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ging

8.15

싱♪ 2010. 3. 11. 23:06

  아드리안은 막 들어올린 스푼을 도로 접시에 내려 놓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 스푼을 접시에 내리 쳤다. 스푼과 접시가 맞부딪는 기세에 묽은 수프가 사방으로 튀며 얼룩을 남겼다. 이전의 그에게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던 거칠고 성마른 태도였다. 고작 3개월 전만 해도 비명과 통곡을 파는 패스트푸드점같은 ER에서 얄미우리만치 침착함을 잃지 않던 청년은 주기적으로 덮쳐오는 통증에 시달려 희미한 흔적만 남았다. 그래도 여전히 그다운 점이라면 시신경이 거진 죽었음에도 여전히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이리라. 다갈색 눈동자가 위에서 아래로 세 번 정도 왕복했을 때쯤, 서류를 내민 장본인 - 프리드리히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마저 식사 하지. 식사 끝내고 서명 해요.”  

“죄송하지만 시력이 저하된 탓에 이 종이가 무엇인지 모르겠군요. 아무래도 수취인을 잘못 찾으신 것 같은데 도로 가져가시죠.”

습관적으로 구사한 정중한 어투였으나 그 안에 담긴 짜증은 충분히 상대방에게 전해지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가 시식대의 종이를 뽑아 버리지 않는 것은 순전히 그 종이에 직접 손을 대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훤히 알면서도 프리드리히는 전혀 난감해 하지 않았다. 외려 팔짱을 낀 채 무게 중심을 오른발에서 왼발로 옮기는 폼은 이 곳이 중환자의 병실이 아니라 제 집 침실이나 되는 듯 여유롭기까지 했다.

“왜 이제 와서 딴 소리입니까, 허락 했잖습니까.”“네. 뇌가 곤죽이 된 상태에서요. 지금도 내가 제정신인지 확신할 수 없군요. 가장 미친 건 당신인 게 확실하지만.”

실력 있는 동료이자 담당 환자에게 정신 이상 진단을 받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닐 텐데, 주치의는 별 감흥을 표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에 이의가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발작 상태인 환자를 내리 누르고 진통제를 주사하며 청혼 할 리가 있나. 그 자신의 이에 깨물리다 못해 딱지가 앉은 푸석한 입술에서 기어코 신음성 비슷한 답 한 마디를 들어 냈다고 다음 날 식대 위에 디저트처럼 혼인신고서를 얹는 짓은 더 더욱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수긍 하든 하지 않든 그의 프로포즈 상대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스푼이 아슬아슬하게 접시 위를 떠돌기를 두 세 차례, 아드리안은 기어이 식대를 밀어 버리고 말았다. 그의 깡마른 손아귀에 남은 힘으로도 정체불명의 종이 쪽지는 치울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스락거리는 종이가 아니라 그의 목숨에 한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제 뜻대로 해내지 못하는 일이 없는 신경외과계 유력가 쪽이었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미스터 파펠. 당신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10일 쯤.”“그 중 맨 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5일도 채 되지 않아. 그러니까 적어도 그 동안은 밉살맞은 소리는 하지 말도록.”

할 수만 있다면, 아드리안은 '밉살 맞은 소리'를 앉은 자리에서 스무 마디 쯤 더 해줄 참이었다. 그러나 다시금 몸부림 치기 시작한 그의 뇌는 혀를 마음껏 놀릴 여력이 없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주사기를 통해 주입되는 약물의 화학 작용에 의해 지탱되던 몸은 더 반항하지 못하고 고통에 굴복했다. 욕지기와 신음을 띄엄 띄엄 내뱉는 아드리안을 뒤로 하고, 프리드리히는 아드리안이 밀쳐 놓은 식대에서 구겨지고 수프 국물이 튀긴 서류를 집어 냈다. 차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아드리안의 손가락과 잠시 얽히고, 금빛 이니셜이 새겨진 검은 만년필이 경련을 시작하는 손에 쥐어 졌다.

“날 이해할 필요는 없어. 그럴 시간도 없을 테니까.”

담당 환자의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미간을 주시하며, 닥터 클라인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야말로 곤죽이 된 뇌에라도 새겨지도록 선명하고 단순하게.

“그냥 그 서류에 서명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