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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기누스 [숭고론] 4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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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10. 15:19
여담: 문학 쇠퇴의 여러 가지 원인 / 천병희 역 / 문예출판사
적어도 이천년 전과 현재의 차이는 바늘귀 하나 정도 뿐이라는 증거.ㅇ<-<
(1)
- 전략 -
이는 어떤 철학자가 일전에 내게 제기했던 문제요. "나도 놀라지만" 하고 그는 말했소.
"많은 다른 사람들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오. 어째서 우리 시대에는 탁월한 설득력이 있고 공적 생활에 적합하고 약삭빠르고 다재다능하고 무엇보다도 우아하게 글 쓸 줄 아는 재사들은 태어나도 진실로 숭고하고 위대한 인물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거나 극히 드물게 태어나는 것일까 하고. 우리 시대는 전세계적으로 문학의 기근에 시달리고 있소.
(2) 우리는 과연"하고 그는 말을 이었소. "민주주의는 위대한 인물들의 상냥한 유모이고 위대한 작가들은 민주주의와 함께 번영을 구가하다가 민주주의와 함께 죽었다는 진부한 설명을 믿어야 하는 것이오? 그들의 주장인즉 자유는 고상한 인간들의 사상과 희망을 키워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상호 경쟁심과 상에 대한 야망을 불러일으킬 능력이 있다는 것이오.
(3) 게다가 국가가 제공하는 상들에 힘입어 연설가의 지적 능력들은 실천에 의하여 예리해지고 말하자면 마찰에 의하여 불붙어, 당연한 일이지만, 자유로운 국가 안에서 자유롭게 활활 타오른다는 것이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려서부터 정당화된 예속 아래서 사는 법을 배웠고, 그리하여 우리의 생각이 부드러울 때부터 똑같은 습관과 관습이라는 포대기에 싸인 채 자유라는 문학의 더없이 아름답고 풍요한 샘물을 맛볼 수가 없었소. 그래서 우리는 결국 숭고한 아첨꾼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오."
(4)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다른 재능들은 노예들에게도 주어지지만 노예는 아무도 연설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오. 그것은 자기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없으며 자기는 말하자면 갇혀 있다는 생각이 금세 그를 엄습하기 때문인데, 그는 습관의 되풀이되는 타격에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오.
(5) 호메로서의 말처럼 "예숙의 날은 미덕의 반을 앗아가버리기 때문이오. 그래서" 하고 그는 말을 이었소. "내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퓌그마이오 족 또는 난쟁이족을 가두어두는 새장들이 그 안에 갇힌 자들의 성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몸을 옭아매는 사슬들로 그들을 불구자로 만들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예속도 설사 그것이 정당화된다 하더라도 영혼의 새장과 공동의 감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오."
(6) 그래서 나는 그에게 대답했소. "친구여. 언제나 현재 상황을 헐뜯는 것은 쉬운 일이며 또 인간의 특징이기도 하지요. 아마도 위대한 인물들을 망쳐 놓는 것은 세계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욕망들을 움켜잡고 있는 이 끝없는 전쟁과 오늘날 우리의 생활을 점거하여 이를 뿌리째 파괴하고 있는 열정들일 것이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탐욕스런 병인 금전욕과 향락욕은 우리를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고 있소. 아니. 그것들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익사시킨다고 해야겠지요. 금전욕은 우리를 시들게 하는 병이고. 향락욕은 가장 비열한 것이오.
(7)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가 무한한 부를 그렇게 존중하고도, 아니 신격화하고도 어떻게 거기에 수반되는 악들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소. 제어되지 않은 무한한 부에는 사치가 가까이서 사람들 말마따나 보조를 맞추며 뒤따르기 때문이오. 부가 도시들이나 집들의 문을 여는 순간 사치도 함께 들어가 그 안에서 살지요.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생활 속에 얼마 동안 머물게 되면 철학자들 말마따나 그곳에 둥지를 틀고는 곧 새끼를 치기 시작하는데, 탐욕과 교만과 허영이 곧 그것이오. 이것들은 서자가 아니라 그것들의 적자들이오. 그리고 이들 부의 자식들은 성년이 되면 곧 우리 마음속에 사정없는 폭군들인 오만과 무법과 파렴치를 낳게 되지요.
(8) 이것은 불가피한 과정이오.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위를 쳐다보지 않고 자신들의 미래의 명성에 유념하지도 않을 것이오. 이러한 악덕들이 순환하는 가운데 인간들의 삶은 점진적으로 파괴되고 정싱늬 위대성은 이울다가 사라지며 더 이상 추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들에게서 필멸의 부분은 존중하고 불사의 부분은 개발하기를 게을리하기 때문이오.
(중략)
(11) 간단히 말해서" 하고 나는 말을 이었소. "오늘날 인간들의 자질을 망쳐놓는 것은 나태이며 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소. 우리의 모든 노력과 기도가 지향하는 것은 칭찬과 쾌락이지 추구하고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선행이 아니기 때문이오."
(하략)
중략한 9번의 경우에는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좀 있었고 예시 설명이라... 애초에 숭고론에서 말하는 미=선 개념이 오늘날 미 개념하고 같은 것도 아니고. '위대한 정신'이란 말을 좁게 해석하면 좀 답답해지는 경향도.... 롱기누스의 문제 제시는 그 자체가 쩔어준다기 보다는 2000년 전에도 자본주의 세대 문제같은 얘기가 나왔구나 싶어서. 뭐. 저때 상황과 현재 상황이 완전히 겹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걸 굳이 타이핑하게 된 계기는 11번 파트. <오늘날 인간들의 자질을 망쳐놓는 것은 나태이며 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소.> 특히 '모두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소.'라는 말 때문임.
