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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행네트워크: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

싱♪ 2012. 1. 10. 08:57

6. 나는 88만원세대인가? - 오창은 


 -   [88만원세대]  의 저자들이 이야기하듯 '수치화된 임금지표'의 극복이 20대의 희망일 수 없을까? 눈길을 보다 먼 곳을 향해 던져보자. 물질적으로 안정된 정규직 삶을 위해, 높은 임금만을 목표로 대학 캠퍼스에서 공부하고 토론하고 사색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모두들 최소 월 2백만 원의 정규직을 향해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내던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책은 근본적 가치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성찰적 힘이 결여되어 있다. 

 -  [88만원세대] 가 이야기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에 청년세대는 비판적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논의가 기본적으로 세대론 담론에 포박되어 있다는 사실이 우선 지적되어야 한다. 40~50대가 20대를 착취하고 있다는 세대갈등론은 일종의 지분 싸움을 조장한다. 문화혀명 당시의 홍위병처럼 20대가 40`~50대를 전복한다고 더 나은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청년세대 역시 자신이 처한 사회경제적 상황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더 나아가 사회적 약소자에 대한 진지한 관심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억압당하는 20대'가 아니라 '고통받는 약소자'로 인식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   과연 한국의 20대에게는 정규직만이 희망인가?
사회체제 내에서 만들어진 직업관에 순응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이들도 있다. 보다 근본적인 사고 속에서 윤리적 실천, 보살핌의 철학을 위해 나눔의 가치 실현을 실천적으로 모색하는 20대도 있다. 체제 속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새로운 체제를 만들려고 고투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삶이다. 예를 들면 시민단체에서 한 달에 88만 원 이하의 급여를 받고 자기가치의 실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선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삶은 어떠한가? 골방에서 라면을 끓여먹으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이나 악보를 그리면서 창조적 자아실현을 위해 몰입하는 이들의 삶은 또 어떠한가? 직업 전선에서는 비참한 알바지만, 그곳을 벗어나서는 주체적이고 건강한 자아실현을 위해 고투하는 이들을 단지 자본주의에 포박된 소비기계라고만 호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 하지메(마츠모토 하지메. [가난뱅이의 역습])처럼 다른 삶을 상상하고 실천하거나, 독서 마니아로서 지식 소비와 생산에 개입하거나, 독립영화를 제작하거나,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많은 이들은 기존의 사회. 경제적 가치와는 다른 가치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그것은 문화적 가치일 수도 있고, 윤리적 가치일 수도 있으며, 자기실현을 위한 고투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율적 자기결정권을 위해 필요에 따라 알바를 하기도 하고, 캥거루족이 되기도 하고, 사회의 일탈적 주체가 되기도 한다. 돈을 버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문화적 가치 실현과 공공선을 위한 역할에 충실한 이들도 있다.
 사회적 상식이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을 비참하게 호명한다고 해서, 이런 독립적 자아들이 비참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기존 사회시스템에 대한 반란자들이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구현하는 대안적 존재일 수 있다. 


(** 지금 내 주소는 이 글에서 말하는 훌륭한 체제 종속자도 못되고 그렇다고 적극적 자아실현의 주체가 되지도 못하는 많은 변두리 어디쯤이다. 사실 많은 20대들이 그럴 거다. 종속되기는 싫다. 종속된다고 행복한 가축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아니까.
  하지만 적극적 주체가 된다고 해도 '체제에 속하지 않는' 다는 것이 정말 힘든 일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내가 자기가치를 실현하려고 해도 지금 이 판국에서는 '내 행위가 아름답다'는 것만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내가 약간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건 결국 이 응원에 내가 완전히 응할 수 없어서인 거겠지.
  물론 이 글에서 말하는  아름답다는 게 대충 젊은이의 낭만을 미화하는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저자들은 분명 이런 모든 주체성을 되찾기 위한 움직임이 '아직은 구체적 결실을 얻지도 못하고 목적도 불분명한, 지금 당장은 실효를 얻지 못하는' 행위라고 얘기 하고 있다. 아름다운 건 낭만이 아니라 버텨내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가는 자세란 거지. 지금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가 이쁘다는 거지.
  그래. 내 위화감은 지금 내 포즈를 내가 아름답다고 느낄 여유가 없어서, 그리고 '나는 무능잉여쓰레기'라는 2n년간의 자학이 뿌리깊어서인 걸 거다. 음. 지가 재활용불능 쓰레기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 불쑥 넌 꽃씨였다고 하면 당황할만 하잖아. 기둥도 약도 땔감도 못되는 손톱만한 녹색 이파리 두 개가 언젠가 자라서 꽃을 피울 거라고 하면 그 말이 곧이 들리겠어?

  한 번 곧이 들어보자.  ㅇ<-<) 



7. 노예교육과 불량의 윤리학 (하승우)

- 그러나 시장의 평등은 개인의 평등만을 의미할 뿐이고, 시장의 자발성과 평등은 인간을 시민으로 성장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공동체 내의 사람들이 자유를 향유할 기회를, 공동체의 평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다. 특히 시장은 시민권이 지탱하는 공적인 장을 사적인 이해관계로 변질시킨다.  

9. 직접행동의 민주주의 (하승우)
 -   개인이 개인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가 필요하다. 다른 생명과의 공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자급과 자치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직접행동은 개인과 사회를 대립시키지 않고, 공존을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강하고 자율적인 개인을 만드는 과제는 강하고 자율적인 사회를 만드는 과제이기도 하다. 자기만의 강함을 추구하는 건 권력정치로 변지되기 쉽다. 
  새로운 주체에 관한 구상은 반드시 이 문제를 건드려야 한다.


10. 한국의 풀뿌리민주주의운동에 관한 이론적 고찰(하승우)

- 프레이리([페다고지])는 민중지식의 신비화, 민중지식의 절대찬양은 민중지식의 거부만큼이나 문제가 된다며 무조건적인 수용이 가지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프레이리는 "민중지식을 거부하는 것이 엘리트주의라면, 민중지식을 절대 찬양하는 것은 근본주의"라고 비판한다.  대중의 상식에 기초하지만 그 상식을 무조건 인정하자는 것은 사람들을 상식의 틀에 가두고 운동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을 무조건 인정하거나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그 둘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글너 점에서 함께한다는 것은 서로를 동일화하거나 차이를 무조건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프레이리가 비판하는 것은 민중의 지식과 지식인의 지식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이다. 프레이리가 강조하는 것은 "민중의 지식과 지식인의 지식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을 그복하는 방법, 혹은 스니데르스가 원시문화와 선진문화라고 부른 것 사이의 변증법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