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베르트는 심기가 불편했다. 물론 그의 태자관보 아드리안의 평에 따르면 그는 언제나 심기가 불편했지만, 태좌관보도 지금 그를 마주한다면 그가 각별히 더기분이 나빠졌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무표정을 가장한 것은 태자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지금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존재에게 자신의 기분을 적나라하게 들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맞은 편에서 화사한 미소로 불쾌감을 조장하고 있는 이는 브란덴부르크공 프리드리히였다. 그는 감히 황태자의 서재 차창에 비스듬히 기대어 오로지 황태자를 비추어야 할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세상 만사가 제 뜻대로 돌아가도록 개입하는 것이 취미인 이 젊은 공작이 시간이 남아 돌아 하필 황태자 전용 서재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왕국의 제 2 계승권자이자 왕국 내 최대 영지를 보유한 그의 저택은 언제나 태자의 거처보다도 훨씬 많은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 침입과 같은 방문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이 장소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가 누구인지 겨뤄보자는 시비 뒤에는 아마 에델베르트로서는 당장 짐작도 가지 않는 이런 저런 꿍꿍이가 잔뜩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일단 에델베르트는 그 호화로운 덫을 무시하기로 마음 먹었다. 공작이 무슨 짓을 하건 이 곳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아지트였으며 그가 태자가 된 후에는 아예 그의 전속으로 배당된 곳이었다. 황태자 전용의 서재가 된 이후에는 거의 그의 사무실이 되다시피 하면서 외부인의 출입이 잦아졌으니 이 침입자도 오가는 사람의 하나 쯤으로 치부해버리면 될 터였다. 비록 공작 측에서는 모처럼의 독대를 무용지물로 만들 마음이 없는 것 같았지만 …….

 

전하의 독서 취향은 상당히 광범위 하시군요. 고대 철학서를 즐기시나 했더니 그 사이에서 이단의 금서가 튀어나오질 않나.”

 

태자에 대한 존경은 물론이거니와 기본 예의 범절에 따른 인사마저 생략한 첫 마디였다. 에델베르트는 그저 눈썹을 한 번 밀어 올렸다 내리는 것으로 답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서가로 향했다. 지껄이고 싶은 대로 지껄이라지. 그는 이전부터 왕가의 쓸데없이 섬세한 규율 중에 단 하나, 신분이 보다 높은 자가 말문을 열지 않는 한 하급자는 대화를 시작할 수 없다는 범칙의 효용성은 높이 사고 있었으며 태자가 된 후 기꺼이 그 특권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에델베르트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대개 상대가 먼저 무안함에 몸을 빼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작은 에델베르트의 무반응을 대화 승낙 신호로 받아 들였는지 유수 같은 흐름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간만에 들른 탓인지 책 배치며 구성이 많이 바뀌었더군요. 어린 시절 읽었던 책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서재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짓말이다. 서재 전담 관리쯤이야 공작이 턱짓만 했어도 쫓아와 그의 비위를 맞추었을 것이다.  와석종신과 소박한 사치에 대한 열망으로 살아 가는 그 노인은 명만 내렸다면 기꺼이 이 방 안의 모든 책들을 종잇장 하나까지 다 뒤집어서라도 그가 원하는 것을 찾아 주는데 노고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 뻔했다. – 때문에 에델베르트의 모든 비밀스러운 문서들은 그의 태자관보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뻔히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공작의 능청은 계속되었다.

 

혹 로나첸의 하인리히가 쓴 ‘격언이 어디 꽂혀 있는지 아십니까?”

“……”

폐하께서 즐기시고 자주 왕가의 어린 아이들에게 추천하시던 책인데요.”

 

공작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살짝 잠겨 들었다. 창가에 기대어 느긋하게 하늘을 헤아리는 자세가 영락 없이 옛 추억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의 강권으로 암송 하다시피 했더니 아직도 몇몇 구절이 머리 속에 남아 있군요. 비상하는 자여, 그대의 어깨를 살펴라.”

“… 그대의 어깨에 달려 있는 것이 땅에서부터 그대를 솟아오르게 한 날개인지, 하늘에서부터 그대를 끌어 올린 쇠사슬인지 확인하여라. 별 같잖은 구절을 다 기억하고 있군요. 프리드리히 공.”

