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아트센터. 2013. 02.13. 낮 3시 공연(그러고보니 오늘 20130213...///)
딱 예상했던 방향, 예상했던 퀄리티. 배우들의 목소리는 짱짱했고 무대는 귀여웠다. 댄버스 부인의 포스가 폭발하는 가운데 막심 연기가 개인적인 캐릭터 해석과 맞아떨어져서 좋았음. '나'는 예쁜 꽃사슴 목소리는 좋았지만 성량도 세지 않고 마냥 여리기만 해서 도무지 댄버스의 적수로 보이지 않았다.
(여주 '나'는 표기하다보니 헷갈려서 그냥 이히로 씀. )
초연 때와 비교해서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우선 막심의 비중 증가. 맨덜레이를 배경으로 여성vs여성 세기의 캣파이트가 아니라 마녀 댄버스를 물리치기 위한 막심왕자님과 이히 공주님의 모험으로 바뀌었음. 그래서 몹시 따분해진 '각성 모드 이히' 넘버들. 프랭크의 이히 응원송, 막심 누나와 이히가 부르는 강한 여성송이 몹시 진부한 '내조하는 아내' 찬양가가 됨. 남자 곁을 지켜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참하고 순수한 여자 그게 진짜 여자지. - 라는 식. 엘리자베트나 마담 모차르트 캐릭터를 생각해보면 좀 웃긴달까.
초연 때 가사를 알아들으며 본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 하일트님이 일부 번역하신 걸 보긴 했지만) 원래어떤 뉘앙스였는지야 확실힌 모르고. 애초 구도가 레베카가 흔히 남자들이 두려워하는 마녀고 이히가 그 반대니 저게 엉뚱한 건 아닌데... 그런데 (내가 보기에) 초연 때 이히의 핵심 성격은 '남편 곁을 지키는' 이 아니라 '백의 천사' 쪽이었다. 초연 때의 막심은 트로피에 불과해 보였음. 포인트는 어디까지나 이히의 각성이었지. 맨덜레이 던전에 뛰어든 이히가 댄버스를 격퇴하고 막심트로피를 따먹는 구도였다고.
오늘 보니 이 작품이 새삼 신데렐라 전형으로 보이더라. ㅋ 원작 볼 때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었는데 말임. 전형적인 이야기를 전형적이지 않게 만든 게 원작의 묘미였을 텐데, 그걸 흔한 클리셰로 재창조했으니 이걸 효율적이라고 해야 할지 비효율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사실 초연 볼 때도 원작을 읽고 기대했던 거랑은 방향이 달라서 좀 실망했었음. 쿤체라면 당연히 이히의 복잡한 내면과 레베카의 그림자와 댄버스의 삼각구도를 훨 쩔게 풀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국내 버전은 더 신데렐라틱해지다보니 깔끔하긴 한데 딱 거기서 끝이다.
아무튼 막심은 작업 걸 때도 노래가 하나 추가되었고 막판에 불타는 맨덜리에 뛰어들기도 하더라.(누가 작곡한 건지 주문 들어오니 어쩔 수 없이 쓴 곡 같다. 진짜 지루하다. 아니면 류정한씨가 지루하게 부르는 건가?) 게다가 원래 있던 넘버에서도 막심의 호소력이 확 올라가면서 무지 튀어보인다. 이게 류정한씨 개인의 특징인건지 이번 공연 컨셉 자체가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종일관 '이히'가 중요했던 초연에 비해 막심의 불안과 각오가 확 살아났음. 특히 '각오' 부분이 몹시 의외. 내가 아는 막심이 아니었음. 쟤가 저런 인간이었든가? 갑자기 싸워서 이기겠다며 지금 이 순간을 불러대서 깜짝 놀랐다. 저기서 바로 얼라이브로 이어지지 않아서 아쉬웠음.
어쨌든 비중 변화는 한국판 공연에서는 괜찮았던 듯. 비츠케 반 통게른 급 성량 여배우를 데려올 게 아니라면 이히의 약화를 막심이 채워주는 게 낫지. 가뜩이나 댄버스부인 넘버밖에 기억 안나는 공연에 이히도 막심도 약하다면 레베카~~ 외에 뭘 기억할 수 있겠어.(...사실 레베카~~외에 기억나는 게 없는 작품이 맞긴 하지.)
