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mming/etc
황철웅
싱♪
2010. 1. 19. 16:54
벗이 있었다. 검으로는 나라에서 그와 대적할 수가 없으리라 칭송을 듣던 이였다. 명성은 허언이 아니었고, 때문에 벗은 언제나 그의 앞에 있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벗과 자신의 간격을 잘 알고 있었다. 벗이 허물없이 그의 어깨에 팔을 걸고, 서슴없이 그에게 등을 맡길 때. 나란히 서 있을 때 그 간격은 더욱 아득하게 벌어졌다. 그가 앞을 바라보면 언제나, 언제나 보이는 것은 벗의 등이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자리에 벗은 오롯이 서 있었다.
그 실력만큼이나 곧고 바른 이였다. 그들이 지켜야 할 나라가 외적에게 무참하게 유린 당하고 나라의 근본이 허물어졌을 때조차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본분을 다 했다. 그가 달려나갈 때 그는 미련을 품은 눈으로 그의 등 뒤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나아갈 수 없고 나아갈 필요도 없으며, 나아가지 않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벗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그들이 지키지 못한 나라는 날이 갈수록 뒤숭숭해졌다. 적국에 인질로 보내져 8년을 보내고 돌아온 국본은 온 몸의 구멍에서 진물을 쏟고 요절했다. 국본을 절명케 한 것은 적국이었을까, 아니면 고국이었을까. 어쨌든 기회는 왔다. 그는 벗을 거꾸러 뜨렸다.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천한 관노로 떨어진 그의 등을 밟고 말에 올랐다. 절로 훈련하는 자신의 흔적을 훑어보는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국란과 숙청이라는, 검 한 자루로는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는 전쟁에서 그는 승리했다. 그는 벗을 외면했다. 벗의 뜻도 정도 의리도, 벗과 함께 한 시간 버렸다. 첫 승리는 첫 도피였다. 졌으나 물러나지는 않았던 전장에서, 그는 내려갔다. 그는 벗을 꺾었으나 그의 검을 쥐고 흔드는 권세에 졌다.
그리고 벗은 여전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이제 적장과 검을 겨루었던 장수는 없다. 언제나 그의 손에서 창을 떨구던 경쟁자도 없다. 그의 승진을 가로막는 자도 없고 그의 앞에서 무관의 자세를 말하던 자도 없다. 그가 애써 어깨를 펴고 고개를 치켜 들어야만 간신히 마주할 수 있는 친우도 없다. 그는 잘 해 나가고 있었다. 권세가의 장애있는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뒤숭숭한 세상에 쉬 끊어지지 않을 연줄을 만들었다. 노모와 따순 밥을 나누어 먹고 다달이 녹봉을 전해 드렸다. 그저 참고, 참아가면서 한 세상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을. 벗에게서 등을 돌렸듯 뒤틀린 세상에는 눈을 감고 의젓하게 살아가고자 했으나...
그러나 벗은 여전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피바람이 다시 그를 전장 아닌 전장으로 몰아갔다. 그가 외면한 세상이 그의 검에게 핏값을 갚으라고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