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ing
20111022
싱♪
2011. 10. 22. 06:36
우리는 화훼를 주업으로 하는 평화로운 마을의 학생이었다. 학교는 예술 계열이 특화되어 있었는데, 학생들은 제각각 특기 하나 씩을 가지고 있었다. 토비는 모든 부분에서 굉장히 우수한 학생이었다. 글도 곧잘 썼지만 그가 주 종목으로 삼은 건 무용이었다. 나는 크게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단짝이었고, 나는 토비가 정말 잘 되길 바랐다.
학교에는 매 시즌마다 발표회를 열었다. 발표회에는 프로 예술가들이며 고등 예술학교 교사들이 와서 학생들을 스카웃하는데 그 시즌에는 토비가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미 도시의 무용 학교에서 그 애를 데려갈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곳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토비가 다른 장르에 한눈을 팔지 않도록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그 애에게는 음지나 양지에서 스카웃 제의가 계속 들어왔다. 단짝인 내게 권유를 종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생의 편지가 온 건 바로 그때였다. 당신의 글을 봤다. 나는 당신의 재능에 관심이 많고, 당신이 누구보다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며 자기 밑에서 배워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 그는 현재 최고의 작가였다. 글솜씨는 말할 것도 없고 아무에게도 매이려 하지 않는, 상당히 괴팍한 태도로도 유명한 이였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는 심지어 스카웃하러 온 손님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당장 그 편지를 토비에게 전했다. 당연히 토비에게 온 편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애는 도시에 이미 여러 번 글을 내고 상을 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서 이런 편지를 받을 만한 사람은 그 애 밖에 없었다. 선생의 제안은 이미 무용 쪽으로 기울어 있던 그 애마저 놀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이제와서 이 편지 하나 때문에 다 결정된 진로를 틀 수는 없었다. 토비는 무용을 준비하면서, 예전에 쓴 글을 하나 보냈다. 그 후 얼마간은 발표회 준비를 하느라 너무 바빴고 나는 그 편지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발표회가 다 닥쳐서 언뜻 토비에게 물어보니 보낸 글에는 답이 오지 않았다고 했다. 좀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토비는 웃어 넘겼다.
그리고 그때 무용 학교 선생과 친구였던 선생이 발표회에 들렀다. 정식으로 스카웃에 끼어든 것도 아니고 그가 그 쪽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 존재감은 확실히 대단했다. 작가라기보다는 수렵인처럼 보일 정도로 덩치가 크고 검은 머리카락을 텁수룩하게 기르고 있었다. 정말 격 없고 시원시원한 태도에, 제 할 말은 다 하는 타입이었다. 나는 굉장히 소심한 성격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선생과 얘기하면 마음이 편했다. 짧은 기간에 친숙해졌다고 하기는 힘들고, 꼭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삼촌 조카 사이 정도라고나 할까. 어색한데 또 어딘가 통하기도 하는 뭐 그런.
발표회는 마을의 커다란 온실에서 꽃 전시회와 함께 진행되었다. 선생은 문간에 기대선 채 멀찍이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무대에서는 토비의 춤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난 선생에게 토비가 만약 글을 썼더라면 참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은 영 모르는 척을 하며 토비가 글을 선택하지 않은 게 뭐 그리 안타까운 일이냐고 말했다. 나는 난감해져서 예전의 편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그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 편지는 나한테 보낸 거라고.
정말 놀랐다. 정말 그 자리에서 기절초풍할 만큼 놀랐다. 가만 생각해보니 편지 어디에도 토비 앞으로 보낸다는 말이 없었다. 당연히 토비에게 온 편지라고 믿었었는데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작가가 되라는 말은 토비가 아니라 내가 들은 말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발 날 제자로 받아 달라고. 선생은 웃으며 거절했다. 일고해 볼 가치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계속 쫓아가면서 빌었다. 화려한 축제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꼴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선생이 웃으며 날 피하고, 나중엔 발을 지팡이처럼 써서 날 슥 밀어냈다. 그래도 계속 빌었다. 선생이 특유의 시원시원한 말투로 말했다. 꼭 내게 배워야만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까지처럼 조금씩 쓰면 되는 것 아냐? 언젠가 지방 신문 한 켠에 그럭저럭 인정 받는기고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넌 유명세같은 문제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으니 너만 만족할 수 있으면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겠어? 뭐하러 내게 배우려고 해?
나는 꼭 당신한테서 글 쓰는 자세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얼마나 유명한 작가가 되느냐도 얼마나 대단한 작품을 쓰느냐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자세라니, 말하는 내가 의아할 정도였다. 내가 그런 걸 배우고 싶었던가? 내가 정말 그에게 배우고 싶긴 한건가? 어떤 대우를 감수하고서라도? 대체 난 왜 지금 이렇게 빌고 있는 거지, 그의 말대로 지금까지처럼 나 혼자 써대도 상관없을 텐데. 그런데 난 빌고 있었다. 그가 밀어낼 때마다 무릎 걸음으로 기어가면서. 선생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선생을 잡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을 사람들이 나섰다. 미리 말해두지만 절대 위협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마을의 축제 분위기는 여전했다. 선생의 거절하는 태도마저 어찌나 유쾌한지 꼭 축제의 일환같았으니까. 아무튼 마을 사람 한 명이 나서서 내가 왜 저러고 있는지 묻더니 가볍게 선생을 야유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 늘고 누군가 선생의 바지 허리춤에 빵을 집어 넣었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 가볍게 떠나지 못하리라는 뜻이었다. 누군가는 굉장히 가시가 많이 돋아 있는 장미꽃을 집어 넣었다. 그러자 모두가 그를 본받아 특별히 가시가 날카롭게 난 장미를 수백, 수천 송이 던져댔다. 나를 저렇게 버려두고 가는 게 가시밭길에 내버리고 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던가? 아무튼 선생의 앞뒤로는 붉은 장미길이 펼쳐졌다. 나는 그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선생을 바라보았다. 선생은 또 한 번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런 소박한 사람들을 상대로는 어쩔 수 없다며 투덜거리고는 내게 일어나라고 했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선생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이 떠나는 내게 온갖 화초와 자잘한 추억을 장식할 만한 기념품들을 잔뜩 안겨 주었다. 나는 절대 이 장미 길을 잊지 않겠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약속했다.
까지가 오늘 꾼 꿈. 정말 선생을 만난 거 같아서 즐거웠다. 요즘은 날마다 기념할 만한 날인 것 같다.