적어도 이천년 전과 현재의 차이는 바늘귀 하나 정도 뿐이라는 증거.ㅇ<-<
(1)
- 전략 -
이는 어떤 철학자가 일전에 내게 제기했던 문제요. "나도 놀라지만" 하고 그는 말했소.
"많은 다른 사람들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오. 어째서 우리 시대에는 탁월한 설득력이 있고 공적 생활에 적합하고 약삭빠르고 다재다능하고 무엇보다도 우아하게 글 쓸 줄 아는 재사들은 태어나도 진실로 숭고하고 위대한 인물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거나 극히 드물게 태어나는 것일까 하고. 우리 시대는 전세계적으로 문학의 기근에 시달리고 있소.
(2) 우리는 과연"하고 그는 말을 이었소. "민주주의는 위대한 인물들의 상냥한 유모이고 위대한 작가들은 민주주의와 함께 번영을 구가하다가 민주주의와 함께 죽었다는 진부한 설명을 믿어야 하는 것이오? 그들의 주장인즉 자유는 고상한 인간들의 사상과 희망을 키워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상호 경쟁심과 상에 대한 야망을 불러일으킬 능력이 있다는 것이오.
(3) 게다가 국가가 제공하는 상들에 힘입어 연설가의 지적 능력들은 실천에 의하여 예리해지고 말하자면 마찰에 의하여 불붙어, 당연한 일이지만, 자유로운 국가 안에서 자유롭게 활활 타오른다는 것이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려서부터 정당화된 예속 아래서 사는 법을 배웠고, 그리하여 우리의 생각이 부드러울 때부터 똑같은 습관과 관습이라는 포대기에 싸인 채 자유라는 문학의 더없이 아름답고 풍요한 샘물을 맛볼 수가 없었소. 그래서 우리는 결국 숭고한 아첨꾼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오."
(4)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다른 재능들은 노예들에게도 주어지지만 노예는 아무도 연설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오. 그것은 자기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없으며 자기는 말하자면 갇혀 있다는 생각이 금세 그를 엄습하기 때문인데, 그는 습관의 되풀이되는 타격에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오.
(5) 호메로서의 말처럼 "예숙의 날은 미덕의 반을 앗아가버리기 때문이오. 그래서" 하고 그는 말을 이었소. "내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퓌그마이오 족 또는 난쟁이족을 가두어두는 새장들이 그 안에 갇힌 자들의 성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몸을 옭아매는 사슬들로 그들을 불구자로 만들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예속도 설사 그것이 정당화된다 하더라도 영혼의 새장과 공동의 감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오."
(6) 그래서 나는 그에게 대답했소. "친구여. 언제나 현재 상황을 헐뜯는 것은 쉬운 일이며 또 인간의 특징이기도 하지요. 아마도 위대한 인물들을 망쳐 놓는 것은 세계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욕망들을 움켜잡고 있는 이 끝없는 전쟁과 오늘날 우리의 생활을 점거하여 이를 뿌리째 파괴하고 있는 열정들일 것이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탐욕스런 병인 금전욕과 향락욕은 우리를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고 있소. 아니. 그것들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익사시킨다고 해야겠지요. 금전욕은 우리를 시들게 하는 병이고. 향락욕은 가장 비열한 것이오.
(7)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가 무한한 부를 그렇게 존중하고도, 아니 신격화하고도 어떻게 거기에 수반되는 악들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소. 제어되지 않은 무한한 부에는 사치가 가까이서 사람들 말마따나 보조를 맞추며 뒤따르기 때문이오. 부가 도시들이나 집들의 문을 여는 순간 사치도 함께 들어가 그 안에서 살지요.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생활 속에 얼마 동안 머물게 되면 철학자들 말마따나 그곳에 둥지를 틀고는 곧 새끼를 치기 시작하는데, 탐욕과 교만과 허영이 곧 그것이오. 이것들은 서자가 아니라 그것들의 적자들이오. 그리고 이들 부의 자식들은 성년이 되면 곧 우리 마음속에 사정없는 폭군들인 오만과 무법과 파렴치를 낳게 되지요.
(8) 이것은 불가피한 과정이오.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위를 쳐다보지 않고 자신들의 미래의 명성에 유념하지도 않을 것이오. 이러한 악덕들이 순환하는 가운데 인간들의 삶은 점진적으로 파괴되고 정싱늬 위대성은 이울다가 사라지며 더 이상 추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들에게서 필멸의 부분은 존중하고 불사의 부분은 개발하기를 게을리하기 때문이오.
(중략)
(11) 간단히 말해서" 하고 나는 말을 이었소. "오늘날 인간들의 자질을 망쳐놓는 것은 나태이며 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소. 우리의 모든 노력과 기도가 지향하는 것은 칭찬과 쾌락이지 추구하고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선행이 아니기 때문이오."
(하략)
중략한 9번의 경우에는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좀 있었고 예시 설명이라... 애초에 숭고론에서 말하는 미=선 개념이 오늘날 미 개념하고 같은 것도 아니고. '위대한 정신'이란 말을 좁게 해석하면 좀 답답해지는 경향도.... 롱기누스의 문제 제시는 그 자체가 쩔어준다기 보다는 2000년 전에도 자본주의 세대 문제같은 얘기가 나왔구나 싶어서. 뭐. 저때 상황과 현재 상황이 완전히 겹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걸 굳이 타이핑하게 된 계기는 11번 파트. <오늘날 인간들의 자질을 망쳐놓는 것은 나태이며 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소.> 특히 '모두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소.'라는 말 때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