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ing
꿈
싱♪
2011. 1. 31. 08:53
역시 꿈은 강하다. 잡소리 안하고 한번에 핵심을 찌른다.
내가 s네 학교 연극부에서 올리는 레베카(쿤체, 르바이 작사 작곡) 주연을 하게 되었다. 다짜고짜 첫 공연 직전 리허설부터 시작했다. 솔로곡을 불렀다. 일어나서 생각해보니 레베카 속 노래가 아니었던 것도 같지만 비중은 대략 '병 속의 시간'이나 '오늘 밤 난 세상에 마법을 걸거임'같은 주인공 솔로곡이나 '내가 미세스 드 윈터야!' 급으로 주인공 강세 곡 정도였다. 초중반부는 어떻게 불렀다. 후반부에서 한 두 마디가 기억나지 않아 뭉겠다. 다행히 후반부는 조연들의 코러스가 들어갔기 때문에 반주 끝까지 넘어갈 수는 있었다.
그 다음 바로 본 공연 시작이었다. a, s와 함께 관객석 뒤쪽 1열 왼쪽 가장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s네 학교 공연장 관객배치가 아니다.) 공연 참가자들은 모두 앞쪽에 있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동아리였던 k와 비툴 커뮤니티하면서 만난 l님도 참가 중이었다. 관객석은 어둡고 이미 관객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 자리에 짐을 내려놓고 일어나는데, 주인공 첫 노래 가사가 기억나지 않았다. 당연하지. 독일어로는 들어봤고 읽어봤지만(독일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독일어 표기를 읽어 봤다는 뜻임) 한국어로는 h님 번역 외에는 접한 적이 없는데. 뮤덕질 시들해진 후 한번도 음반을 듣거나 가사를 확인해본 적도 없고, 내가 지금 기억하는 건 어렴풋이 떠오르는 독일어 발음과 h님 번역 상 어느 마디 내용이 대강 이렇다는 것 뿐이라.
당황해서 앞에 있는 l님께 가서 대본집을 빌렸다. l님은 대본집은 본인도 써야 하니까, 가사만 따로 적어 컨닝페이퍼처럼 만든 쪽지를 주었다. 급하게 훑었지만 당연히 한 소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l님 등장하는 부분 가사가 쓰여있지 내가 필요한 부분 가사는 없었고. 다시 가서 대본집을 빌릴 수 없을까 물었다. 아무래도 그건 어렵다는 것이었다. 가사가 실려있을지도 몰라서 프로그램북을 펼쳐봤다. 그런데 프로그램북 4/5~5/6지점까지 반지의 제왕 동인지 원고만 실려 있었다. 가사는 30p에 있다는데, 페이지 순서도 엉망진창이어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더 늦기 전에 못하겠다, 언더라도 올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연출(?)에게 갔다. 가사가 갑자기 기억나지 않는다.(갑자기는 얼어죽을, 이라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무대에 설 수가 없다. 연출은 어쩐지 가사 표현에 문제가 있더라, 그래도 되는 데까지 해보라고 권했고 난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의외로 쉽게 그러마, 하고 응낙이 나왔다. 응낙하면서도 연출은 몹시 태연했다.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깨고 나서도 얼굴 생김새가 다 기억난다. 약간 마른 체형에 큰 키, 하지만 프로포션이 좋은 건 아니고, 좀 멋이 없는 편이었다. 올백 포니테일에 자두같은 얼굴형, 붉은 기가 살짝 도는 갈색 피부, 실눈, 그에 못지 않게 소박하게 생긴 코와 입, 주근깨. 날 내려다보며 '다음 해에 다시 한 번 해보세요. 여기에서 같은 극을 올릴 경우에 연락을 할 수도 있어요.' 라고 대단히 침착하게 말했다. '같은 극을 올릴 리도 없고 1년이나 지난 시점에 초연날 펑크낸 사람을 부를 리가 있냐.' 라고 생각했지만 알겠다고 하고 물러났다. 돌아서는데 기분이 참 시원찜찜 서운털털했다. 손등에 실험용 알코올 바른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싸-한 느낌.
