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

Walking 2009. 10. 6. 23:32

봤습니다. 오늘은 화요일이고 낮이라서 사람 없을 줄 알았는데 웬걸. 대한민국에 낮에 시간낼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군요. 만약을 대비해서 가져간 책이나 읽으며 세시간 버틴 결과 직접 뵈옵는데 성공했어요. 길어봤자 2분 남짓, 사람들에게 줄줄 밀려가면서 봤지만.

하지만 내가 서 있으면서도 대체 왜 이 병신같은 대열에 서 있어야 하는지 어이가 없더이다.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병신이란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열을 만든 국중의 처사는 확실히 병신이었어요. 몽유도원도의 위치는 기획전시실 제일 끝입니다. 하일라이트라는 거겠죠. 그러니까 국중의 유물 배치대로라면, 다른 유물들을 쭉 감상하고 마지막에 몽유도원도를 보면서 나와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몽유도원도를 보는 사람들 줄을 따로 세우면서, 정작 몽유도원도 관람하는 사람들은 전시실 내 다른 유물 감상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다른 유물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몽유도원도는 뭐 어깨 너머로도 못 봅니다. 이게 뭐하자는 배치인지?
몽유도원도 보기 직전 즈음에, 열 너머에서 유치원 아이들을 인솔해온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저기 너머에 몽유도원도 보이지? 하는데 참 마음이 짜더군요. 보이긴 뭐가 보여요. 사람들이 바글바글 달라붙어 있는데. 순간 내가 할 수만 있으면 그 애들이랑 자리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도 좀 들었고. 물론 그 나이 때 봐봤자 기억은 쥐뿔도 안 난다는 거 알고, 저도 세시간 기다리라는 거 기다려서 온 거긴 하지만요. 그래도 이건 좀 아니잖아. 아이들에게 사람들 등짝 가리키며 몽유도원도를 설명해야 한다니.

더군다나 몽유도원도 줄은 다른 기획전시물들이 있는 전시실 안을 꼬불 꼬불 이어 들어 갑니다. 다른 관람자들과 쉽게 섞이더라고요. 몽유도원도 대기줄에서 다른 유물 보려고 빠져나가기도 하고요. 박물관 측 안내원들이 아무리 주의를 줘도 어디 될 법 합니까. 뭐 다른 유물들도 워낙 ㅎㅇㅎㅇ해서 대열 이탈하게 되는 그 마음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 나도 추석 때 미리 보지 않았으면 그랬을 테니까. 천마도 강서대묘 청룡 ㅠㅠㅠㅠㅠㅠ 김정희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차피 줄을 따로 세울테고, 줄 서지 않은 사람들은 몽유도원도 못 본 다면 뭐하러 한 전시실에 배치한 겁니까? 한 전시실 안이더라도 좀 별실로 만들어 주던가요. 그렇게 굽이 굽이 전시실 깊은 데 있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을 거예요. 감상 시간이 5분 정도는 늘어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뭐 그런 병신같은 배치때문에 덕분에 두 번 정도 새치기를 당할 뻔 했던 것 같고 한 번은 당한 것 같기도 하군요. ㅎㅎ 생리 이틀째인 내가 뒤틀리는 등허리를 부여잡고 서 있는데 꼭 이래야 하겠어요? 

그래도 '내가 왜 하라는 발제 준비 미뤄두고 병신같은 줄이라는 거 뻔히 알면서 세시간 버티고 있는가' 라는 심각한 회의는 몽유도원도 앞에 서니 날아가 버리더랍니다. 한국미술사가 어렵긴 해도 듣길 잘했어요. 그때 어렴풋하게 들었던 얘기 생각나서. 아 내가 지금 그 기법을 직접 눈으로 보는구나 하고 감격에 찼습니다. 아 물론 모사품은 이미 봤었지만요. 아무튼 그렇다구요. 안평 비롯 다들 글자를 어찌 그리 답게 쓰는지 허허... 이건 뭐. 안평은 정말 얄미울 정도로 깨끗하면서도 깔끔하면서도. 한문도 서예도 이건 뭐 약에 쓸래도 없을 만큼 모르지만. 아무튼 보면서 참 행복했어요. 내 뒤에 있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 할아버지 참 전시실 들어오고 나서부터 앞뒷 사람 붙잡고 본인이 아는 걸 이래 저래 열심히 떠들어 대시던데. 뭐 지루하시니까 말동무가 필요하셨던 거겠죠. 이해합니다. 지독한 입냄새만 아니라면요. 급기야 그 할아버지가 입을 열면 내 앞의 두 사람까지 코를 쥘 정도인데 본인은 끝내 모르시는 건지 모르는 척 하시는건지. 아무튼 입냄새까지도 그렇다 쳐요. 그런데 문제는 말이지.

- 야 뭐, 저게 안평대군 글이고, 저게 김종서 글인가? 이야 글자 참 못쓰네.
옛날 사람들은 한자를 평소에 쓰니까 훨씬 잘 쓸 줄 알았는데 에게~ 영 별로네. 별로야.


를 조사 조금씩 바꿔가며 몽유도원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내내 지껄이더라고.
할아버지 내가 지금 생리 이틀째예요.
생리 이틀째인데 세시간 동안 몸을 끌고 이걸 보러 왔다고.
그럼 난 적어도 혼자 느긋하게 감상은 못하더라도 개드립은 듣지 않을 권리가 있는 거 아닐까? 응?

너무 열이 뻗쳐서 뭐라고 한마디 해줄까 하다가 그 지독한 입냄새 맡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띵해져서 관두고 그냥 나왔습니다. 아니 내가 왜 저 몽유도원도에 저 글들을 보면서 저딴 개소리를 들어야 하나?
아 그래 그냥 개가 짖나 보다 비가 오나 보다 하고 흘려 보내지 못한 내가 도가 부족한 거지. 그런거지.

뭐 듣자하니 대만박물관도 갖다 오셨다는 양반이 왜 저따위인지는 모르겠고.
아까운 대만박물관... 젠장 빌어먹을.

어쨌든 몽유도원도는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유도원도는 좋았어요. 후우...
그리고 여기 써도 될라나 모르겠는데 E님아 나도 님이 말한 영화나 드라마 비슷한 거 생각. 내가 생각했던 건 안견 관찰자 시점? 이지만. 아무튼 그때 그 쪽 주인공 시점으로 나오면 진짜 존나 좋을 것 같음.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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