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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탄(1996) 남자들의 세계에서 히로인의 역할

싱♪ 2015. 6. 21. 14:46

상해탄 (1996) 장국영 / 유덕화 / 영정 주연 



상해탄 (1996)은 '남자들의 세계'에서 정석적인 여캐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아무리 작품을 잘 만들고 캐릭터가 매력적이어도 분명 한계가 온다. 남자가 아니라 계승권이 없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는 절대 메인 서사가 될 수 없다.

이야기 배경은 1919년 상해. 여주인공 풍정정은 이 영화 최종 보스 풍선생의 딸이다. 대개의 픽션 악당답게 풍선생도 제 딸을 세상 때는 하나도 묻지 않게 곱게 싸서 애지중지 기른다. 덕분에 풍정정은 남자 주인공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자격 요건을 두루 갖추게 된다. 그녀는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고 아름답고 순결한데다 풍선생의 하나뿐인 무남독녀다. 대략 이 영화 풍선생의 힘은 이미 지참금이 어쩌고 할 급이 아니다. 그냥 상해=풍선생 ㅇㅇ 풍선생을 계승한다는 건 상해를 손에 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정정은 '상해에서 가장 소중한 것' 이라 불릴만 하다. 하지만 여기에 정정의 한계가 있다. 그녀는 가장 소중한 '것'이지 소중한 것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정정은 아버지와 그 수하들이 얼마나 지독한 악당인지, 그들의 그물망이 얼마나 넓게 펼쳐져 있는지 잘 안다. 그녀는 여러 차례 일탈을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세상 어디에 가도 아버지가 있음'을 깨닫는다. '딸을 소중히 소유하려는' 아버지에대한 반발때문에 자신의 존재 자체를 원망할 정도로 괴로움에 빠진 풍정정. 그녀가 시도한 일탈 중 성공한 것은 단 하나, 아버지 외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자에게 사회적 자리를 내주지 않는 세계에서 그녀는 어딜 가나 '보호받는 존재'니까.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뿐이기에.

그녀는 자신이 온전히 사랑하는 남자 허문강과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남자 정력 사이에 놓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둘 중 어느 남자와 함께 할지 선택하는 건 그녀가 아니다. 둘 중 어느 쪽이 그녀와 함께 할지는 친구이자 연적, 허문강과 정력 두 남자가 결정한다. 이건 그녀가 허문강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보다, 정력이 얼마나 허문강에게 아량을 베푸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다. 분명 사랑을 한 건 그녀인데 결정권은 정력에게 넘어가 있는 것이다. 그녀는 거기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도 없었다. 정력이 워낙 아량이 넓어서 모든 걸 받아들이고 이해해주는 바람에. 

재미있게도 정력과 허문강은 각자의 방식으로 '풍선생의 사위 노릇'을 수행한다. 허문강은 풍선생을 살해하고 정력은 풍선생을 계승한다. 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이면서 아버지에게 반발하는 정정의 할 일을 대신 수행해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정정의 이야기는 끝난다. 그녀는 제 눈 앞에서 아비를 살해하는 허문강에게 총을 쏘지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다. 이후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폐인이 되어 정력의 도움을 받는다. 상해의 모든 것은 정력이 물려받고 그녀는 완전히 영화 뒤로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절망에 빠져 속옷 차림으로 욕실 바닥에 늘어져있는, 누군가 도와줘야만 하는 나약한 여성이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권력을 쥐고 발언할 수 있었다면 그런 모습으로 엔딩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두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기에 그녀에게 내줄 자리가 없다. 그녀는 마땅히 두 남자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고 물러나야 하는 캐릭터인 것이다. 

그럼 이 세계에서 여자가 권력을 쥐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가? 이 영화에는 이미 그런 '금기'를 범하고 있는 여캐가 등장한다. 그 풍선생마저도 '동업자'라고 표현하는 여 보스. 초반에 허문강을 위협하고 그 동지들을 모조리 사살해 버린 여자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무려 허문강과 정력 둘을 성추행하는 여자 강간범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미지를 보자마자 '아 이게 남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강간 공포로구나' 하고 팍 깨달음이 올 정도다.
이게 그냥 여자 강간범이 아니라 '남자들이 상상하는 강간 공포'라는 삘이 오는 데는 근거가 있다. 일단 그녀가 정력을 덮치는 장면은 그녀가 정력을 따먹으려는 건지 거세하려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그녀가 키우는 거대 뱀이 정력의 사타구니를 물어뜯으려고 시도하는 장면이 나온다거나, 곳곳에 비치된 칼 이미지라거나... 그녀가 허문강을 위협하는 장면에서도 마음대로 허문강의 샅에 손을 넣는 장면이 나온다. -그 전까지 참고 있던 허문강이 그 직후에 반항한다 -

남자 못지 않는 권력과 힘을 가지고 제 욕망대로 행동하는 여자는 남자들에게 저렇게나 공포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최소한 극중 배경인 1919년 당시) 여자가 그런 힘을 가지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만큼 그녀는 더욱 환상 속 괴물이 된다. 그리고 남자들이 생각하기에 '위협적인 여자'는 자신의 남성성을 노리고 파괴하려 드는 게 당연한 것이다. 왜? 그녀는 남자가 아니니까. 정상적인 권력의 대물림 루트 안에 들어올 수 없는 기형아이므로.

아마 풍정정이 권력을 가졌다면 그녀 역시 남자를 위협하는 여자로 그려지거나 / 남성화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영화는 '상해탄을 배경으로 남자 둘의 운명적 만남과 엇갈림, 영혼 결혼식'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니 이런 가정은 불필요하지만. 그리고 이 서사에서 풍정정이 '소위 현대적 / 주체적 여성'으로 행동했다면 매력도 고뇌도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상해탄은 자기가 갖고 있는 서사에 걸맞게 캐릭터 매이킹을 해냈다. 다른 여캐를 보고 싶다면 다른 서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