란 평가가 역전했다.








다음 웹툰 <살아 말아>에 등장하는 정혜 (가명: 소유)


소원 동전의 힘으로 청소년이 된 노부부, 육갑/청순과 악연으로 얽힌 인물.

첩 소생으로 육갑의 결혼 전 연인이었다. 

육갑이 청순과 갑작스럽게 결혼하자 떳떳하게 살 수 없는 자신의 출신을 비관하고 사라진다. 

현재 역시 소원동전의 힘으로 어려져 새 신분을 만들고 모델로 활동 중. 

갑/청순에 대해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



위 세 캐릭터는 네이버, 다음에서 연재 중인 웹툰 두 편에 나오는 여성 조연 들이다. 이들을 뭐라고 해야 할까. 막장드라마에서 온갖 범죄를 불사하는 악녀들에 비하면 소소한 수준들이니 악녀라고까지는 못하겠고... 여주인공의 적인 여성 조연이니 줄여서 여적여라고 해둘까?

이들 세 여적여들은 스타일도, 행동 방식도, 동기도 상당히 유사하다. 그렇다고 이들이 몰개성한 캐릭터라는 건 아니다. 작품에서 충분히 개성을 묘사해주기 때문에 오히려 공통점도 두드러진달까. 



새이의 본심 _ 웅이에게 보이는 모습


<살아말아>의 정혜는 '평범한 여자아이'에게는 숭배의 대상이다. 남들 앞에서의 이미지 관리




청순 앞에서 드러내는 본심 



여적여들을 묘사할 때 강조되는 이중성


관리 꽤 힘들 머리카락, 청순하냐 귀엽냐 세련되었느냐 차이는 있으나 어쨌든 여주인공에 비해 강조되는 '여성미'. 교묘한 화술과 이중적 태도, 여주인공에게서 남자를 '빼앗거나' 내가 가지지 못한다면 '망가뜨리겠다는' 목표의식... 이들 여적여에 비해 순수하고 담백한 여주인공은  항상 이들에게 당해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녀의 순수함과 진실성이 결국은 승리한다. 여적여는 결국 여적여일뿐 남주인공을 차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실 이런 설정은 굳이 이 웹툰들을 끌어오지 않아도 충분히 익숙하고 지루한 클리셰다. 우리는 이미 아침 저녁 드라마에서, 소설에서, 영화에서, 만화에서 이런 여적여들을 무수히 많이 만났다. 여적여는 여성, 특히 여성의 연애를 다루는 작품이라면 쉽게 등장한다. 이들의 비행은 관객을 빠르게 몰입시키고 마침내 몰락하면서 작품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준다. 이들이 실패하면서 자연히 작품의 권선징악도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언급한 두 작품 모두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았고, 특히 <살아말아>의 경우 아직 정혜의 계획이 다 드러나지 않았기에 이후 진행에 대해 단언할 수 없다.)


확실히 이 여적여들은 얄밉다. 이들이 얼른, 콱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들이 정말 나쁜 년일까? 이들의 공통 특성을 곱씹다보니 좀 우스운 것이다. 여성미 넘치는 외모에 적절히 구사하는 애교, 상대를 거스르지 않는 '현명한' 화술. 이거 다 흔히 가부장제에서 강요하는 '여성의 미덕' 아냐? 얘네는 그런 미덕 기준으로 볼 때 오히려 아주 훌륭한 여성 아니냐고. 어딜 가나 남자들의 기준에 부합하는 완벽한 여성.

왜 클리셰는 이 훌륭한 여성들을 여자의 적으로 설정하는 것일까? 왜 클리셰는 이 여성들의 미덕이 가식이며 기만이라면서 끊임없이 순수한 주인공을 통해 이들을 단죄하는 것일까?


이 '여적여' 혐오가 정말 여성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저런 여성이 실제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저런 여성이 정말 '순수한 여주인공 = 나'에게 해를 끼치는가? 우리는 정말 저런 여성을 싫어하는가? 

언제까지 여적여 공식으로 여성 서사를 만들어야 하는가?




이들 여적여들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 세계관에 들어맞는 캐릭터인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이들이 저런 여우짓을 하는 이유, 이들의 성격이 비비 꼬인 이유가 뭘까? 가난해서? 재능이 부족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친구에게 배신 당해서?


아니다. 작중 묘사상 이들의 성격이 꼬인 건 '남자와의 사랑에 실패' 했기 때문이다. 



<유미의 세포들> 22화


과거 순수했던 루비는 애인에게 버림 받으면서 '여배우 세포'를 만들고 빙그레썅년으로 거듭난다. 

서새이의 심리 상태에 대한 묘사는 더욱 난감하다. 



<유미의 세포들> 76화


분명 서새이의 사랑세포는 일을 사랑한다. 그런데도 그녀가 미련은 남았을 망정 오랜 친구 사이인 구웅의 연애를 방해하는 이유는 단 하나, 원하는 건 모두 갖겠다는 감성 세포의 폭주 때문이다. 

감성세포가 왜 저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도 없다. 구웅에게 내심 기대며 제 것이라 여기고있었는데 구웅이 애인을 사귀게 되니 외로움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는 것 정도? 다른 인물의 감정 세포가 모두 저렇지는 않다는 것도 포인트. 작중 설정 감성세포는 다 저런 성격이라는 설명도 불가능 하다. 




<살아말아> 18화




<살아말아>의 정혜는 <유미의 세포들>의 여적여들보다는 훨씬 복잡한 존재다. 그녀는 남자의 노리개가 되어 창창하던 인생을 망치고 하나 있는 딸에게 푸념을 퍼붇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리고 그런 자신 안에 어머니의 삶의 방식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다. 정혜가 저항해도 세상은 정혜 어머니가 사는 방식 이외는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절망이 정혜를 누르고 있다. 

