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출전을 막지 못하였으니 내 형의 얼굴을 보기 민망하군요. 나를 천거한 보람이 없겠 습니다.
희지재는 짐짓 무안한 척 어깨를 움츠렸다. 순욱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 무슨 말을. 지재 자네 아니면 내 누구에게 주공을 맡기겠나.
- 지금의 주공께 보좌가 필요하겠습니까?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는 효자가 어찌 남의 충고에 칼을 내려놓겠습니까?
- 주공께서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에 더욱 곁을 지킬 사람이 필요해.
굳이 두 번 칼을 뽑는 이상 쉬이 물러날 리 없다. 그 칼끝은 훨씬 집요하고 냉정할 터.
- 이제와 효자 노릇을 그만 둘 수도 없으니 더욱 그악해지시겠지요. 아무도 주공의 본심을 읽지 못하니 죽이라면 죽이고 태우라면 태울 수밖에요. 조맹덕의 악명이 더욱 올라가겠습니다.
- 하여 서주에서의 충원은 바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이번 출정에는 통상 몇 배의 군량이 필요할 거야. 더 큰 문제는 서주 전역과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는 거지. 서주 목 역시 이점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도겸 그 자는 이번에도 교묘히 후퇴만 하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거야. 이제 우리는 숙적과 울타리를 나란히 하는 처지일세.
- 그래서 형도 주공을 말리지 않은 것 아닙니까. 이제 주공에게는 두 가지 길만이 남았지요. 서주를 완전히 집어삼키느냐, 약이 받쳐 백정 노릇을 하다 기력을 다하든가.
후우 - 순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 형도 알고 있다시피, 길은 단 하나이지요.
- …….
- 하루 빨리 도 공조가 죽는 것.
- ……과연.
- 기왕이면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눈을 감는 것이 좋겠지만, 그것은 정녕 천운이 따라주어야겠지요?
희지재가 슬핏 웃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달무리가 끼었다.
- 문약 형. 지재가 이번 서주 행에 천운을 빌어 볼까 합니다.
sample 2 _ 조조를 배웅하는 진궁과 순욱
“혹여나 싶어 묻는 것인데. 순 사마.”
“말씀하십시오. 진 대인.”
- 맹덕이 혹 이번 원정에서는 인정을 베풀 가망은 없나?
허나 어리석은 기대는 차마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했다. 그는 눈짓으로 저 편 성벽을 가리켰다.
“……변양 일가의 처분에 대해서는, 다른 말씀이 없으셨는가?”
일곱 구의 시신은 그들과 함께 묵묵히 조조를 전송하고 있었다. 순욱의 시선이 잠시 맞은 편 성벽에 닿았다가, 도로 진궁을 향했다.
“예. 없었습니다.”
“혹여 아이의 시신이라도……. 아닐세. 되었네. 관두세.”
변양은 연주의 명망 높은 유자였다. 연주 곳곳에 두 번째 서주 행을 위한 방문이 붙자 그는 곧장 소복 차림으로 복양성 한복판으로 나와 곡을 하기 시작했다. 서주의 죄 없는 백성들을 위한 곡이었다. 조조에 대한 비난은 서주의 원혼들이 직접 옮겨 붙은 듯 살벌했다.
- 평생 효도 인도 의도 모르던 자가 제가 미욱한 탓으로 아비를 길에서 비명횡사시키고는 남의 가문의 제사를 끊는구나! 애초에 마주치는 사람 반절이 도적인 땅에 보란 듯 금은보화를 백여 승씩 싣고 지나가는 꼴이 백정 앞에 나가 살집 자랑하는 돼지 꼴 아니냐! 하기야 왕실의 구정물을 먹고 자란 씨 없는 돼지 집안이니 그 본성이 어디 가랴! -
“유자가 어찌 무당 노릇을 하더란 말이냐? 요망하구나.”
코웃음을 치던 조조가 그 꼴을 직접 구경하러 나가면서 변씨 가문은 참화를 면치 못했다. 변양은 손목과 발목이 끊어지고 혀가 조각나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의 집을 드나들던 식객들, 선처를 비는 자들이 모두 그의 눈앞에서 결딴났다. 노부모와 처자가 하나씩 목이 매달리는 꼴을 본 후에야 변양은 목을 베일 수 있었다. 그가 원성을 쏟다 피거품을 물 때까지 일부러 천천히 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어린 핏덩어리 하나도 곱게 땅에 묻히지 못하게 하라는 특명까지. 시신들은 일부러 동쪽 성벽에 매달렸다. 서주로 출병하는 날 모든 군사들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이것이 결코 의義는 아닐세.”
진궁이 힘주어 말했다. 순욱은 입을 꾹 다물고 가타부타 답이 없었다.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부연 하늘이 끝없이 펼쳐졌다. 우우우 - 천지를 진동시키던 진군나팔 소리가 어느새 꽤 멀어졌다. 최선두의 대장기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배웅은 끝났다. 이제 이 성루를 내려가면 각자의 임무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진궁은 성루를 내려가기도 전에 지쳐있었다. 지긋지긋한 전투 한 국면을 치르자 곧장 다음 적군, 또 다음 적군이 꾸역꾸역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진 대인.”
그가 무거운 발걸음을 막 옮기려는 순간, 순욱이 그를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오?”
“오늘 밤 사마부로 들러주시겠습니까?”
“동군 각지를 돌아보는 것이 내 일임을 잘 알지 않소? 나는 일찌감치 돈구로 출발할 참이었는데. 사마 역시 곧 견성으로 출발해야 하지 않소.”
“허나 제가 대인과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대인께서도 기꺼이 여길 일입니다.”
그리고 가벼운 손짓.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는가? 진궁은 가만히 순욱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순욱이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오늘 밤 변양의 시신을 거둘 참입니다.”
그 어조는 평탄했고 목소리에는 탁함이 없었다. 처음부터 예정된 식순을 알리는 듯 심상한 투다. 진궁은 슬쩍 성벽 너머를 돌아보았다. 대군은 끊임없이 움칫움칫 나아가고 있다. 조조의 뜻일까? 아니. 그 조조가 이런 지시를 내렸을 리 없다. 그렇다면 순욱의 독단일까? 아무리 총애를 받는 모사라 하나 이런 행동을 마음대로 하고 무사할 리 있을까? 문득 조조를 반절 쯤 가리웠던 순욱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이 젊은이는 정녕 담이 큰 겐가, 아니면 진노를 사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겐가?
“좋네. 내, 오늘 밤 가도록 하지.”
“자시子時에 오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자시에 맞추어 순욱의 처소에 가려면 일정이 조금 더 촉박해진다. 진궁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잰걸음으로 성루를 내려갔다. 그의 모습은 곧 복양 성내 샛길 사이로 사라졌다. 순욱 역시 관저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서기 직전 그는 한 번 더 동편을 돌아보았다. 들새 몇 마리가 빈 들과 하늘을 가로질렀다. 거센 바람에 성루에 세운 깃발들이, 성벽에 매달린 변양 일가의 팔다리가 일시에 펄럭였다. 순욱의 입에서 짧은 한탄이 잔가지처럼 툭 비져 나왔다.
“진 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는 의가 아닙니다.”
시신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제법 멀었다. 그러나 먼발치의 순욱에게도 변양의 치뜬 눈은 똑똑히 보였다. 차마 저 눈을 못 본 척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눈을 직시할 염치도 없다. 허공에 대고 되풀이하는 약조는 순욱 자신이 듣기에도 너무나 무의미했다.
“내 언젠가 자네에게 반드시 다시 술을 올리겠네. 그때에는 빈 잔에 내 마음만 채울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