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0130
Walking
2012. 1. 30. 14:21
엄마와 아빠는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다. 두 사람은 약하고 지치고 둔하고,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시간이 갈수록 둘이 피곤에 절고 닳아가는 게 보인다. 막무가내 고집불통이 되거나 만사 놓고 무기력해지거나. 둘이 아직 헤어지지 않은 건 분명히 이 구질구질한 상태를 벗어날 용기가 없어서였을 거다.(물론 전적으로 그런 건 않았겠지.) 이 부부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기 위해선 끝없이 타협하는 수 밖에 없다. 아빠는 엄마의 신경질과 유치하고 엉뚱한 질문들을 참아야 한다. 엄마는 아빠의 피로와 무관심, 침묵을 견뎌야 한다. 한 사람은 계속 상대에게서 스트레스를 받고 다른 사람은 상대에게 끝없이 상처받는다. 결국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와서 찢어진다고 각자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둘은 서로에게 맞지 않는 수족이다. 이제와서 수족을 잘라낼 수도 없고, 짧은 팔 너무 긴 다리로 절뚝거리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게 우리들이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사랑한다. 나는 분명히 사랑받고 자란 딸이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 저 두 사람이 줄 수 있는 걸 다 받고 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은 졸아드는데 희발되고 남는 것들이 자식에 대한 희생이라니. 참 이상한 일이야.
엄마는 막내가 '그래. 난 어차피 쓰레기다. 그러게 왜 날 낳았냐'고 따지면 울먹이며 자신을 방어하는 데만 급급한 사람이다. 질문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상처는 다 받는다. 결국 나오는 건 그 상황에서 최악의 답뿐이다.'난 너한테 해줄 거 다 해줬다. 난 잘못한 게 없다. 니가 그런 취급 당할 만 하니까 한 거다. 넌 그렇게 두들겨 맞아 쌌다.' 자식이 당신에게 귀중한 신의 선물이라는 말과 넌 쓰레기라는 말이 어떻게 병치되는지 모르겠다. 자식은 그 말을 들으면 맷돌 사이에서 아주 갈아져 버리는 기분이다. 결국 난 엄마의 고혈을 빨아 먹고 컸는데도 쓰레기밖에 안되었다는 뜻 아닌가?
저런 말을 들으면 한 40층 쯤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진다. 누굴 원망하고 자시고를 떠나서 내가 저 갭이 감당이 안된다. 저렇게 어쩔 줄 몰라하는 부모를 보면 정말 '어쩔 수 없다'는 게 절절하게 느껴져 버리니까.
우리는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그게 최선이었다. 그 사람은 정말 해줄 걸 다 해줬다. 온갖 애정과 매질과 미움과 보살핌을 다 줬다. 우리밖에 몰랐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풀 대상도 우리 밖에 없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돌아볼 여력도 없으면서 계속 자기가 해준 대로 퍼부어주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자식을 감싸는 것 외에 다른 건 모른다.
어제 문득 깨달았다. 그나마 내가 저 둘에게 저런 질문을 직접 던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거.(했는데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은 자식들이 그냥 거기에 있는 것 만으로 고생을 감내하고 있다. 결국 중요한 건 그거다. 그러지 않고선 우리 아빠가 나한테 초조해하지 말라고 할 리가 없다.
어쩌면 완전히 내 맘대로 안되는 것들을 지키고 아끼는 게 어른인 것 같기도 하다. 음.
이런 생각들을 하면 속이 먹먹해 오곤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게 사는 건가,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래서 뭐. 싶기도 하고. 마와 아빠를 이해하게 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게 되고 받아들이게 된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줄지 않는다. 아니, 엄마와 아빠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내가 포지션을 바꾸지 않으면 달라지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지금까지는 음. 막내는 한없이 난폭해지고 둘째는 학교로 종교로 도피해 버렸다. 난 글쎄. 그냥 한없이 신경질을 부리면서 꾸역꾸역 두 사 람이 주는 걸 다 주워 먹었다. 이젠 중학생 때처럼 싸우진 않는다. 집안일도 제법 돕고 엄마와 대화도 제법 한다. 아빠의 침묵이 무관심이 아니란 것도 안다.