그리고 또 다른 큰 변화는 작품 전체의 비꼬는 요소 삭제. 초연 때 있던 우리는 영쿡인 넘버가 하녀+하인들의 주인마님 뒷다마송으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영쿡인의 내용은 뒷다마송 안에 잠깐 들어가는 정도.(골프 치러 가서 쫓겨났다지~)
막심의 비중 증가는 다른 공연 버전에서도 그랬을 법 한데, 이 영쿡인->고용인 뒷다마 노래 교체는 어땠을지 모르겠음. 영쿡인 노래가 빠지면서 아메리칸 워먼도 애매해진지라. 쿤체 특유의 군중 까대기가 싹 다 지워져 버림. 노래 가사야 못 알아 들었지만 우리는 영쿡인을 부를 때 '유럽 상류층 희화화'를 하고 있다는 건 분명히 보였거든. 그런데 그게 빠져 버리니까 반호퍼 부인이 굳이 '난 아메리칸 워먼'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거다. 게다가 부인이 꼬시는 상대가 하필 로마 황제 코스를 하고 있는 것도. 초연에서는 그 로마 황제의 월계관을 벗겨냈었는데 여기선 그것도 생략되더라. 로마=>미국 비꼬기가 의미가 없어졌으니 굳이 그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리하여 아메리칸 워먼 송은 레알레알 잉여송이 되었습니다. 막간 비꼬기가 아니라 적당히 중간에 끼어서 파티 분위기 띄우는 노래로 ㅋ ... 따져보면 이게 웃긴 거다. 쿤체 식 비꼬기를 삭제해 버리면 대체 반 호퍼부인이 나 미국여자예요 우후~하고 영국 귀족 파티에서 천박발랄하게 띄어노는 게 왜 필요하단 말인가? ㅋ
원래 이 작품에서는 그 쿤체의 특징이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했고, 우리는 영국인 노래 자체가 겁나 뜬금없다고 생각하긴 했음. 고용인들의 마님 뒷다마송으로 바뀐 것까지는 훨씬 이해하기 좋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작품은 맨덜리 저택 안에서만 진행되는 거니까 말이지. 근데 또 아메리칸 워먼이 저렇게 붕 뜬 걸 보니 아쉽긴 아쉽고.
하나하나 따져보면 자잘하게 쿤체 때깔 벗겨내고 로맨틱해진 부분들이 많음. 초연 처음 시작 때는 이히 뒤 희끄무레한 막 너머로 등장인물들이 좀비모드로 서 있는데(ㅋㅋㅋ 쿤체는 그림자 없으면 뮤지컬 못 만드냐고) 한국 공연에서는 맨덜레이 무도회장을 배경으로 가면무도회가 진행 중이다. ... 정작 그 가면무도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보면 그게 그런 식으로 이쁘게 추억될 리가 없는데 말이지. 몬테카를로 호텔 뒷쪽을 드나드는 조연들도 초연 쪽이 어딘가 익살맞고 우스운 데가 있었음. 확실히 기억은 안나지만 끄응...'ㅠ' 아니야 저렇게 이쁜 옷 입고 돌아다니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구 끄응 끄응...'ㅠ'
그래도 어쨌든 잘 만든 공연임. 무대도 좀 부산한 감이 있지만 공들인 티 나고, 조연들 연기도 좋고, 앙상블들도 훌륭. 가사도 엘리자베트 때에 비하면 꽤 멀쩡함. 좋은 공연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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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데 이히의 무도회 옷 그것만은 정말 아니다. 아니 왜 그냥 속치마 차림으로 내려가지 않는 거야. 난 그 속치마가 드레스인 줄 알고 뭐야 드레스 멀쩡하네. 그새 옷 바뀌었나? 했다고... 아 슈발 갑자기 디즈니 공주 천떼기를 펼쳐들더니 그걸 뒤집어 써... 로망도 없고 이쁘지도 않고 이게 뭔가요 ... 막심이 옷 갈아 입으라고 호통친 건 그냥 쪽팔려서일 거야. 틀림없어. 이히 얘가 정말 보는 눈이 없긴 한가봐. 저걸 이쁘다고 그냥 입다니.
+ 아. 그리고 중요한 거 하나 더. 대체 왜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 이야기하다가 폭풍 오열하는 걸 이히가 부축해 주는 거야? 오열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그걸 이히가 왜 부축하냐고. 댄버스가 어떻게 이히가 부축하는 걸 용납할 수 있는 거지? 너무 멘붕이라 정줄을 놔서?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되는 거야. 방금 전에 그 레베카의 큐피드상을 깻박살 낸 년에게 부축을 받는다고? 그 댄버스가? 이런 캐붕 오레와 이야다네?
+ ...솔까 류정한 막심은 그다지 귀족같지는 않았음. 더욱이 상처한 고독한 중년남으로는. 잘 쳐주면 뺀질뺀질 귀족가 차남같은 이미지. 키다리 아저씨 저비스 팬들턴 하면 딱일 것 같음.(아. 키가 안되나?) 하지만 님이 대 맨덜리의 명예와 개쩌는 마누라에게 눌려 피들피들 말라가는 미중년으로 보이지는 않네여 ㅋ
+ 그리고 막판에 막심의 레베카 어그로 해석은 순~~전히 막심 위주의 해석일뿐인 듯. 레베카 입장에서는 '아 난 이제 육개월 만에 이 좋은 세상 바이바이하게 생겼는데 저놈은 잘먹고 잘살겠지 얼씨구 좋다 하고 새 마누라 들여서 이 레베카님은 잊고 떵덩 거리며 살겠지' 라고 생각하니 빡쳐서 어그로 끈 것 뿐인 듯. 딱히 막심 인생이 자기 죽은 후에 어떻게 굴러갈지 추락할지 관심 없었을 것 같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