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정신적 상류계층과 경제적 상류계층 사이의 이러한 잠재적 갈등은 한동안은 전혀 표면화되지 않았는데 특히 예술가들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사회적 의식이 좀더 강했던 인문주의자들보다도 예술가들은 이 점에서 훨씬 느린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설령 그것이 외면화되고 표명되지 않는다 해도 언제 어디서나 도사리고 있었고, 모든 지식인계층은 문인이든 예술가든간에 사회적 근거를 상실한 '비시민적'이고 원한에 가득 찬 보헤미안 아니면 보수적.수동적이며 지배계급에 추종하는 아카데미션이 될 위험에 봉착했다.

이러한 양자택일 앞에서 인문주의자들은 상아탑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결국은 그들이 피하고자 했던 두가지 위험에 모두 빠지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근대의 모든 유미주의자들은 이러한 전철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회적 근거를 잃으면서 동시에 수동적이 되며, 그들이 지지하는 사회질서에 적응하지도 못하면서 보수주의의 이익에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은 독립의 의미를 무구속으로 이해하였고, 그들에게는 사회적인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은 바로 소외이며 현재로부터의 도피는 무책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묶어두지 않기 위해서 어떠한 정치적인 활동도 삼갔는데, 이러한 그들의 정치적 수동성은 권력자의 위치를 현상태 그대로 굳히는 결과를 초래했을 따름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에 대한 '지식인의 배반'(trahison des clercs)이요, 결코 근자에 비난의 대상이 된 정신의 정치화가 배반이 아닌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은 현실과의 연관성을 상실하고 낭만주의자가 되는데 이때부터 그들은 현실세계로부터의 소외를 세계에 대한 경멸로, 사회적 무관심을 정신적 자유로, 그들의 비시민적인 사고방식을 도덕적인 독립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르네상스를 잘 아는 한 전문가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다듬어진 산문을 쓰는 일이요 아름다운 시구를 짓는 일이며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 그들의 눈에 본질적인 것은 갈리아인들이 정복되었다는 사실보다도 갈리아 정복에 관한 주석서가 씌어졌다는 사실이다. ... 행동의 미는 문체의 미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인문주의자들만큼 그렇게 멀리 동시대와 유리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정신생활은 이미 밑바닥부터 뒤흔들렸고, 중세적 사회질서 속에 통합됨으로써 예술가가 누리던 균형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행동주의와 유미주의의 갈림길에 있었다. 아니면 그들은 이미 선택을 했는지도 모른다. 예술형식과 예술 이외의 목적의 결합이라는, 중세에는 소박하고 자명하며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었던 사실이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에게는 상실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 인문주의자들이 단순히 비정치적 문예애호가나 공허한 능변가 아니면 현실로부터 유리된 낭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또한 열광적인 세계개혁자요 광신적인 계몽주의자이며 무엇보다도 미래의 승리를 낙관하며 지칠 줄 모르게 일하는 교육자였다. 르네상스의 화가나 조각가들이 인문주의자들로부터 힘입은 것은 그들의 추상적인 유미주의뿐만이 아니다. 예술가는 정신적 영웅이고 예술은 인류의 교육자라는 생각 또한 그들에게서 나왔다. 예술을 청므으로 지적.도덕적 교양의 한 요소로 만든 것은 바로 이들 인문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화사]. 110~111p 인문주의자들의 소외. 창작과 비평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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