 

그제야 에델베르트는 프리드리히가 왜 금 같은 시간을 쪼개 그의 서재에 나타났는지 깨달았다. 그는 오늘 국왕에게 내버려 두면 공작파에게 이롭게 돌아갔을 어느 지방 귀족의 유산 분쟁을, 분명 공작의 이권에 반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것을 주청했다. 국왕의 먼 사촌 뻘이자 현재 에델베르트의 고문인 엘리엇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가뜩이나 원활하지 못한 공작과의 관계에 또 한 줄 먹구름이 그어질 전망이 뚜렷이 보였던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최근 공작파의 손을 들어 주던 국왕이 선뜻 에델베르트의 주청을 수락했다는 데 있었다. 도무지 자신의 말을 다 보여주지 않는 국왕의 일 처리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지만 프리드리히 측으로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따져보면 프리드리히의 등장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에델베르트의 가장 사적인 공간에 불쑥 홀 몸으로 나타날 것이라고는 태자관보도, 고문도, 태자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영역이 침입당했다는 사실과 뒷통수를 맞았다는 자각이 함께 에델베르트의 심화에 불을 당겼다. 무시로 일관하겠다던 계획은 어느새 잊혀지고 가슴 안 쪽에 정적을 상대하는 데는 불필요한 날이 바싹 서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그 날을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는 내가 양부의 가호에 매달린 주제에 제가 나는 줄 알고 날개를 파닥이는 병아리라고 말하고 싶은 거요?”

명사의 격언은 세기를 넘어 누구에게나 교훈을 주는 법입니다. 전하.”

그 말 그대로 돌려 주겠소. 굳이 격언집을 읽지 않아도 그리 잘 기억하고 있으니 이만 돌아가 폐하의 성의를 잘 새겨 보는 것이 어떤가? 되도록 폐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내 앞에서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 그대의 알량한 이권을 챙기는데 유리하지 않겠어?”

 

내내 빈정대는 미소로 일관하던 프리드리히의 입매가 굳어졌다.

 

제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그 말을 전하에게 새겨 드리는 것 같군요. 전하께서 부디 오래도록 비상하시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다음 순간,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공작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자기를 빚은 듯 하얗고 매끄러운 턱이 금새 붉게 물들었다. 그 위로, 뼈가 도드라지게 쥐인 창백한 주먹이 두 번 세 번 내리 꽂혔다. 에델베르트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그 반동에 공작의 곱슬거리는 금발과 에델베르트의 부석한 금발이 함께 흐트러졌다. 공작의 눈동자에 파르스름한 노기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으나 에델베르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엉겁결에 주먹 한 번 쥐기는커녕 방어 자세마저 취하지 않고 있는 공작이나 주먹에 살의까지 실어 내리치는 에델베르트, 어느 쪽이 더 보는 이의 소름을 돋게 하는 지 쉽게 판가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에델베르트의 기세는 더 이상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눈 앞에 있는 것이 프리드리히의 이름이 적힌 벽이라도 되는 양, 온 몸을 실어 내리쳤다.
  난투에 단련되어 있지 않은 에델베르트의 손목이 금새 삐지 않았더라면 프리드리히의 얼굴은 더 이상 귀공자 행세를 할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에델베르트는 주먹을 멈추었고 프리드리히는 더 버티지 않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붉고 무거운 카펫 위에 산발이 된 금발이 굽이쳐 흘렀다. 가해자나 피해자 둘 다 한참 가쁜 숨을 몰아 쉬느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델베르트는 아까 프리드리히가 기대어 있던 창가에 이마를 대고 열기를 식혔다. 되도록 냉정하고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흥분으로 끓어오른 목은 잔뜩 쉬어 변성기가 극에 달했을 때 마냥 갈라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걸로, 그대의 망발에 대한 벌을 삼도록 하지. 그대가 잠시 잊었나 본데, 현재 이 서재의 주인은 나다. 다음 번에도 망각한다면, 그때는 절대, 넘어가지 않아.”

 

무차별적인 폭력 뒤에 나온 선언이라기엔 심히 유치했지만 - 입 속에는 피를, 가슴에는 분을 잔뜩 머금은 프리드리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피와 분이 함께 튀어 오를 것이 분명했고 그는 더 이상 이 천한 태자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대신 프리드리히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터진 입술이 다시 뜯기며 둔통을 겹쳐 왔지만 그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고작 살갗이 터지는 통증으로는 선명하게 날이 선 분을 다 삭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노기를 표출할 수 있는 길은 그저 바닥에 뻗은 채로 에델베르트의 발목을 물어 뜯을 듯 노려 보는 것 뿐이었다.
  태자의 붉은 서재는 짐승처럼 얽혔다 떨어진 두 왕위계승권자들을 품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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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해준 세링에게 고마워서 리퀘 ㅇㅇ
이것은 예정에 없던 도그파이트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전반부 캣파이트 후반부 일방적 도그파이트... 아 에델 미안...
일단 시점은 에델 태자 시절 ㅇㅇ 태자 되고 한 1년 되었을락 말락 아닐런지. 그러니까 에델도 어리고 프리드리히도 어리고. 앞 쪽 외전이랑 좀 캐릭터가 안 맞아도 나이가 달라서 그러려니 해주십시오. ㅇㅇ

...

제목을 뭐라고 붙여야 할지 잘 모르겠긔. 레알 도그파이트로 할까....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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