관객석 뒤쪽의 내 자리로 돌아오니 a가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한대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역시 한 번 연습도 같이 하지 않은 사람들이랑 어떻게 뮤지컬을 하냐고 부연 설명했다. a가 놀라며 주연이면 당연히 연습을 해야지, 왜 하지 않았냐고 한마디 했다. 그러게, 왜 하지 않았지? 뭐 하다가 오늘이 된 거지? 가사 정도는 외울 수도 있었잖아. 주연이 되고 오늘 리허설을 하기까지 시간이, 꼭 어두운 관객석처럼 흐릿했다. 무릎이며 학교 과제 얘기를 하려다가 그거 다 뻔한 핑계라는 생각이 나서 관뒀다. 그리고 깼다.
뭐 해석이 필요 없는 것 같은데. 깨고 나서 '그러게, 왜 하지 않았지? 뭐 하다가 오늘이 된 거지? 가사 정도는 외울 수도 있었잖아. 무릎은 다 핑계야.' 하는 생각을 몇초 정도 더 하고서야 현실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더 멍해졌다. 아니 시발 내가 얼마나 삽질을 했기로서니 꿈까지 날더러 현실을 보라고 하지?
전반적으로 강했지만 몇가지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극장에서 내 자리 위치라든가, 공연 참가자 중에 l님과 k가 있다든가. 프로그램북의 상태라든가. 못하겠다고 말할 때의 내 말투라든가. (가사를 못 외웠다고 하는 게 아니라 잊어버렸다고 했다.) 내가 못하겠다고 했을 때 연출-주변인의 반응이나, 그런 것들.
아마 내가 한번도 배우들 대기실 같은 곳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객석 형태로 상상한 게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뒷자리 1열이라는 게 웃긴다. 공연 참가자 지인들은 무슨 기준으로 선발된건지는 모르겠는데, 글쎄. 아마 내가 열등감을 느끼는 상대가 아니었을까. 둘 다 길고 하얗고 예쁘다. 내가 아무리 살이 빠지고 존나 잘 꾸며도 저렇게는 못 되겠지 - 라고 생각하는 부류로 이쁘다. 감자를 깎아 놓는다고 사과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존잘이고. 자기 능력 살려서 밥 벌어 먹고 있고. l님의 경우에는 나보다 다섯살 쯤 연하인데다 사실 내가 이분이 뭘 하는지 구체적으로 모르기는 한데.(그렇게 따지면 k도 모르지만.) 어, 그분이 속해 있는 집단 전반에 있는 진지한 자세때문에 나온 것도 같다. 아무튼 나랑은 다른 거다. 나랑은. 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도 될 수 없는, 하지만 참 긍정적으로는 생각하는 모델?
프로그램북 상태...는 아무래도 걍 내 머릿속인 것 같은데. 사실 이것보다 더 찔리는 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본집을 빌리려 했다는 거다. 문제를 자체적 능력으로 해결할 마음이 업ㅂ는 거지 이건. 내가 하는 게 늘상 이런 식이라고. 어. 그런데 내게 호의있는 상대에게 어떻게 빌린다고 해도 결국 그건 내 답안지는 아니라는 거. 어찌어찌 대백과사전을 찾아 연다고 해도 내 항목은 죄 페이지가 뒤집어져 있고 내용물은 취미일색고..... 넹 그냥 한마디로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다는 거야. ㅇ<-<
그래서 꿈님은 말했슴미다 너님 이대로라면 딱 이러케 망함미다. 주연을 맡는다 해도, 아무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준비도 연습도 하지 않은 채, 대본도 읽지 않고 무대에 오르려다가 물러나게 될 거라고. ㅇㅇ. 무대를 밟을 기회가 언젠가 여건이 다 맞추어진다면 다시 불러질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바라는 게 웃긴 기회 정도로 격하된다. 핵심은 개간단해. 왜 연습 안했어?
... 내가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꿈이 이렇게 친절가이드를 하지....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