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쓸모없는 머리가 아닌가."

  스르릉 - 귀에 거슬리는 금속음에 감았던 눈을 뜨자, 유려한 칼날이 아드리안의 목에 와 닿아 있었다. 선대로부터 내려왔다는 명검은 과연 명불허전이라 주인의 명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먹잇감의 목에 붉은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가느다란 금을 따라 쓰라림이 번져갈 뿐, 칼날은 더 이상 들어오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채 그의 목 언저리에서 멈췄다. 기세에 눌려 움직이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와중에 목의 안위라도 확인하려는 듯, 침을 삼키는 소리는 어째서 이리 크게 울리는지. 칼을 쥔 자의 내리깐 시선에는 언뜻 희롱의 빛이 스쳐 지나갔으나 방심할 수 없었다. 칼의 주인은 그러고자 한다면, 그 희롱의 빛을 전연 지우지 않은 채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였다. 아드리안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는 실제로 몇번인가 그렇게 일을 '처리'했다. 비명에 간 목숨은 그렇게 그의 칼 끝에서 스러져 잡다한 소문에 묻혀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말해 칼의 주인은 제 검에 새겨진 공작가의 문장에 걸맞게 그 지위를 누릴 줄 아는 자였다.
  특히나 지금처럼 그에게 아쉬울 것 하나 없는 거래를 성사시키고자 그를 귀찮게 하는 입장이라면 그 변덕이 언제 어떻게 내리꽂힐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무시하실 만 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럭저럭, 어차피 그대가 제시할 수 있을게 거기서 거기니까. 예상에서 비껴가지는 않았다고 해주지."

  실로 공작다운 대답이었다. 목 아래에서 느껴지는 쇠붙이의 존재감만 아니었다면 욕심도 과하시다 웃어 주련마는. 이 나라에서 가장 활발한 교역지의 교역 독점권, 그야말로 한 나라의 보좌를 사기에 모자라지 않은 조건이었다. 대대로 왕의 소유였던 그것을 고작 왕권을 몇 달 더 유지하기 위해 내놓겠다는데 이런 거래를 앞에 두고 콧방귀를 뀔 수 있는 자는 이 나라 안에서 더 찾아보기 힘들리라. 이런 교섭 상대와 이런 자리를 가진다는 것 자체에 회의가 물씬 밀려 왔지만 때는 늦었으니. 이 자리에 오기 전, 몇 일 밤을 지새우며 재고 삼고 거듭했고 답은 하나였다. 지금 눈앞에서 장난감이나 다루듯 검을 고쳐 쥐는 남자의 말대로 뻔한 거래를 성공시키든가 아니면 이대로 그의 왕의 목을 내어주든가. 후자도 각오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누리는 것이 당연한 자들은 이래서 상대하기 곤란하다. 그들은 언제나 우아한 자세로 순식간에 남의 급소를 즈려 밟는다.

"뻔한 거래를 들고 왔으니 그 결과도 뻔히 알고 있겠지. 시간끌기일 뿐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알아듣고 싶지도 않군요. 공께서는 벌써 그런 말씀을 하실 만한 입장이 아닐 텐데요."

  조각 같은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기색이 핏빛어린 농인지 사형 선고인지 - 아드리안은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애초 공작에게 작위를 준 이 나라 제일의 권위가 아직은 종이호랑이만큼이나마 위력을 발휘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에게나 그의 왕에게나 승산은 없었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 목도 그대로 베어 보시지요."

  차라리 그 편이 이 모든 더럽고 전망 없는 계산을 빨리 끝내는 방법인지도 모르겠군. - 왕성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의 왕이 외려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여기서 아드리안이 죽는다면 적어도 그가 마지막까지 그의 왕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그리 말하며 웃는 왕에게 딱 부러지게 쓴 소리를 하고 나온 그 아니었던가. 그런데 정작 지금은 칼에 목을 드밀며 배짱을 부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그야말로 그 왕에 그 신하라 할 만하다. 
  아드리안으로서는 이대로 공작이 그의 목을 베어 버린 후가 어찌될지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었지만 적어도 그런 사정이 공작에게 들켜서는 안 되었다.

"좋은 배짱이군. 그래서 더 한심하지만."
"거래가 내키신다는 뜻으로 듣겠습니다."
"모르는 자가 보면 그대가 이 거래에 구사일생의 활로라도 숨기고 있는 줄 알겠어."
"그걸 용인할 공이시라면야."
"자신이 처한 상황은 잘 알고 있군."

  침묵하고 있던 검이 한 순간 화려한 호선을 그렸다. 두꺼운 벨벳 커튼 너머로 명멸하던 햇살이 검에 베여 흩어졌다. 검 끝에 실려 있던 균형이 깨지며 그의 몸이 풀어진 것도 잠시, 이번에는 칼날이 그의 턱을 받쳐 올렸다.

"그래, 그리 잘 알면서도 그 머리 위에 얹고 있는 자리는 내주지 못하겠단 말이지?"
"……."
"정말 쓸모없는 머리야."

  이제는 명백히 농조를 머금은 칼끝이 이리 저리 턱을 돌렸다. 턱과 칼의 경계에서 올라오는 소름에 고개를 젓자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젓는 쪽으로 날을 밀착시켜 온다. 그렇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길 몇 번 - 시선과 시선이 교차하고 한계에 다다른 아드리안이 목 매인 항의를 하려는 찰나,

"얼간이와의 거래는 이 정도에서 끝내지. 좋아.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상을 감사히 받겠노라 전하게."

  술잔이 비었으니 채워야겠다는 듯 선선히 승낙이 떨어졌다. 그 한마디에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가, 혀끝에서 떨떠름함이 올라왔지만 애써 눌렀다. 너무 들떠서도 너무 비꼬아서도 안 된다. 왕의 사절로서 가능한 한 절도 있게, 상대의 오만한 면상에 왕의 권위를 꾹 꾹 눌러 주어야 한다. 그리 하지 않으면 다음에 이 자를 상대할 때에 내세울 게 없다.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공작에게 감사를 표하고 이미 수속이 다 끝난 서류를 내밀었다. 왕의 인장 옆에 공작의 서명만 나란히 기입된다면 계약은 완료될 것이었다.
  그러나 공작의 칼은 여전히 그의 턱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머리만 쓸모가 없는 게 아니라 성질도 급하군. 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불미스러운 소란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는 해야 하지 않겠나. 무릇 이런 일은 조항 따위보다도 상호 신뢰가 더 중요한 법인즉-."

  칼날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려 셔츠의 첫번째 단추를 해체했다. 몸을 감싸고 있던 비단이 스르륵 흘러내리며 앙상한 어깨 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뭘 하시려는 겁니까!"
"왕을 위해 자네가 어디까지 내줄 수 있는지 이제부터 알아볼 참인데."

  당황으로 갈라진 그의 목소리 따위는 곧 공작의 잇새에 물려 스러졌다. 순간 아드리안은 평소에 공작에게서 느끼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를 짓누르는 공작의 눈동자에는 날카로운 경멸이, 입가에는 천연덕스러운 호기심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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