그래도 울컥 올라오는 거부반응이 어떻게 제어가 안된다. 길에서 엄마를 갑작스럽게 만나거나 엄마가 나한테 엉겨오면 도저히 받아줄 수가 없다. 엄마가 내게 보내는 싸인들이 징그럽다. 정말 혐오스러워서 못 견디겠다. 할머니는 더 심하다. 그냥 그 뒷모습 옆모습이 잠깐이라도 눈에 비치는 게 싫다. 할머니 목소리를 들으면 누가 나한테 고름을 끼얹는 거 같다. 특히 할머니가 가족이란 걸 확인하게 할 때마다 토할 거 같다. 준서를 위해서 기도한다거나 아롬이한테 친한 척을 한다거나. 그동안 지인들에게 할머니가 이래서 싫다 저래서 힘들다 주절거렸다. 뻥은 아니었지만 결정적으로 틀린 거 하나. 그런 걸 하든 말든 난 할머니가 싫다는 거. 할머니가 내 토끼를 나 몰래 팔아치웠든 말든 매일 싱크대에 이상한 국물을 튀겨놓든 말든 온 동네에 내 소문을 이상하게 내놓든 말든 난 할머니가 싫어. 그냥 싫다고.
어쩔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이건 그냥 답이 없어. 누가 할머니를 치워 줄 수는 없잖아. 설령 치워준다고 해도 해결날 문제가 아니야. 난 결국 누구든 할머니처럼 싫어할 거니까. 그게 누구일진 모르겠지만. 내가 문제를 해결하든, 아니면 이런 문제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을 만큼 자라서 나가든.
나는 사랑받고 자란 자식이다. 그런데도 난 내가 쓰레기라는 생각을, 절대 한 사람 몫으로 제대로 크지 못할 테고 언제까지나 흐물흐물한 흙덩어리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마음을 고쳐 먹어도 아주 근본적인 데서는 난 어차피 이대로 알 껍질 속에서 성계 건너 뛰고 바로 노계가 되어 썩어 버릴 거라고 생각한다. 막연한 느낌이 아니다. 굉장히 뚜렷한 이미지다. 이대로 계속 시간이 지나는 걸 지켜보기만 하다가 결국 알바 몇 개 전전하고, 그러다 10년 20년 쯤 지나서 엄마 아빠가 죽거나 약해져 버리면 그땐 답없이 길바닥에 나앉는 거. 취직을 하느냐 결혼을 하느냐 문제가 아니라 아예 자립을 못할 거라는 확신.
올챙이는 시간이 지나면 뒷다리 앞다리가 생겨야 하잖아. 난 아가미는 허파로 바뀌었는데 앞뒷다리가 안 생긴 올챙이같아. 눈은 개구리처럼 불룩 나와서 수면 위로 빼꼼 올라갔는데 몸을 뭍으로 올려줄 팔 다리가 없어. 게다가 이젠 숨도 잘 안쉬어져. 이제 더 물 안에 있을 나이가 아닌 거지. 당장 어른 개구리 노릇은 못하더라도 뭍에서 나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남들은 자연스럽게 꼬리가 떨어지고 뭍으로 올라가는데, 내 몸은 점점 굳어져 가는데 난 뭍으로 올라갈 수가 없다. 뭐 이런 이미지.ㅇㅇ (근데 이 와중에 내 비유 진짜 찰지다. 내가 봐도 난 이런 거 써넣는 건 좀 잘하는 거 같다. 아 이렇게 자뻑 한 번 해주지 않으면 살 맛이 안 나지 난.)
요새는 동안이 대세라지만, 결국 제 나이에 맞지 않는 얼굴은 징그럽기만 하다. 요새 내가 내 얼굴 보면 그래. 스타일은 하나도 안 변했는데 점점 피부 탄력은 없어지고 눈은 어두칙칙하게 꺼져 가고. 살 처음 뺐을 때는 그래도 전보단 좀 나아 보여서 거울 앞에 붙어 있었다. 요샌 그냥 넙데데하고 푹 삭은 상판만 보이니까 거울 볼 맛이 안난다. 별거 해본 것도 없는데 또 '그래봤자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안될 거야. 애초에 뭘 바라긴 했나?' 하는 생각이 치고 올라온다.
