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과제 토픽 3

Growing 2009. 12. 17. 04:17


해마다 유월이면 - 최승자


해마다 유월이면 당신 그늘 아래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내일 열겠다고, 내일 열릴 것이라고 하면서
닫고, 또 닫고 또 닫으면서 뒷걸음질치는
이 진행성 퇴화의 삶,

그 짬과 짬 사이에
해마다 유월에는 당신 그늘 아래
한번 푸근히 누웠다 가고 싶습니다.

언제나 리허설 없는 개막이었던
당신의 삶은 눈치챘었겠지요?
내 삶이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오만과 교만의 리허설뿐이라는 것을.

오늘도 극장 문은 열리지 않았고
저 혼자 숨어서 하는 리허설뿐이로군요.
그래도 다시 한 번 지켜봐주시겠어요?
(I go, I go, 나는 간다.
Ego, Ego, 나는 간다.)


----------------------------------------------

 

호모 사피엔스 출신 - 오규원

보행기를 처음 타보는
호모 사피엔스 출신 아이
으으아 으으아 환성을 지르며 발을 구른다
으으아 으으아 환성을 지르며 앉았다 일어선다
그때마다 보행기는 앞으로 가지 않고 뒤로 밀리고
앞으로,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사람과 멀어지고
다급하게 앞으로 손을 내밀지만
내미는 순간 더 뒤로 밀리고
앉는 순간 엉덩이의 무게가 뒤로 쏠리고
일어서는 순간 바닥에 닿는 다리의 힘이
무릎 관절에 꺾여 뒤로 쏠리고
뒤로 뒤로 보행기는 밀리고
좌우 벽에 부딪히고
가야 할 길을 접어 숨기고 있는
바닥과 멀어지고

으으아 으으아 ----
으으아 으으아 ----



-------------------------------

너무 멀리- 강은교
바리데기, 가장 일찍 버려진 자이며 가장 깊이 잊혀진 자의 노래


그리움을 놓치고 집으로 돌아오네
열려 있는 창은
지나가는 늙은 바람에게 시간을 묻고 있는데
오, 그림자 없는 가슴이여, 기억의 창고여
누구인가 지난 밤 꿈의 사슬을 풀어
저기 창밖에 걸고 있구나
꿈속에서 만난 이와
꿈속에서 만난 거리와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않던 한 사람의 얼굴과
그 얼굴의 미세한 떨림과
크고 깊던 언덕들과
깊고 넓던 어둠의 바다를,
어디선가 몰려오는 먹구름 사이로.

너무 멀리 왔는가.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그리움이 저 길 밖에 서 있는 한.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