또한 정혜는 육갑과 맺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육갑이 할아버지(가부장)의 갑작스러운 명령' 때문이며 '첩의 딸인 자신은 절대로 손자 며느리 감이 못 된다는 걸' 매우 뚜렷이 인식하고 있다. 정혜의 비뚤어짐은 갑작스러운 실연과 절망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아무리 순수한 마음을 품고 있어도 그녀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 청순이 가부장제의 며느리로 60년간 희생 당했다면 정혜는 그 며느리조차 되지 못하는 여자로 배척당해왔다. 

정혜는 입장 자각과 객관화 면에서 여주인공 청순보다 훨씬 뛰어난 캐릭터다. 개인적으로 로맨스 코미디라는 장르 한계에서 정혜의 자각과 복수를 얼만큼 표현해줄지 기대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들 여적여들이 비뚤어지는 결정적 이유가 남성들 (가부장제, 이성애 연애관 상)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격 변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남자라니. 로맨스 장르라는 점을 감안해도 다분히 남성 중심적 설명방식 아닌가? 여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중심에는 남성이 있다. 


얼마 전 지인에게 순정 만화의 핵심은 이성애 로맨스가 아니라 여성 성장 서사가 아닐까 이야기 했다. 로맨스는 다양한 여성 성장 서사의 한 방식일 뿐인데, 다만 여성에게 허락된 서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로맨스가 메인인 걸로 보이는 것 뿐인 것 같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여성에게 로맨스가 허락되는 건 여성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키는 남주인공이 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성의 이야기임에도 이미 가부장 남성 세계의 법칙을 받아들이기에 여주인공의 적에게도 그대로 남성의 시각이 투영되는 게 아닐까. 1.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여자들이 질투할 것이라는 전제. 2. 남성에게 거짓을 꾸미거나 남성을 위협하는 여성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남성을 사랑하는 여성이 선택받을 거라는 약속. 

이런 법칙을 받아들이고 서사를 만든다면 확실히 여적여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다. 여성은 끊임없이 '아름다운 여자'가 되기를 강요 당하면서 동시에 그런 여자를 경계 하도록 가르침 받는다. 지금도 여적여 클리셰는 수없이 재생산되고 변주된다. 사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풀려면 웹툰을 가져올 게 아니라 드라마 세계로 들어가는 게 훨씬 나을 거다. 지상파 3사 아침드라마 비교라거나... 아마 관련해서 이미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고... 


어쨌든 이미 있는 클리셰를 쓸 거라면 좀 더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클리셰를 이용하기를 바란다. 다양한 여적여가 아니라, 여적여를 쓰는 이유가 다양해지기를 바란다. 클리셰를 이용해 클리셰를 만든 법칙을 공격하는 이야기가 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는 여성 서사에서 여적여보다 훨씬 재미있고, 다양하고, 효과적인 도구가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여성 캐릭터를 여주인공과 악녀로 양분하는 낙인이 사라진다면, 한 여자를 여자와 _ 그 여자의 적으로 나누는 짓을 멈춘다면. 온전히 한 몸으로 표현되는 여성 개개인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진행될지 나는 너무 기대되는데.


ㄹ님이 기교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살아있는 글이란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등을 물어왔는데 답 다운 답을 못 했다. 지금 내 수준에서 답하려면 한없이 자잘해지거나 한없이 커져서 무의미한 답만 나올 것 같았음. 무의미한 답만 나올 거 같아서 무의미한 답을 함. 그리고 자갈자갈하게 부끄러워졌다.

 

대학원 내내 공부 제대로 안했고, 전공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그리 크지 않으며, 논문 끝낸 후 한 번도 관련 책을 안 읽어서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난다는 건 조금 부끄럽고 말 일이지만, (내가 내 돈 주고 대충 살았는데 뭐 어쩔텐가.) 나는 이렇게 쓴다 라고 말하지 못한 건 답답했다. 왜 아직도 모르는 거야? 왜 아직도 모르는 채로 있는 거야? 왜 알려고 이런 저런 걸 진작 해보지 않은 거야? 왜 지금 바로안 하는 거야? 이게 안 중요한 일인가? 




나한테 중요한 일이 뭘까? 하고 싶은 게 뭘까? 솔직히 요즘은 글에도 별 생각이 없다. 난 애초에 글을 쓰고 싶긴 했던 걸까 싶다. 하면 즐거워서 좋아하지만, 그냥 즐거워서 좋았을 뿐이다. 그게 다다. 요즘처럼 뭔가를 즐기기 힘들 때, 점점 즐기기 힘들어져 가는 세상에서 무슨 동기며 동력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즐거움' 그 자체만을 즐기기에는 겁도 많고 욕심도 많다. 일 하는 중이나 마친 후에는 재미있었다는 것만으로 너무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착수할 때는 그 이상을 원한다. 그냥 재미있었다는 것만으로는 안돼.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해. 더 얻는 게 있어야 해.


뭐 떠나서, 글을 안 쓰고 있으니 글을 쓰고 싶긴 했던 걸까 헷갈리는 거다. 다른 거창한 이유 필요 없고, 글을 너무 오래 안 써서 글 쓸 마음이 안나는 것이다. 안 쓰는데 어떻게 동기를 얻어. 안 쓰는데 어떻게 글에 대해 알 수 있겠어. 안 쓰는 데 누가 날 글 쓰는 사람으로 기억해. 다 그런 거지. 

그러니까 다음 글이나 쓰자. 일단 저번 글보다 덜 딱딱하고 좀 더 알아먹기 쉽게 쓰는 것으로.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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