그래. 사실 안될 거라는 생각보다는 이 '내가 이걸 정말 바라긴 했나? 내가 뭘 하긴 했나? 내가 그걸 좋아했던가?' 쪽이 더 큰 문제다. 이전까지 축적되던 내가 저 질문 한번에 싹 무너져서 그냥 진흙더미로 돌아가 버린다. 뭔가 자랄 것 같다가도 저런 의심들이 날 다시 올챙이 알 단계로 돌려 보내 버린다. 덕분에 난 언제까지나 초보자고 언제까지나 어린 애고 언제까지나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필요한 것도 문제될 것도 없는 인간이고 음.'ㅠ' 그리고는 자기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방어하는 걸 아예 포기해 버린다. 저런 질문에 맞서서 아냐, 그렇지 않아 라고 말하질 못하는 거다. 누가 한 마디 비치기만 하면 난 언제든 그 핑계로 날 허물어뜨려 버리고, 그게 허물어뜨린 후에 아무것도 안 남으면 깔끔하기나 할텐데 그 자리에 진흙덩어리가 남는 다니까. 오물투성이가 되어서는 냄새가 나는 줄도 모른다. 그러면서 이게 솔직하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계속 깎아 내리지. 남이 들으면 삽질 장광설에 불과한데 말야. 자학적이라는 건 결코 칭찬이 될 수 없는데......
하고 싶은 일도 있고 그 일을 생각하면 몸에 열이 오르고 침이 마르는데 그래도 난 내가 그 일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계속 발버둥을 치고는 있는데 이건 그냥 발버둥 치는 시늉이 아닐까? 내 스스로 이걸 정말 바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 고 생각해 버리면 정말 답이 없다. 요즘은 저런 질문에 '이런 발버둥 하나하나가 다 답'이라는 식으로 좀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게 되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음. 아주 근본적인 데서는 언제든 저 질문이 덮쳐올 준비를 하고 있는 거야.
뭐 이러고 산지 오래 되었으니까, 작년 말에 좀 정신상태가 좋아졌다고 이게 싹 나을 거라고는 생각 안해. 다만 내 생각보다 내 저 자학 강박?이 심한 것 같아 새삼 놀랐다. 요새 내 생활 패턴을 돌아봤는데, 이게 10대 때부터 쭉 반복되던 거더라. 계속 먹거나 읽거나 해대는데 그걸 전혀 즐기지 못한다. 먹고 읽고 하면서도 '이건 결국 다 핑계 딴 짓이다.(혹은 그럴 거라는 의심)' , '몇 시까지 어떻게 버티지?'만 생각하고 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선 여섯시까지 어떻게 버틸지 걱정하고 여섯시부터는 열두시까지 어떻게 버틸지 걱정하고 열두시부터는 저녁까지 어떻게 버틸지, 저녁부터는 잠들 때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어쩔 줄을 몰라한다. 뭔가 계속 하는데, 그리고 그게 전적으로 의미 없는 것도 아닌데 계속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그걸 뭔가 자꾸 입에 넣는 걸로 극복하려고 하고... 그러니 살이 찌지... 이걸 근본적으로 고쳐놓지 않으면 난 건강해질 수 없다. 살도 살이지만 그보다도 정신적으로 너무 지친다. 몸까지 아프니까 '몇 시까지 어떻게 버티지'가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 제대로 알겠다. 매 시간을 버텨내면서 하루 이틀 사흘 보내가는 건 정말 못할 짓이야. 그리고 기본적으로 내가 쓰레기라는 정의, 해봤자 안될 거라는 정의를 바꾸지 않는 한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지. 어차피 뭘 해도 안 되는 거니까 뭘 하든 도피가 되어 버리는 거잖아. 내가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의미 부여를 못하는 게 문제라고. 내가 짓고 있는 집 재료가 모래가 아니다. 내가 그걸 모래 다루듯이 하고 있잖아. 말랑한 진흙이면 구워서 굳게 하면 되는데 난 계속 물을 부으면서 형체가 단단해지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는 거지.
그냥 내가 쓰레기가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나에게 집중하고 긍정하고 참을성을 가질 수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 건 아니지만 음. 지금보다는 좀 편하게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